신편 한국사근대43권 국권회복운동Ⅳ. 항일의병전쟁3. 정미의병2) 중부지역의 의병전황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1. 한반도 중립화 운동
          • 1) 한반도 중립화론의 대두
            • (1) 임오군란 후 일본에서의 한반도 중립화론
            • (2) 거문도사건 전후기의 한반도 중립화론
            • (3) 청일전쟁 전후기의 한반도 중립화론
          • 2) 대한제국의 영세중립화 시도
          • 3) 러·일 개전기 대한제국의 전시국외중립 선언
            • (1) 전시국외중립 외교
            • (2) 전시국외중립 선언
        • 2. 보호국화 저지 외교
          • 1) 한국의 일본보호국화 과정
          • 2) 정부 주도의 보호국화 저지 외교
            • (1) 반침략 자주 외교의 전개
            • (2) 을사조약 무효화 외교
          • 3) 민간인의 보호국화 저지 외교
            • (1) 대영·대미 보호국화 저지 외교
            • (2) 대일 보호국화 저지 외교
        • 3. 특사의 헤이그 평화회의 파견
          • 1)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
          • 2) 고종의 3특사
          • 3) 특사의 장외 언론활동
          • 4) 특사 파견의 파문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1. 유생의 상소 투쟁
          • 1) 을사조약 체결 이전의 상소운동
          • 2) 을사조약 반대 상소운동
        • 2. 시민의 투쟁
          • 1) 지방세제의 시행과 시장세 징수
          • 2) 순천·용천 양시의 시장세 반대운동
          • 3) 시장세 반대운동의 전국적 확산
        • 3. 황무지개척권 반대운동
          • 1) 황무지개척권 요구의 배경
          • 2) 황무지개척권의 요구
          • 3) 한국민의 반대운동
            • (1) 언론·상소 투쟁
            • (2) 농광회사의 설립
            • (3) 보안회의 투쟁
          • 4) 황무지개척권 요구의 철회
        • 4. 국채보상운동
          • 1) 국채보상운동의 발단
            • (1) 일본의 차관공세
            • (2) 국채보상운동의 발단
          • 2) 국채보상운동의 전개
            • (1) 국채보상운동의 확산
            • (2) 여성의 국채보상운동 참여
          • 3) 국채보상운동의 좌절
        • 5. 의사·열사의 항쟁
          • 1) 장인환·전명운의 스티븐스 사살
            • (1) 스티븐스의 친일 외교활동
            • (2) 장인환·전명운의 스티븐스 사살
            • (3) 장인환·전명운 의거의 영향과 의의
          • 2)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
            • (1) 이토 히로부미 사살 배경
            • (2) 이토 히로부미의 사살과 그 역사적 의의
          • 3) 이재명의 이완용 척살 미수
      • Ⅲ. 애국계몽운동
        • 1. 애국계몽단체
          • 1) 초기의 계몽단체들
            • (1) 보안회
            • (2) 공진회
            • (3) 국민교육회
            • (4) 헌정연구회
          • 2) 대한자강회
            • (1) 대한자강회의 설립과 조직
            • (2) 대한자강회의 계몽사상
            • (3) 대한자강회의 자강독립운동
          • 3) 신민회
            • (1) 신민회의 창건과 목적
            • (2) 신민회의 국권회복운동
          • 4) 대한협회, 기타 학회들
            • (1) 대한협회
            • (2) 계몽학회들
          • 5) 애국계몽단체 활동의 역사적 의의와 그 한계
        • 2. 애국계몽사상
          • 1) 애국계몽사상의 개념과 형성
            • (1) 애국계몽사상의 개념
            • (2) 애국계몽사상의 형성
          • 2) 국권회복의 논리
            • (1) 자강독립론
            • (2) 실력양성론과 독립전쟁론
          • 3) 국민국가건설의 논리
            • (1) 국민국가론
            • (2) 입헌군주정체론과 공화정체론
        • 3. 애국계몽운동의 전개
          • 1) 민중계몽운동
            • (1) 신문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
            • (2) 회지·잡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
            • (3) 강연회·토론회를 통한 민중계몽운동
          • 2) 교육구국운동
            • (1) 근대학교 설립운동
            • (2) 교과서 편찬운동
            • (3) 의무교육 실시운동
            • (4) 실업·상무교육 실시운동
          • 3) 경제구국운동
            • (1) 황무지개간권 반대운동
            • (2) 국채보상운동
            • (3) 부동산침탈 반대운동
            • (4) 민족경제 건설운동
          • 4) 정치구국운동
            • (1) 을사조약 반대운동
            • (2) 고종양위 반대운동
            • (3) 한일합방 반대운동
          • 5) 민족문화운동
            • (1) 국어국문 진흥운동
            • (2) 국사교육 강화운동
            • (3) 민족적 종교운동
          • 6) 독립군기지 건설운동
            • (1) 독립전쟁론의 대두
            • (2) 독립군기지 건설준비
            • (3) 독립운동기지의 건설
        • 4. 105인사건
          • 1) 사건조작 배경
          • 2) 사건조작 경위와 사건 개요
          • 3) 재판 경위와 사건의 허구성
          • 4) 사건 연루자의 수난과 사회경제적 성향
      • Ⅳ. 항일의병전쟁
        • 1. 갑오·을미의병
          • 1) 갑오·을미의병의 배경
          • 2) 갑오의병의 전개
          • 3) 을미의병의 전개
            • (1) 을미사변과 을미의병의 개시
            • (2) 단발령 공포와 을미의병의 확대
          • 4) 갑오·을미의병의 사회적 기반과 성격
        • 2. 을사의병
          • 1) 을사의병의 재기
          • 2) 전국 의병의 활동
            • (1) 경기·강원도
            • (2) 영남지방
            • (3) 호서지방
            • (4) 호남지방
            • (5) 양서지방
          • 3) 을사의병의 의의
        • 3. 정미의병
          • 1) 군대해산
            • (1) 정미7조약
            • (2) 서울 시위대의 해산
            • (3) 남대문 전투
            • (4) 지방진위대의 항전
          • 2) 중부지역의 의병전황
            • (1) 중부지역의 의병전환
            • (2) 남부·북부지역으로의 확전
            • (3) 의병장들의 의병활동
          • 3) 이강년의 의병활동
            • (1) 이강년의 활동
            • (2) 무기와 전술
            • (3) 의병의 조직과 군율
        • 4. 의병전쟁의 발전
          • 1) 서울진공작전의 실패와 근거지문제
            • (1) 13도 의병부대의 서울진공작전
            • (2) 유인석의 지구전론과 근거지 문제
            • (3) 근거지 구상에 나타난 유인석 사상
            • (4) 서울 진공 실패 후의 분산활동
          • 2) 의병전쟁의 새로운 앙양과 평민 의병장들
            • (1) 스티븐스의 저격과 의병전쟁
            • (2) 평민 의병장들의 활동
            • (3) 한국합방안의 결정과 이토 히로부미의 저격
          • 3) 호남지방의 의병전쟁과 남한대토벌작전
            • (1) 호남지방의 의병전쟁
            • (2) 일본군의 남한대토벌작전
          • 4) 합방 전후의 의병활동
          • 5) 독립군 운동을 위한 근거지 창설
            • (1) 동만·남만의 한인사회
            • (2) 신민회의 근거지 창설
        • 5. 의병전쟁의 특징과 의의
          • 1) ‘전쟁’이라 하는 이유
          • 2) 의병전쟁사의 시기구분 문제
          • 3) 이념상의 특징
          • 4) 조직상의 특징
          • 5) 활동상의 특징
          • 6) 의병전쟁의 의의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2) 중부지역의 의병전황

(1) 중부지역의 의병전환

이상과 같이 한국군의 강제해산에 반대하여 일어난 서울시위대와 지방진위대의 항전은 전국 의병의 봉기를 유발하였다. 즉 1907년 8월의 한국군 해산은 의병항쟁을 일찍이 보지 못한 영역과 규모로 확대시켰으며 그 구성과 성격 또한 크게 전환시켰다. 1907년 말까지 전황은 거의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1908년에는 그 절정에 이르렀다. 남쪽으로는 제주도로부터 북쪽으로는 간도·노령·연해주에 이르기까지 의병전쟁의 파장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전선없는 전쟁이 한반도를 휩쓸었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목가적인 한국의 농촌마을들이 일본군의 방화로 초토화되었고 평화적인 양민이 학살당하였다. 그러나 의병들은 매국노 일진회원들을 처단하고 지주와 양반의 재물을 빼앗아 군량미로 충당하였다. 교통은 두절되고 상업은 마비되었다. 이 때문에 대일농산물 수출은 격감하고 일제상품의 농촌침투는 일시 중단되었다. 재한일인들은 농촌에서 도항으로 쫓겨가고 그들의 토지투기는 위축되었다. 모든 말단 행정기능은 마비되고 세금징수는 정지되었다. 소작료와 고리대 이자의 징수가 중단되고 군수, 면장의 사표가 사태를 이루었다.1242)

1907년 여름에 시작된 의병전쟁은 그 해 가을까지 치열하게 계속되었다. 3년 동안에 걸친 항쟁을 통해 의병들은 일본군과 일본인 그리고 부일 매국노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하였다. 일제는 의병항쟁으로 막대한 전비와 인명을 소모하였으며 직접·간접으로 입은 손실 또한 컸다. 그들은 한국에 대한 경제적 제수탈을 저지당하였으며 한국병합의 음모를 일시 중단해야만 했다.

상해에서 발간되는 한 영문일간지(1909년 8월 23일)가 전한 한국특별통신은 의병전쟁으로 말미암아 일제가 겪은 수난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한국은 실로 흥미있는 나라이다. 일본인은 한국에서 경제적 승리를 얻었다고 하지만 병력을 증가하거나 관리를 주입하지 않으면 실업계가 일종의 마비증에 걸린다. 적어도 통계상으로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여러 사업들이 정지되고 있다는 사실은 세상이 다 알고 있는 일이다. 실례를 들면 목포의 한 시가에는 일본상점이 즐비하게 있었으나 오늘날 이들 상점은 폐점상태에 있다. 또 인천에서는 일본상인의 5분의 일은 실패하여 이미 본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한국민의 불타는 애국심과 일본인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는 의병에 의한 교통두절은 앞에서 말한 상업거래의 한 장해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이리하여 주둔병이 증가함에 따라 더욱더 한국인이 시장을 멀리하게 되었다(≪暴徒編冊≫, 復命書<全羅道義兵戰爭이 미친 影響>).

1907년 8월초 강원·충북·경북 등 각도의 의병이 먼저 봉기하였다. 격문이 나붙고 함성이 울리면 군중은 운집하여 경찰분파소와 군아, 우편취급소를 부수고 방화하였다. 8월 5일 원주진위대가 봉기하기 전에 이미 중남부 여러 곳에 의병들이 일어나 군읍을 습격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즉 8월 3일 밤 충북 청풍의병은 청풍읍을 습격하여 경무분파소에 밀려들어 파괴하고 양총 3정과 순검모, 군도, 제복 등을 노획하였으며 순검을 붙잡아 몰매를 가했다. 때마침 선유차 청풍읍에 유숙하고 있던 청풍 관찰사 李鎬成은 기겁을 하여 도주해 버렸다.

같은 날 문경에도 의병이 나타나 우편소청사가 파괴되고 ‘소내 금고 기타 물건 용지 등을 모조리 파괴’하고 우송인 島田一磨를 사살하였다. 또 친일파의 가옥 30동도 불태웠다. 8월 4일 아침에는 경기도 양근읍에 다수의 의병이 진입하자 우편취급소장(일인)은 놀라서 가족을 데리고 도망하였다. 양근읍을 습격한 의병은 조인환이었다. 8월 5일 저평읍에도 150명의 의병이 나타났다. 이들 역시 저평군내 농민들이었으므로 대부분이 무기를 갖지 못하였다.

이날 하오 원주진위대 병사들이 원주읍을 점령하였다고 해서 결코 이상하지 않았다. 강원도 원주 일대는≪大韓新聞≫이 보도한 바와 같이, 10여 년 이래의 의병 근거지였기 때문에 순식간에 불길이 퍼져갈 수밖에 없었다.

원주폭동의 폭도가 1천여 명에 달하여 일경과 포화상접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詳報는 아직 듣지 못하였으나 道廳塗說에는 전의병장 柳麟錫·金夢虎 등이 10여년 전부터 禍胎를 釀出하던 소굴이라 이를 盤據하여 작금에 해산병의 폭동이 일어났다. 원주를 중심으로 동으로 횡성·강릉·평창·정선을 연결하고 남으로 충주·단양·제천을 연락하여 서북으로 이천·여주·저평·양근 등 제군이 향응하여 6∼7백 리 지방에 창궐한 형세가 일익 증가한다고 한다.

두 부대가 이동한 각 지방에는 許俊·李康秊·金生山·邊鶴基·曺仁煥 등 여러 의병이 할거하고 있었다. 이미 8월 7일 중원분파소(충주)를 습격한 의병들 속에 다수의 한국군 병사가 섞여 있었던 사실로 미루어 봐도 의병세력이 얼마나 신속하게 퍼져 나갔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중원분파소를 습격한 의병들은 일인 경무보조원 2명을 포박하여 처단하고 무기와 탄약을 노획하였다.

8월 10일 여주의병은 한강을 항행하는 일인목선을 안창강변에서 기습하여 일인 20명을 총살하고 적재화물 일체를 노획하였다. 여주의병은 20일 여주읍을 포위하여 일경 9명과 3시간을 교전, 2명을 사살하고 읍을 점령하였다. 8월 11일 영천군내에 의병 300명이 일어나 분파소, 우편국을 습격하고 철도노선을 파괴하였다.

이같은 강원·충청·경기 등 중부지역의 의병에 대하여 일본군 사령관은 8월 6일 서울 주둔 보병 제47연대 제3대대장 下林소좌로 하여금 보병 2중대를 인솔케하여 현지에 급파하였다. 5일간의 행군 끝에 8월 10일 원주에 도착한 下林부대는 중도에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원주에도 그냥 입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원주지역에서 단 한 사람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고 원주부근의 소탕에 힘썼으나 며칠 동안 조금도 얻는 바 없었다. 일본군의 예봉을 피한 의병들은 이미 각 지방으로 확산되어 현지에는 없었으며 인민들은 일본군의 야만적 수색을 피해 각처로 피난하고 말았다. 의병들은 8월 12일 여주읍을 점령하여 서울 원주간의 도로를 차단하였고 계속하여 음죽·장호원을 장악하였다. 이리하여 원주의 일본군은 고립상태에 빠졌고 여주의병의 병력은 수천 명에 달하였다.

춘천방면으로 진출한 민긍호의 한 부대(50∼80명)는 8월 14일 홍주읍을 점령하였다. 그들도 우편취급소와 ‘일본전당국’을 파괴하고 일본가옥을 소각하였다. 8월 15일에도 의병들은 경기도 죽산읍(의병 100명)을 각각 점령하여 일인과 친일배를 처단하였다.

같은 날 충북 체천에서도 한국군 장교가 지휘하는 의병이 일본군 1소대를 포위 습격하였다. 일본군은 청풍군으로 탈출하려 하였으나 그 곳에도 다수의 의병이 있다는 정보가 있고 후방에도 의병의 추격이 있어 우왕좌왕하며 밤새 도망하였다. 이처럼 우세한 공격을 시도한 의병의 지휘관이 누군지는 명확치 않으나 제천 방면에는 朴汝成(대장, 평강인, 35세), 趙東敎(소모장, 청풍인, 30세)의 의병과 신성대의 의병이 할거하여 제천 일대는 완전히 의병 천하였다. 이 지방은 후일 일본군의 잔악한 토초작전으로 거의 잿더미가 되었다.

8월 15일 새벽 자정, 경기도 수원역에 돌연 흑복의 의병 수십 명이 나타나 사격을 가하였다. 이들 의병은 수원군내 의병 400명의 일부로 추측된다. 또 경기도 남양군민 수백 명은 동읍 우편취급소에 몰려들어 투석전을 벌였다. 20일에도 그들은 3백여 개의 돌을 우편취급소에 던져 사무실을 전파하였다.

강원도 인제읍에도 8월 17일 330명의 의병이 진입하여 군아와 서기청 그리고 분파소를 파괴하였고 서기와 순검을 사살하였다. 그들의 일부는 동읍 일진회 사무소를 산산히 파괴하였다. 이로 인해 일인 遞送夫와 보좌원은 재빨리 도망가고 말았다. 인제읍을 습격한 의병들은 양구지방의 의병이었다. 양구·화천·인제 일대는 강원도 의병의 본거지로 많은 부대가 활동하고 있었다. 의병장 池龍基(약 500명)를 비롯하여 신창현·권득수·박장호·황양수·김봉기·최도환·김가·조가 등 군소 의병장이 농민들을 지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원주진위대의 일부 병사를 이끌고 강원도 동해안 쪽으로 진출한 김덕제 부대는 그곳 의병과 합세하여 3천 명의 대부대를 이루었다. 8월 14일 평창·진부를 점령한 부대원 수백 명은 우편국원 2명을 사살하였다. 이미 8월 3일 대화에서 체송인 1명을, 5일 평창에서 우편취급인 2명이 살해된 바 있으니, 김덕제 부대의 도래는 이 곳 민중항쟁에 큰 힘을 주었다. 강원지방에도 의병들이 일어나 일본 어부를 추방하였다. 강릉 부근에는 특히 일본 어부가 많이 상주하여 때때로 사건이 일어나도 그 때마다 통신의 편리가 결핍되어 있어 집무상 불편이 많다고 불평한 현지 일본관리는 “금번 폭도가 봉기하여 일개 중대와 경찰관 11명이 토벌에 나섰으나 지금처럼 우편에만 의존하여 통신함은 매우 불편하기 때문에 차제에 지급 개통하여 주기를 무망”하였다.

강릉의병의 봉기에 놀란 일본군은 원산 주둔 보병 50연대 제2중대를 군함에 실어 급파하였다. 일본군 사령관은 고립상태에 빠진 충주와 원주의 일본군을 구출하기 위해 또 다른 1개 소대를 증파하였다. 이 증원소대는 장호원에서 150명에 달하는 의병부대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이보다 앞서 16일에도 충주수비대 6명이 장호원에서 피습되어 그 중 2명이 사살되었고 19일에도 이천 부근에 나타난 공병 1분대가 의병의 공격을 받아 도주하였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는 중대병력이나 소대병력의 동원으로 사태를 수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 원주와 충주 부근의 폭도세력은 갈수록 광폭하여 각지로 전파되었으나 이에 대한 下林 支隊의 행동은 여의치 않아 맹렬한 응징적 토벌을 개시할 필요를 느낀 것이다. 이는 다름아닌 야만적인 일본군의 방화 살육 작전을 의미하였다.

하세가와는 우선 충주에 대대병력을 급파하였다. 즉 서울 주둔기병(제17연대)과 보병(제51연대·52연대)으로 구성된 대대병력을 차출하여 8월 18일 철도편으로 조치원까지 수송, 다시 도보로 충주에 행군시켰다. 하세가와는 또 1개 소대(서울 제51연대)를 보내 춘천수비대를 보강하고 그 주력을 홍천 방면으로 진출케 하였고 동해안의 삼척에도 1개 중대(원산 보병 50연대)를 파견하여 정선 방면으로 진출시켰다. 그는 다시 1중대(대전 보병 제14연대)를 안동·영천 방면으로 파견하여 동남부를 담당케 하였다. 이리하여 일본군은 8월 20일까지 춘천·원주·충주·영천·삼척·강릉을 잇는 포위망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포위작전은 조금도 의병의 활동을 꺽지 못하였다. 8월 21일 이천의병은 수십 주의 전신주를 도괴시켰고 파주에서도 329칸의 전선을 절단하여 일본군의 통신망을 착란시켰다. 23일 충주수비대로 군량을 호송하던 일본군(서울 보병 51연대 1개 중대)은 도중 이포에서 1,000여 명에 달하는 의병에 포위되어 전사자 1명을 내고 여주로 퇴각하였다. 이튿날 일본군은 여주수비대의 후원하에 이포를 역습하였으나 의병은 이미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일본군은 이포와 부근 촌락을 모조리 소각하였다. 광주에는 남대희의 의병대가 일본군을 노렸고 전 시위 1연대의 중대장 허준이 지휘하는 이천의병(400명)은 30일 일본군 1개 소대를 포위하여 그 중 1명을 사살하여 이를 쫓아버렸다.

한편 대대병력으로 증강된 충주수비대의 일부는 8월 23일 청풍·제천으로 진입해 전읍에 방화하여 초토화시켰다. 그러나 제천의병(약 360명, 산포 1문)은 이날 적의 본거지 충주를 포위공격하고 있었다.

의병들의 행동은 8월 20일 이후 더욱 민활해졌고 그 전투구역도 더욱 확대되었다. 순흥(27일 의병 400명, 순사 1명 사망), 영춘(15일 순사 1명 사망), 청산(의병 300명), 옥천(28일 민중 60명, 군아 파괴, 일인 5명 사망, 괴산(30일 의병 300명), 간성·고성(28일) 등 제읍이 잇달아 의병의 세력하에 들었다.

이리하여 8월 30일 長谷川은 伊藤博文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발송하였다.

각 지방폭도가 쉽사리 진정되지 않음은 그들의 출몰이 不絶하고 폭도와 보통인과의 구별이 불명하기 때문이다(≪駐韓日本公使館記錄≫, 1907년, 電受).

이는 초기 의병이 민중폭동으로 비롯되었음을 암시하였고 이제 수습될 수 없는 국면에 도달하였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9월 이후 이듬해 봄까지 항쟁은 더욱 치열히 전개되고 더욱 광범하게 퍼져 갔다. 1907년 가을과 겨울 그리고 1908년 봄은 의병항전 최고의 시기였던 것이었다.

1242)朴成壽,≪獨立運動史硏究≫(創作과 批評社, 1980), 146쪽.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