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작전과 민간의 지원조직
가) 속오작대
운강 이강년의 속오작대법은 의병부대의 기본편제를 거의 완벽하게 보여주는 실례로 주목된다.1248) 속오작대법에 따르면 먼저 병사 10명이 좌우 2열 종대로 서고 선두에 隊長 1명, 후미에 小兵 1명이 서는 것이 의병군 최하 단 위의 기본대형이다. 이것이 곧 隊이다.
각 대는 각각 셋으로 묶어 3개대 36명을 1旗로 하여 旗總 1명이 이를 통솔한다. 이 36명 단위의 旗는 다시 셋씩 묶어서 3기가 1哨로 편성되며 哨長 1명이 이를 통솔한다. 따라서 1초는 모두 108명이 되며 기총 3명과 초장 1명을 포함한 112명이 1초의 총원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의병군의 하부 단위인 초는 3대 3기 즉 3. 3의 원칙으로 편성되는데, 그 위의 상부 단위는 5. 5의 원칙에 따라 조직된다. 즉 5哨 5營의 원칙에 따르는 것인데, 초는 中哨와 左右哨 그리고 전후의 5초이며 이들 5초를 1營으로 묶어 營司 1명이 이를 지도하되 營 역시 중영과 좌우영 그리고 전후영의 다섯으로 나누어 5영이 된다. 즉 5초 5영이라는 5. 5형식이 상부 편대의 원칙이었으며 하부 편대는 3대 3기였으니 3. 3형식이었다.
속담의 3. 3. 5. 5라는 말은 삼사인 또는 오륙인이 떼를 지어 가는 모양을 말하나 그 실은 군중을 3대, 3기, 5초, 5영으로 묶어 조직화한다는 군대편성의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1초는 112명이므로 5초는 560명이다. 이 560명이 1영이 되고 560명으로 구성된 영을 다시 다섯으로 묶으면 5영의 총병력이 2,500명이나 된다. 이 2,500명을 총지휘하는 자가 營將이다.
의병의 인사계통을 살펴보면 영장은 먼저 5명의 영사를 선발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선발된 영사로 하여금 각각 예하의 다섯 초장을 선발케 한다. 선발된 초장은 다시 각자가 세 명의 기총을 선발하고 기총은 또 세 명의 대장을, 대장은 11명의 병사를 선발하는 것으로 인사의 모든 차례가 끝난다.
그러나 선발할 때 유의할 일은 서로 의지와 기상이 부합하는 사람들로 짝지어 대를 편성해야 한다는 것이며, 영사와 초장 그리고 그 아래 기총까지는 각각 認旗를 수여하여 깃발에다가 그 성명을 기입하도록 한다. 즉 主將旗(총대장기)에는 5영사의 성명을 기입하고, 營司旗에는 5초장의 성명을 기입하도록 한다. 또 哨長旗에는 3기총의 성명을 기입케하고, 旗總旗에는 3대장의 이름을 기입하도록 하여 대원들로 하여금 제각기 자기 소속이 어딘지를 알게 하였다.
이와 같이 편대가 끝나면 여러 서기들로 하여금 군안을 작성하여 성문화하고 교령(명령)의 하달을 시험하고 징과 북 등을 쳐서 알리는 신호와 눈으로 보고 아는 표시를 주지시켜야 한다.
이 자료는 그 밖에도 행진법과 金鼓令을 기술하고 있으며, 作隊, 행진, 金鼓의 법은 “모름지기 수만 번의 연습을 통해 자기 몸과 팔을 다루듯 하고 손가락을 움직이듯 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허다한 절목과 기관을 어찌 한 폭의 종이에 그리겠으며 기록할 수 있겠는가”라고 끝맺고 있다.
이강년은 무과 출신이므로 민병을 조직화하는 데 있어서 옛날 속오군의 편제를 그대로 따랐던 것이다. 본질에 있어서 향군이었던 속오군은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통해 전국적으로 실시되어 오다가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19세기 초 정약용이 民堡議를 제창하고 1867년 申觀浩가≪民堡輯說≫을 써서 다시 이 제도의 부활이 강조되었던 것이다.1249)
신관호의≪민보집설≫에 보면, “무릇 堡는 5인으로서 伍로 하고 2伍로서 隊로 하고 3대로서 旗로 한다”고 하면서, 기는 公·小·中·大·元의 5기로서 堡로 삼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민보는 軍旅이므로 반드시 절제가 있어야 하는데, 만일 귀천을 같은 伍에 있게 하면 貴者는 편하게 일하고 賤者는 고역을 맡게 되므로 일을 고루 나누어 하기 위해서는 귀족은 귀족끼리 編伍하고 천족은 천족끼리 편오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민병의 기본편제와 대동소이함은 물론 儒軍과 民軍이 따로 편성되었던 초기 의병의 편성이 민보체제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1250)
나) 의 조
의병은 스스로 군율을 제정하여 약탈 토색질을 엄금하고 있다. 그것은 따로이 군자금 조달의 정당한 방법이 있었기 때문이다.≪운강창의록≫말미에 나오는 將任錄 가운데 좌종사 100명이 곧 군자금의 조달자였고 그 중 60%가 양반, 40%가 평민이었다.1251)
지금도 민병에 군자금을 제공했다고 주장하는 의병 후손들이 많이 있으나 대개 구체적인 자료를 제시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李冑承(1868∼1946, 충북 제천 寒所 北壹里)의<義助>(1902. 12)에 따르면 의병의 군자금이 동계(촌계) 형식으로 거출되고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1252)
<의조>에 기록된 사람의 인원은 모두 123명인데 각각 12냥에서 1냥까지 의조금을 내고 있다.1253) 구체적으로 말하면 10냥이 3명, 5냥이 9명, 4냥이 3명, 3냥이 17명, 2냥이 19명, 나머지 72명이 1냥씩 내고 있다. 또한 職銜이 있는 사람이 총 123명 중 43명이고 나머지 80명은 직함이 없다.1254) 또 이와는 별개의 대장(연대미상)에는 소를 팔아 군비에 충당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以軍備賣牛’라고 명기된 것 이외에는 ‘入用放賣’ 등의 암호로도 표시되어 있다. 이 자료가 연대미상인 점에 아쉬움이 남으나 소 팔아 의병댔다는 소문이 적지 않았는데 그것이 사실임이 드러났다.
다시 말해서 의병은 민군이기 때문에 국고의 지원이 전혀 없는 것이 원칙이었으며 민이 스스로 부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부담원칙은 각호의 재력에 따라 분배한다는 것이었다. 이 원칙에 따르게 되면 부민이 군자금을 대고, 빈민이 민병으로 나아간다는 결과가 된다. 물론 이것은 외형상 신분적인 향촌규제에 따른 것으로 불응자에 대해서는 군율에 따라 처단하였다. 일제는 의병의 이같은 향촌기반을 파괴하기 위해 헌병보조원제를 채택하여 분열정책을 썼다고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의병의 향촌조직과 민병조직을 재건하여 군정부를 수립하려던 운동이 곧 大韓獨立義軍府였다. 일제의 무단통치에 대항하여 지하 의병왕국을 건설하려던 이 계획은 돈헌 임병찬에 의해 계획, 실천되었다. 이 운동은 1912년 9월 고종의 밀칙을 받아 전라도순무총장으로 임명받음으로써 시작되었다. 그의 조직과 방략은<管見>·<定等>에 잘 요약되어 있다.1255)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의병의 편제와 향촌조직의 결합은 전통적인 향군체제에 기반을 두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의병은 강력한 항쟁력과 끈질긴 지구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본다. 또한 의병의 이같은 조직원리는 1910년 이후의 간도의병으로 계승되었으며 독립군 또한 이를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따라서 대한독립의군부에서 볼 수 있는 군정부체제는 그대로 독립군 계열단체에 계승되면서 단지 그 정치이념을 바꾸어 나간 데 지나지 않다고 보는 것이 의병에서 독립군으로의 이행과정이라 할 수 있다.
<朴成壽>
1248) | 이 자료는 필자가 운강의 증손 李麟揆로부터 제공받은 것으로서 말미에 운강의 자필서명이 붙은 귀중한 의병의 留陣, 行進, 號令法指針書(모필수사본)이다. 그러나 乙未, 丁未 어느 시기에 작성된 것인지 분명치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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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9) | 車文燮,≪朝鮮時代軍制硏究≫(檀國大出版部, 1973). 許道善,<鎭管體制復舊論硏究>(≪國民大論文集≫, 1974). 鄭景鉉, 앞의 글 참조. |
1250) | 朴周大,≪羅嚴隨錄≫(國史編纂委員會, 1980), 66∼74쪽. |
1251) | 朴成壽, 앞의 책. |
1252) | 李冑承은 1895년 을미의병 때 아우 李肇承을 유인석 의군의 종사로 보내고 자신은 이강년 부대의 좌종사로 군자금을 갹출한 인물이다(≪雲崗倡義錄≫將任錄 참조). 그리고 후손의 증언에 따르면 1910년 이후에도 계속 간도로 자금을 송금한 것으로 되어 있다. 본<義助>는 1902년의 것이므로 의병전쟁과 직접 관계가 없다. 그러나 이것을 통해 의병 군자금 모금방법이 어떤 것이었는지 유추할 수 있다고 본다. |
1253) | 이 의병 명단 속에는 유인석·이강년 등 유명인이 포함되어 있고 각각 5냥과 1냥을 내고 있다. |
1254) | 內譯하면 幼學이 24명, 主事 5명, 進士 3명, (前)郡守 2명이며, 同知 郞廳 參奉 中軍 都正 閑良 宣傳이 각 1명 씩이다. |
1255) | 林炳瓚,≪義兵抗爭日記≫(韓國人文科學院, 1986). 申圭秀,<大韓獨立義軍府에 대하여>(≪邊太燮博士華甲記念 史學論叢≫, 三英社, 1985). 李康五,<한말전북지역의 의병활동>(≪전북지역독립운동사≫, 광복회 전라북도지부, 198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