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근대43권 국권회복운동Ⅳ. 항일의병전쟁3. 정미의병3) 이강년의 의병활동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1. 한반도 중립화 운동
          • 1) 한반도 중립화론의 대두
            • (1) 임오군란 후 일본에서의 한반도 중립화론
            • (2) 거문도사건 전후기의 한반도 중립화론
            • (3) 청일전쟁 전후기의 한반도 중립화론
          • 2) 대한제국의 영세중립화 시도
          • 3) 러·일 개전기 대한제국의 전시국외중립 선언
            • (1) 전시국외중립 외교
            • (2) 전시국외중립 선언
        • 2. 보호국화 저지 외교
          • 1) 한국의 일본보호국화 과정
          • 2) 정부 주도의 보호국화 저지 외교
            • (1) 반침략 자주 외교의 전개
            • (2) 을사조약 무효화 외교
          • 3) 민간인의 보호국화 저지 외교
            • (1) 대영·대미 보호국화 저지 외교
            • (2) 대일 보호국화 저지 외교
        • 3. 특사의 헤이그 평화회의 파견
          • 1)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
          • 2) 고종의 3특사
          • 3) 특사의 장외 언론활동
          • 4) 특사 파견의 파문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1. 유생의 상소 투쟁
          • 1) 을사조약 체결 이전의 상소운동
          • 2) 을사조약 반대 상소운동
        • 2. 시민의 투쟁
          • 1) 지방세제의 시행과 시장세 징수
          • 2) 순천·용천 양시의 시장세 반대운동
          • 3) 시장세 반대운동의 전국적 확산
        • 3. 황무지개척권 반대운동
          • 1) 황무지개척권 요구의 배경
          • 2) 황무지개척권의 요구
          • 3) 한국민의 반대운동
            • (1) 언론·상소 투쟁
            • (2) 농광회사의 설립
            • (3) 보안회의 투쟁
          • 4) 황무지개척권 요구의 철회
        • 4. 국채보상운동
          • 1) 국채보상운동의 발단
            • (1) 일본의 차관공세
            • (2) 국채보상운동의 발단
          • 2) 국채보상운동의 전개
            • (1) 국채보상운동의 확산
            • (2) 여성의 국채보상운동 참여
          • 3) 국채보상운동의 좌절
        • 5. 의사·열사의 항쟁
          • 1) 장인환·전명운의 스티븐스 사살
            • (1) 스티븐스의 친일 외교활동
            • (2) 장인환·전명운의 스티븐스 사살
            • (3) 장인환·전명운 의거의 영향과 의의
          • 2)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
            • (1) 이토 히로부미 사살 배경
            • (2) 이토 히로부미의 사살과 그 역사적 의의
          • 3) 이재명의 이완용 척살 미수
      • Ⅲ. 애국계몽운동
        • 1. 애국계몽단체
          • 1) 초기의 계몽단체들
            • (1) 보안회
            • (2) 공진회
            • (3) 국민교육회
            • (4) 헌정연구회
          • 2) 대한자강회
            • (1) 대한자강회의 설립과 조직
            • (2) 대한자강회의 계몽사상
            • (3) 대한자강회의 자강독립운동
          • 3) 신민회
            • (1) 신민회의 창건과 목적
            • (2) 신민회의 국권회복운동
          • 4) 대한협회, 기타 학회들
            • (1) 대한협회
            • (2) 계몽학회들
          • 5) 애국계몽단체 활동의 역사적 의의와 그 한계
        • 2. 애국계몽사상
          • 1) 애국계몽사상의 개념과 형성
            • (1) 애국계몽사상의 개념
            • (2) 애국계몽사상의 형성
          • 2) 국권회복의 논리
            • (1) 자강독립론
            • (2) 실력양성론과 독립전쟁론
          • 3) 국민국가건설의 논리
            • (1) 국민국가론
            • (2) 입헌군주정체론과 공화정체론
        • 3. 애국계몽운동의 전개
          • 1) 민중계몽운동
            • (1) 신문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
            • (2) 회지·잡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
            • (3) 강연회·토론회를 통한 민중계몽운동
          • 2) 교육구국운동
            • (1) 근대학교 설립운동
            • (2) 교과서 편찬운동
            • (3) 의무교육 실시운동
            • (4) 실업·상무교육 실시운동
          • 3) 경제구국운동
            • (1) 황무지개간권 반대운동
            • (2) 국채보상운동
            • (3) 부동산침탈 반대운동
            • (4) 민족경제 건설운동
          • 4) 정치구국운동
            • (1) 을사조약 반대운동
            • (2) 고종양위 반대운동
            • (3) 한일합방 반대운동
          • 5) 민족문화운동
            • (1) 국어국문 진흥운동
            • (2) 국사교육 강화운동
            • (3) 민족적 종교운동
          • 6) 독립군기지 건설운동
            • (1) 독립전쟁론의 대두
            • (2) 독립군기지 건설준비
            • (3) 독립운동기지의 건설
        • 4. 105인사건
          • 1) 사건조작 배경
          • 2) 사건조작 경위와 사건 개요
          • 3) 재판 경위와 사건의 허구성
          • 4) 사건 연루자의 수난과 사회경제적 성향
      • Ⅳ. 항일의병전쟁
        • 1. 갑오·을미의병
          • 1) 갑오·을미의병의 배경
          • 2) 갑오의병의 전개
          • 3) 을미의병의 전개
            • (1) 을미사변과 을미의병의 개시
            • (2) 단발령 공포와 을미의병의 확대
          • 4) 갑오·을미의병의 사회적 기반과 성격
        • 2. 을사의병
          • 1) 을사의병의 재기
          • 2) 전국 의병의 활동
            • (1) 경기·강원도
            • (2) 영남지방
            • (3) 호서지방
            • (4) 호남지방
            • (5) 양서지방
          • 3) 을사의병의 의의
        • 3. 정미의병
          • 1) 군대해산
            • (1) 정미7조약
            • (2) 서울 시위대의 해산
            • (3) 남대문 전투
            • (4) 지방진위대의 항전
          • 2) 중부지역의 의병전황
            • (1) 중부지역의 의병전환
            • (2) 남부·북부지역으로의 확전
            • (3) 의병장들의 의병활동
          • 3) 이강년의 의병활동
            • (1) 이강년의 활동
            • (2) 무기와 전술
            • (3) 의병의 조직과 군율
        • 4. 의병전쟁의 발전
          • 1) 서울진공작전의 실패와 근거지문제
            • (1) 13도 의병부대의 서울진공작전
            • (2) 유인석의 지구전론과 근거지 문제
            • (3) 근거지 구상에 나타난 유인석 사상
            • (4) 서울 진공 실패 후의 분산활동
          • 2) 의병전쟁의 새로운 앙양과 평민 의병장들
            • (1) 스티븐스의 저격과 의병전쟁
            • (2) 평민 의병장들의 활동
            • (3) 한국합방안의 결정과 이토 히로부미의 저격
          • 3) 호남지방의 의병전쟁과 남한대토벌작전
            • (1) 호남지방의 의병전쟁
            • (2) 일본군의 남한대토벌작전
          • 4) 합방 전후의 의병활동
          • 5) 독립군 운동을 위한 근거지 창설
            • (1) 동만·남만의 한인사회
            • (2) 신민회의 근거지 창설
        • 5. 의병전쟁의 특징과 의의
          • 1) ‘전쟁’이라 하는 이유
          • 2) 의병전쟁사의 시기구분 문제
          • 3) 이념상의 특징
          • 4) 조직상의 특징
          • 5) 활동상의 특징
          • 6) 의병전쟁의 의의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3) 이강년의 의병활동

(1) 이강년의 활동

李康秊(1858∼1908)은 철종 9년(1858) 경북 문경군 가은면 도태리에서 이기태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樂仁 호는 雲崗이며 전주가 본관이다. 어머니 남씨가 태양을 삼키는 꿈을 꾸었다 하여 아명을 出陽이라 불렀다고 한다. 성장하면서 8척 2촌의 장신에다 勇力이 출중하였고 兵書에 조예가 깊어 일찍부터 장군감으로 지목되었다.

그는 1880년 23세라는 젊은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여 折衝將軍行龍驤衛副司果의 선전관이 되었으나,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리자, 1896년 1월 11일 가산을 정리하여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켜 안동관찰사 金錫中과 수검 李浩允·金仁覃을 체포하여 農巖 장터에서 효수하였다. 이어 제천으로 유인석을 찾아가 그의 師門이 되었으며 유인석 의병진의 유격장으로서 문경·평천·조령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이 해 4월에 張基濂이 거느린 관군과 제천에서 싸워 패한 다음, 유인석이 요동으로 망명하자 그는 의병을 해산하고 은식하였다. 그러나 1897년 5월 유인석을 찾아 요동으로 갔다. 그러나 그 해 7월 다시 귀국하여 단양 금채동에 우거하였다.

단양 금채동으로 돌아온 후 10년간 의암 유인석의 문인으로서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화서 이항로의 문집을 간행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화서 이항로의 문장목판은 지금도 제천에 고히 소장되어 있다. 이 목판은 불교의 팔만대장경에 필적하는 유학경전으로 널리 알려질 필요가 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이강년은 또다시 거의할 것을 결심하여 1907년 4월에 을미 때의 옛 동지 安成海와 함께 제천에서 궐기하였다. 그 뒤 1908년 7월 충북 청풍의 까치성 전투에서 체포될 때까지 1년 3개월간 단양·제천·원주·연풍·영월·횡성·강릉·청풍·충주·문경·예천·영주·봉화·안동 등 경북·강원·충북 일대를 돌며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일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여 의병항쟁사에서 지울 수 없는 전적을 남겼다. 그의 엄청난 전투 경력은 申議官의<창의가>에 자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가장 자상한 기록으로는 이강년의≪雲崗倡義日錄≫이 있다. 이 일록에 적혀 있는 주요 전투상황을 열거하면 아래와 같다. 가장 큰 전투는 1907년 8월 3일의 갈평전투였는데 지금 그곳에 기념비가 서 있다.

날짜(음) 격 전 지 의병측 일군측 비 고
1907 7. 7 提川

풍기 道村
   

500여

13

일진회원 등 2명을 처단
7. 30 문경 主屹樓         일군을 공격
8. 2 문경 毛項嶺         좌우 선봉이 일군을 공격
8. 3 문경 葛坪         대승하여 屍滿山野라 할 정도였다
8. 4 문경 갈평   3      
8. 6 문경 大成寺     8    
8. 8 문경 赤城   수명 36   후군장 申泰元 전패
8. 18 단양 楡峙          
8. 27 영월         전황 불리
8. 29 영월 德浦 獨山          
9. 3 병두     순검1    
9. 6 延豊     4    
9. 16 제천 杻峙         일군 200여 명을 사로잡는 대승
9. 27 竹嶺   1 30    
10. 1 죽령         일군 200여 명을 사로잡는 대승
10. 2 鷹岩          
10. 5 단양 故里坪   수십명     일군 80여 명을 사로잡다
10. 6 小白山頂         전황 불리
10. 10 順興         순흥의 일군을 습격
10. 21 愈峙         패전
10. 23 풍기 栢子洞 3       일군 100여 명을 사로잡다
10. 25 避禍里         패전
11. 12 復上洞 7 10     대패
10. 21 錢洞 月桂峯     3 3  
12. 3 낭천 看尺里   2 4    
12. 5 경기도 乾川     3    
1908 2. 17 경기도 龍沼洞         일군 100여 명을 사로잡다
2. 20 경기도 待淸里          
2. 26 경기도 葛基洞         일군을 유인한 뒤 격파
3. 12 인제 百潭寺 수십명   수백명    
3. 30 강릉 수명       전황 불리
4. 1 下寺洞          
4. 3 홍천 북면          
4. 4 襄陽城         斬獲甚衆
  안동 西壁         일군 수백여 명을 사로잡다
4. 6 봉화 乃城          
4. 8 안동 才山 10여명 8      
5. 23 제천 五美里     민간인2   일군을 유인한 뒤 격파
6. 4 청풍 까치성 7       이강년 피체

<표 3>운강 이강년의 항일전력

따라서 이강년은 1907년 8월 1일의 군대 해산 이전에 의병을 일으켰다. 군대 해산이 단행되자 민긍호의 원주 진위대가 봉기하였고 이강년이 그들과 연합했다. 그리하여 이강년과 민긍호는 강원도·충청도·경상북도 일대에 걸쳐 용맹을 떨치던 양대 의병장으로 일제 군경들이 크게 두려워하던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

이강년은 무과 출신으로 구식군대의 맹장이었고, 민긍호는 신신군대의 대표적인 의병장이었으니 신구 한국군의 조화로운 연합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강년이 재기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광무황제는 전판서 沈相薰을 은밀히 이강년에게 보내어 都體察使를 제수하면서 다음과 같은 密詔를 내려 독려하였다.

아, 나의 죄가 크고 악이 충만하여 황천이 돌보지 않으시니, 이로 말미암아 강한 이웃이 틈을 엿보고 역신이 권세를 농락하여 4천년 종묘사직과 3천리 강토가 하루 아침에 오랑캐의 수중으로 넘어갔도다. 생각하면 실날같은 나의 목숨이야 아까울 것이 없으나 종묘사직과 만백성을 생각하니, 이것이 애통하도다. 여기에 선전관 이강년으로 都體察使를 삼아 七路에 勸送하니, 良家의 才子로 각기 의병을 일으키게 하고 召募將에 임명하여 印符를 새겨서 쓰도록 하라. 만일 명을 쫓지 않는 자가 있으면 관찰사와 수령들을 먼저 베어 罷出하고 처분하여 강토를 보전하고 사직을 수호함에 목숨을 다하여라. 조서를 비밀히 내리는 것이니 그리 알고 모든 일을 거행하라(獨立運動史編纂委員會 編,≪獨立運動史資料集≫1, 223쪽).

이강년 부대는 민긍호 부대와 연합하여 충청북도 관찰부 소재지인 충주 공략에 나섰다. 이강년은 제천-청풍-충주로, 민긍호는 제천-주포-충주로 길을 나누어 충주를 향해 진군하였다. 이강년은 8월 23일 충주에 먼저 도착, 功城 준비에 들어갔는데, 민긍호는 도중에 박달재에서 일군과 조우, 격전을 벌이는 바람에 충주 도착이 늦었다. 이에 이강년은 단독으로 충주공략전을 벌였으나, 일군 2개 소대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강년은 단양을 거쳐 죽령을 넘어 경북 풍기·문경 지역으로 이동해 갔다. 이곳에서 그는 여주의 金賢圭 의병부대와 합류한 뒤, 조령과 문경 서쪽의 梨花嶺에 병력을 배치,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처럼 경상·충청 양도의 관문인 문경이 의병의 수중에 들어가자, 일군은 이 일대에 대한 의병 ‘토벌작전’을 벌였다. 이강년 의병부대는 일군과의 전면전을 피하기 위해 문경 동북쪽의 葛平으로 이동하였는데 일군이 그곳까지 추격해오자, 이강년은 우선봉 白南圭, 좌선봉 河漢瑞, 우군선봉 權用佾, 도총독장 李萬源 등을 출동시켜 적을 격파한 다음 단양 방면으로 북상하였다. 일군의 추격이 계속되자, 이강년 부대는 다시 영춘으로 이동, 그곳의 李明相 부대와 청풍의 趙東敎 부대를 합병하였고, 소모장 元建常이 삼척지방의 의병들을 거느리고 합류해와 의진이 크게 강화되었다.

9월 25일 이강년 부대는 赤城을 거쳐 영춘에서 일군과 교전을 벌인 뒤 다시 영월로 북상하였다. 그 곳에서 10월 6일 일군과 또 격전을 벌이고 다시 영춘으로 남하하여 남한강을 건너 제천 宋寒으로 진출하였다.

10월 21일 일제가 보낸 강원도 선유사 洪祐哲 일행이 원주에서 酒川 방향으로 간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백남규·권용일이 이끄는 의병을 上杻峙에 매복시켜, 일군의 호위를 받으며 가는 선유사 일행을 기습하여 일대 타격을 가하였다. 홍우철은 간신히 원주로 되돌아 갔다. 이강년 부대는 그 뒤 단양을 지나 죽령으로 남하하였다.

의병이 교통요로인 죽령에 출현하게 되자, 일군은 병력을 죽령 방면으로 집중시켜 의병을 제압하려 하였다. 이에 11월 10일 죽령에서 일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인 이강년 부대는 소백산을 거쳐 재차 영춘-의풍-고치령을 지나 순흥 공략에 나섰다. 여기에는 울진 일대에서 용맹을 떨치던 申乭石 의병진도 동참하였다. 두 부대는 순흥의 일군분견소, 경찰서 등을 파괴한 다음에 이강년은 義豊으로, 신돌석은 西壁으로 각기 이동하였다.

의풍으로 이동한 이강년은 군인 출신 邊鶴基를 우군장으로 임명하는 등 전열을 가다듬는 뒤 영춘으로 남하해 갔다. 그러나 11월 26일 영춘 동쪽에서 일군과 조우하여 격전을 벌이게 되었는데 從事 朱範淳·鄭傔童이 전사하는 등 큰 손실을 입었다. 이에 이강년은 일군과의 조우를 피하면서 죽령으로 남하, 그 일대를 전전하면서 도총독장 이만원, 소모장 이중봉, 선봉장 권용일 등과 함께 흩어진 병력을 모아 전열을 수습해 나갔다.

그 뒤 이강년은 12월에 경기 지역을 향해 북상길에 올랐다. 단양을 지나 제천으로 향하던 중 이강년이 병을 얻어 12월 16일 전군이 임현 부근에서 잠시 유진하게 되었는데, 이 때 기습공격을 가해와 참모 元荷汀·申橚·申明熙, 소모장 李重鳳 등 10여 명이 포로로 잡히는 등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부근의 旁杜寺에서 잠시 요양하던 이강년은 그 비보를 듣고, “내가 거의한 지 12년에 이와 같은 참패를 당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고 탄식하였다.

이강년은 이 때 이인영으로부터 13도창의군의 서울 탈환작전에 참가해 달라는 서신을 받고 서울을 향해 북상하기로 했다. 이강년은 태백산맥을 따라 강원도 홍천·화천을 거쳐 1908년 1월 8일 마침내 경기도 지역에 당도하였으나 목적지인 서울은 멀기만 하였다. 요소요소에 일본군이 깔려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이를 뚫고 나가기에는 힘이 벅찼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강년은 4월 초순에 하는 수 없이 강원도로 퇴각하고 말았다. 즉 화천 간척리, 인제를 거쳐 4월 10일에 설악산 백담사에 도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안 일본군 500명은 4월 13일 백담사를 공격해 왔고 이강년은 보기좋게 적을 무찔렀다. 백담사전투는 이강년 부대가 거둔 대첩중 하나로 꼽힌다. 이어 이강년 부대는 설악산 신흥사를 거쳐 영월로 남하하였다. 이 때 마침 백남규·권용일 양인이 그 동안 모집한 4천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본진에 합류해와 의병들의 사기가 한층 고무되었다.

이강년은 새로운 활동 근거지를 확보하기 위해 재차 안동 서벽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영주수비대 소속 일군이 서벽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선봉장 백남규·권용일과 우군장 변학기 등으로 하여금 길목을 지키게 하고 成益賢의 삼척의병이 이들을 지원토록 하여 일본군을 포위 섬멸시켰다. 그는 승세를 몰아 서벽 남쪽의 乃城으로 진격, 그 곳에 주둔하고 있던 일군과 치열한 격전을 벌인 끝에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자 禮安수비대 소속 일군이 의병을 추격하여 다가왔다. 일군은 위장전술을 펴 ‘義兵大陣’이라 쓴 깃발을 앞세우고 다가왔다. 이강년 의병은 이들을 맞아 집중사격을 가한 끝에 대승을 거두었다.

그는 이후 황지·상동·제천·평창 등지를 전전하며 일군과 혈전을 거듭하였는데 애석하게도 그 동안에 전력이 크게 소모되어 있었고, 더욱이 6월 28일에는 평창 부근의 獅子山에서 원주수비대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어 더 이상 항전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이강년은 잔여 의병을 이끌고 영월을 거쳐 청풍으로 남하하던 중 鵲城에 잠시 유진하게 되었다. 그러자 이것을 탐지한 제천수비대 일군이 이곳으로 진격해 왔다. 이강년 부대는 이들을 맞아 최후의 일전을 벌였으나, 전세가 기울어 도선봉 河漢瑞 등을 비롯한 주요 간부들은 전사하고, 이강년은 왼쪽 발목에 총탄이 적중, 행보를 옮기지 못하여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로써 태백산맥을 중심 무대로 경상·충청·강원 일대에서 용명을 날리던 이강년 의진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는데 1908년 7월 2일의 일이었다. 이강년은 이때 다음과 같이 분한 마음을 시로 읊었다.

무정하다 탄환이여

발목을 상하여 나아갈 수 없구나

차라리 심장에나 맞았으면

욕보지 않고 요경(瑤京)에 갈 것을(≪海東義士雲崗李康秊先生略史≫, 33쪽).

이강년은 적에게 잡힌 뒤에도 비굴한 행동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상처의 치료는 물론 음식도 거절하였다.

그는 충주·수원을 거쳐 7월 8일 서울 용산의 일군사령부로 압송되었고, 19일에는 다시 평리원으로 이송되어 재판을 받았다. 일군사령부에서 심문을 받을 때 그는, “보고 싶은 자는 이토 히로부미 뿐이다. 너희 무리와는 말하지 않겠다”고 크게 호령하고, 또 평리원에서는 원장 朴濟璿의 물음에 ‘더러운 자’와는 말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글로서 답하였다.

내가 거의한 것은 먼저 5적과 7적을 단죄하고 왜적을 박멸해 위로 나라의 철천지 원수를 갚고 아래로 도탄에 빠진 생민을 구하고자 함에서였다.

그 뒤 이강년은 9월 23일 사형을 선고받고 10월 13일 오전 10시에 51세를 일기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그는 죽기에 앞서 장자 承宰와 종제 康壽에게 주는 유서 그리고 전국의 의병들에게 다음과 같은 告訣文을 남겼다.

너의 아비는 평생에 血衷을 품어 나라를 위해 죽고자 하였다. 이제 뜻대로 되었으니 무슨 여한이 있으랴. 너는 놀라지 말고 정신을 차려 동생과 함께 내가 죽은 뒤 3일 안으로 薄葬토록 하라(≪大韓每日新報≫, 1908년 10월 15일,<訣長子承宰書大略>).

나는 양심이 격동함을 참을 수 없어 병신년(1896) 이래로 13년간에 두 번 義旗를 들고 일어나 30여 회전에서 賊酋 백여 명을 참수하였다. … 이 몸은 尊華攘夷의 大義에 죽는 것이니, 이제는 그 날이 되었다. 동지들에게 바라는 것은 賊勢가 성하다 하여 본래의 뜻을 어기지 마시고 더욱 큰 의리로 매진하시어 광명한 날을 기다리시라(≪雲崗倡義錄≫, 告訣八域同志, 295쪽).

한편 이강년이 피체된 뒤 중군장 金尙台가 유지를 받들어 백남규 등과 더불어 영호남 각지를 전전하며 항전을 계속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