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상업적 농업의 재편과 지주제의 성장
1) 한말 지주적 토지소유의 강화와 상업적 농업의 재편
(1) 한말의 양전·지계사업과 역둔토 정리사업
가. 광무정권의 양전·지계사업
전라도를 중심으로 충청·경상·강원·황해도에 걸쳐 1년여 동안에 치열하게 전개된 1894년의 농민전쟁은 두 가지 목표를 내걸었다. 하나는 부패한 봉건사회를 개혁하여 도탄에 빠진 농민을 해방시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 전쟁을 빌미로 군대를 앞세워 한국을 침략한 일본 제국주의를 몰아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1894년의 농민전쟁은 일본 군대와 그에 의해 자행된 경복궁 쿠데타로 출범한 갑오내각의 官軍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다.
농민전쟁을 진압한 갑오내각은 개화파의 오랜 구상이었던 지주제를 기반으로 하는 근대화정책들을 입안하고 실행하였다. 그것은 지주경영의 합리화 내지 근대화와 지주자본의 산업자본으로의 전환을 유도하는 재정·금융정책을 실시하여 위로부터 조속히 근대화를 추진하는 것이었다.
갑오내각의 이러한 구상은 量田事業으로 구체화되었다. 1894년 갑오내각의 핵심세력이었던 金弘集·朴泳孝·魚允中 등은 전국적인 토지조사와 그에 근거한 地契의 발행을 주내용으로 하는 양전사업을 국왕에게 청하였다. 이 사업은 두 가지 목표를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농민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부세제도의 모순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 말기에 각종의 부세는 점차 토지로 수렴되는 結斂化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오랜 기간 동안 양전이 실시되지 않아 전정이 문란하였으므로 부세의 결렴화는 심각한 사회경제적 모순을 유발하였다. 1894년의 농민전쟁이 폭발하게 되는 직접적 계기도 여기에 있었다. 그러므로 19세기에 변통을 요구한 개혁론자들은 한결같이 양전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던 바, 갑오내각이 이를 수용해 당면한 사회적 위기를 진정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농민전쟁에서 크게 위협받았던 지주적 토지소유를 차제에 근대적 소유권으로 법인함으로써 지주제 발전에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양전사업은 농민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894년에 발의되었다. 당시 농민군들은 지주나 부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개혁강령으로 토지의 ‘平均分作’을 요구하는 등 지주적 토지소유를 위협하고 있었다.489) 갑오내각은 이를 제압하고 위로부터 근대화정책을 추진하는 데 필수적인 지주적 토지소유를 확고히 할 필요를 느꼈던 것이며, 이에 양전사업을 서둘러 입안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업은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갑오내각이 당초 계획과는 달리 1895년에도 농민군 잔여세력을 진압하느라 이 사업에 착수하지 못했고, 그러던 차에 乙未事變이 발생하고 반일의병운동이 일어나 개화파 정권 자체가 붕괴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후 양전·지계사업이 다시 추진되는 것은 아관파천을 거쳐 출범한 광무정권에 이르러서였다. 광무정권은 ‘舊本新參’을 표방하고 개혁정책을 추진하였다. 갑오내각이 외세에 의존해 모방적으로 근대개혁을 달성하려다 실패한 것을 교훈삼아 舊法과 舊制를 무리하게 폐기하여 폐단을 일으키기 보다 조선의 현실을 숙고하여 구법을 중심으로 新法을 참작하는 신·구법 절충의 개혁을 모색한 것이다. 광무년간의 양전·지계사업도 이러한 원칙에 입각해 마련되었다. 즉 종전의 結負法과 田品六等制에 따라 양전을 실시하되 근대적인 서양의 측량기술을 도입함으로써 양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폐단을 최소화한다는 것이었다.490)
광무 양전사업은 量地衙門이 담당하였다. 양지아문은 1899년 여름부터 본격적인 토지측량에 들어갔다. 양전은 전국의 토지를 대상으로 순차적으로 진행되었는데 1901년의 흉년으로 그 해 12월부터 잠시 중단되었다. 양전이 궤도에 오르자 광무정권은 1901년 11월에 地契衙門을 설치하고 지계 발행에 착수하였다. 토지소유권 증서라 할 지계는 田畓·山林·家垈 등 전국의 모든 토지를 대상으로 발급되었지만 내국인 토지소유자에게만 발급되었다. 지계의 발급과 양전사업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1902년 3월 양지아문은 지계아문에 통합되었고, 이후 1904년 4월까지 지계아문이 양전과 지계 발급을 담당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광무년간에 양전이 시행된 곳은 전국의 3분의 2에 달하는 총 218郡이었다.491)
광무양전의 목적은 갑오내각의 그것과 다소 차이가 있었다. 양전을 통해 부세제도의 모순을 개혁하는 것에 더해 稅源 확대에 주력한 것과, 지계 발급을 통해 외국인의 토지 潛買나 盜買를 철저히 금지하고자 한 것이 그것이었다.492) 그렇지만 지주를 토지소유권자로 법인하고자 한 점에서는 양자가 공통되었다. 양지아문의 양안에서는 지주와 소작인을 時主와 時作으로 기재하면서 소유권을 시주에게만 인정하였다. 이러한 원칙은 지계아문의 지계 발급에 이르면 보다 분명하게 되었다. 지계아문은 양안에 時主名 즉 지주의 이름만 기재하였고, 소유권증서라 할 지계를 지주에게만 발급하였다. 말하자면 광무정권의 양전사업은 결국 대한제국정부가 지주적 입장에서 근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시도한 토지조사사업이었던 것이고 기본적으로 개화파 정권의 위로부터 근대화 노선을 계승하는 것이었다.493)
한말 봉건적 토지소유의 치폐를 둘러싸고 지배층과 농민층은 수많은 민란과 대규모의 전국적인 농민전쟁을 치르면서 첨예하게 격돌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단행된 광무정권의 양전·지계사업은 지주층의 토지소유를 근대적 소유권으로 법인하고 국가권력이 이를 보증함으로써 지주제가 강화될 수 있는 중요한 기초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489) | 愼鏞廈,<甲午農民戰爭과 두레와 執綱所의 폐정개혁>(≪한국사회사연구회논문집≫8, 문학과지성사, 1987). 金容燮,<朝鮮王朝 最末期의 農民運動과 그 指向>(≪韓國近現代農業史硏究≫, 一潮閣, 19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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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0) | 金容燮,<光武年間의 量田地契事業>(≪亞細亞硏究≫31, 1968). |
491) | 왕현종,<대한제국기 양전·지계사업의 추진과정과 성격>(≪대한제국의 토지조사사업≫, 민음사, 1995). |
492) | 이영호,<광무양안의 성격과 기능>(≪대한제국의 토지조사사업≫, 민음사, 1995) |
493) | 金容燮, 앞의 글. 崔元奎,<대한제국기 양전과 관계발급사업>(≪대한제국의 토지조사사업≫, 민음사, 199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