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일제의 농업식민책과 토지법제의 개정
일본은 무역과 상품유통상의 제약을 제거함으로써 조선을 자국 공산품의 독점적 상품시장이자 농산물 공급지로 지배하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일본은 명치유신 이후 지주제를 기반으로 산업혁명을 이룩하고 자본주의를 성립시켜왔기 때문에 국내적으로는 소작지·소작농을 기초로 한 과소 영세농경영의 확대 및 노동쟁의, 사회주의운동의 발생 등 사회모순이 크게 드러나고 있었다. 일본은 이를 군국주의적 침략과 식민지 개발을 통해 해소하려 하였다. 따라서 일본은 조선을 상품시장으로 지배하는 데서 더 나아가 일본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소하고 보완할 식민지로 재편하고자 하였다.
일본의 그러한 의도는 먼저 조선의 농업을 전면적으로 재편하는 농업식민책으로 나타났다. 이를 위해 일본은 1900년부터 다년간 조선의 농업에 대해 주도면밀한 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조사는 기후·土性·수리·농구 및 주요 작물 재배법에서 지가, 토지매매의 관습, 지주소작제, 교통운수 등에 이르는 광범한 것이었고, 그 결과는≪韓國土地農産調査報告≫·≪朝鮮農業槪說≫·≪韓國殖民策≫·≪朝鮮農業移民論≫등으로 간행되었다.
일본은 이러한 조사에 근거해 조선의 농업을 자국의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는 식민지 농업으로 재편하는 방도로 자국의 지주·자본가 계급이 중심이 되어 한국농민을 소작농민으로 지배하는 농업식민책을 수립하였다. 일본 자본주의의 농업문제를 식민지 지주제로 해결하는 식민정책이었다.501)
일본은 러일전쟁으로 조선을 독점적으로 지배할 수 있게 되자 이러한 농업식민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일본의 지주·자본가 계급이 조선에서 자유롭게 농지를 소유할 수 있게 하는 법적 조치가 필요하였다. 그러나 당시 대한제국정부는 외국인의 토지소유를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었다. 이에 일본은 광무정권의 지계발급사업을 강압적으로 중단시켰다.
그러나 이후에도 한국정부는 외국인의 토지소유를 허락하지 않았으며, 중단된 양전을 다시 계획하는 한편, 한국의 전체 토지를 관리할<不動産所關法>의 제정을 준비하였다.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인의 토지 잠매가 급증하자 일본은 이를 합법화하기 위해 한국정부를 압박하였다. 이에 일본인 토지소유의 합법화를 반대하는 국민적 여론이 비등하게 되고, 여기에 힘을 얻어 한국정부는 1907년 6월<不動産所關法>을 입안하였다. 이 법은 외국인의 부동산 소유를 금지한다는 대전제하에 紙券 발행, 등기제도의 시행, 경작권을 포함한 賃租權登記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였다. 이후 몇 차례의 심의를 거쳐 이 법은 동년 10월 16일 법률 제 6호<土地建物의 賣買 交換 讓與 典當에 관한 法律>로 공포되었다.
한국정부의 이러한 대응은 일본이 추진하는 농업식민책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러자 일본은 이 법률을 사문화시킬 뿐만 아니라 외국인에게도 한국인과 동등하게 부동산을 소유할 수 있게 하는 법적 조치를 한국정부에 강요하였다. 1906년 10월 26일에 공포하여 법률 제 6호<토지건물의 매매 교환 양여 전당에 관한 법률>을 대체하게 한<土地家屋證明規則>이 그것이다.502)
일본의 강요로 제정된<토지가옥증명규칙>은 민간에서 관행되던 토지 거래에 관청의 증명을 덧붙여 盜賣·偸賣 등을 방지하여 토지거래의 안정성을 높이는 것이었는데 외국인에게도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토지, 가옥 등의 부동산을 소유할 수 있게 인정하였다.503) 일단 이 규칙의 제정으로 일본인의 토지소유를 합법화한 일본은 곧이어 이 규칙 공포 이전에 거래가 이루어졌던 다량의 일본인 소유 潛賣 토지에 대해서도 소유권을 합법화하는 조치를 한국정부에 강요하였다. 1908년에 제정되는<土地家屋所有權證明規則>이 그것이었다. 이 규칙은<토지가옥증명규칙> 시행 이전에 잠매되었던 외국인 소유 부동산에 대해서도 정부가 公簿로 소유권 보존증명을 발급하도록 규정하였다.504)
또한 일본은 농업식민책을 추진하기 위해<國有未墾地利用法>의 제정을 강요하였다. 1907년에 공포된 이 법령은 민유지가 아닌 原野·황무지·간석지 등을 개인에게 10년 이하의 기간을 정해 대부할 수 있게 하고, 대부한 토지를 개간할 경우 이 토지를 불하하거나 분여할 수 있게 하였다. 농업조사에서 농지로 전용이 가능한 막대한 미간지가 존재함을 확인한 일본은 이를 개간해 거대 규모의 농장을 개설할 수 있도록 이 법의 제정을 강요하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토지법의 개정은 결국 일본이 의도한 바대로 조선에서 일본인의 토지소유를 확대시키고 식민지 지주제의 발전을 촉진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일본은 이러한 농업식민책을 추진함에 있어 일본인 지주의 육성에 더해 조선인 지주들도 적극적으로 포섭하고자 하였다. 농업식민책은 일본의 과잉자본 또는 농촌의 과잉인구를 해소하는 수단도 되었지만 보다 중요하게는 일본의 농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선의 농업을 전면적으로 재편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조선 농업의 전면적 재편은 조선으로 진출한 일본인 대지주들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들이 중핵이 되어야 하지만 조선인 지주들이 적극적으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의 농업식민책은 일본인 대지주를 우선하는 것이었지만 조선에서 지주제 전반을 보호 육성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일본의 식민지 지주제 육성책은 대한제국의 지주보호정책보다 훨씬 강력하였다. 대한제국은 정치적으로 매우 취약하였다. 정부는 지주제를 강화하는 정책에 저항하는 농민들을 제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군대를 앞세워 한국을 식민지로 강점해 갔던 일본은 강압적인 방식으로 농업식민책을 추진하였다. 일본은 한국농민들의 저항을 군대로 제압해 갔다. 그로 인해 일본의 농업식민책은 지주제 발전의 보다 강력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501) | 金容燮,<日帝의 初期 農業殖民策과 地主制>(≪韓國近現代農業史硏究≫, 一潮閣, 19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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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2) | 崔元奎,≪韓末 日帝初期 土地調査와 土地法 硏究≫(연세대 박사학위논문, 1994). |
503) | ≪舊韓國官報≫, 제3598호, 1906년 10월 31일,<勅令 제65호:土地家屋證明規則>. 제8조 당사자의 一方이 외국인으로 本則을 依야 증명을 受 경우에 日本理事官의 査證을 受되 若 査證을 受치 못면 제2조의 효력을 生치 못이라. |
504) | ≪舊韓國官報≫, 제4130호, 隆熙 2년 7월 20일,<勅令 제47호:土地家屋所有權證明規則>. 제1조 토지 又 가옥의 소유자가 左記各號의 一에 해당 자(土地家屋證明規則施行前에 토지 又 가옥의 소유권을 취득 자) 그 소유권의 증명을 군수 又 부윤에게 신청을 得홈. 제3조 외국인이 제1조의 증명을 受코져 자 此 日本理事官에 신청이 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