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국외 이민
(1) 만주·노령지역
가. 이주 동기
조선말 조선인이 오늘날 중국 동북 三省인 만주·노령으로 이주하게 된 동기는 조선내의 상황 변화와 만주·노령지역의 유인 요소 그리고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 등을 들 수 있다. 우선, 조선내의 상황변화로 가장 중요한 것은 조선후기 농촌의 영농기술 개선에 따라 생산력이 증대되고 노동력이 절감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일부 농가는 경작지를 확대시킬 수 있었으나, 반면 많은 농가들은 생계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경작지마저 잃게 되어 농업 노동자가 되거나 유민이 되었다. 또한 17∼18세기에 자주 발생했던 자연재해에 따른 흉년과 전염병은 촌락사회를 붕괴시켰으며, 세도정치로 인한 정치문란과 관리들의 가혹한 민중 수탈은 다수의 농민을 빈곤화시켰다. 그 결과 크고 작은 봉기들이 전국에서 잇달아 발생하여 정치와 사회가 불안해지자 압록강 對岸의 봉금지대에는 별세계가 있어 영웅호걸이 백성을 모은다는 위서와 소문이 나돌기까지 하였다.550) 이에 많은 조선인은 생계를 위하여, 새로운 안식처를 찾아서, 심지어 헛소문에 현혹되어 국경지대인 만주·노령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조선인이 만주·노령지역으로 이주하게 된 동기가 경제적 빈곤과 사회불안이라면, 만주·노령 지역이 조선인을 유인한 요소는 역사적·자연적·지리적 조건이라 할 수 있다. 만주지역 특히 간도지방은 역사적으로나 영토적으로 고구려·발해·고려에 이르기까지 장기간 조선인이 거주하였던 지역으로 마치 고국과 같이 인식되었던 곳이었다. 만주의 비옥한 농토에서의 수확고는 함경도의 수확고에 비하여 3배나 되었다. 또한 만주의 자연조건은 무일푼인 사람이라도 농사 이외에 산삼을 캘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울창한 산림 속에 서식하는 각종 금수를 수렵할 수 있었으며, 벌목이 가능하였으므로 가난한 조선인이 이주하기에 적합하였다. 그리고 지리적으로도 만주·노령은 쉽게 渡江할 수 있는 인접지역이었다. 두만강에는 수량이 감소할 때 걸어서 건널 수 있는 곳이 10여 개소나 되었고, 겨울철 결빙을 이용하면 중국인이 노령이나 노야령산맥을 넘는 것 보다 훨씬 쉬웠다.551) 역사적·자연적·지리적 조건뿐만 아니라 변방을 강화하려는 淸朝와 1860년에<露淸北京條約>으로 연해주를 획득한 러시아정부가 조선인의 이주를 적극 장려했던 것도 조선인이 만주와 노령으로 이주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일찍이 1870년말 通化縣의 중국인은 벼를 경작할 수 있는 평북농민을 환영하였고, 1890년부터 1910년간에는 만주의 다른 지역에서도 처녀지 개간과 벼농사를 위하여 조선인의 이주를 적극 환영하였다.552) 러시아정부 역시 개척사업을 위하여 조선인의 저렴한 노동력을 이용하고자 적극 이들의 이주를 환영하였을 뿐만 아니라 귀화하면 토지를 급여하였다.553)
끝으로 일본 제국주의 영향 때문에 이주한 조선인들도 있다. 일본이 l905년 러일전쟁 승리 후 을사조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자, 의병 잔류자와 그 가족 그리고 독립운동가들이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운동기지를 설정하겠다는 목적으로 만주·노령지역으로 다수 이주하였다. 한편 일본은 1907년 간도를 조선 영토라 선언한 후 10만여 조선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감독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統監部 派出所를 설치하고 조선인을 청의 관민으로부터 보호하는 등, 적극적인 이주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1908년에는 일본이 동양척식회사를 설립하고 조선인을 수탈하자 농토를 잃게 된 농민 또한 생계를 찾아 이주하였다. 일본이 1909년 9월 4일 상품 판로와 철·석탄의 원료공급지에 대한 이권을 위하여 두만강을 한·청 양국의 국경으로 결정한 간도협약에 의하여 간도주재 조선인이 영주권·토지소유권 그리고 재산소유권을 획득할 수 있게 되자 조선인의 이주가 더욱 활발해졌다.554)
위에서 언급한 복합적 이유로 조선인의 만주·노령지역으로의 이주가 활발했는데, 1907년부터 1910년 사이 매년 약 1만 명이 간도지방으로 이주하더니 1911년에는 약 2만 명, 1912년에 약 4만 명이나 이주하였다. 노령지역에도 1897년에 26,159명이었던 조선인의 수가 1911년에는 59,577명으로 증가하였다. 1910년 만주지역에 거주한 조선인의 출신도별 순위는 함북·평북·평남·함남·황해·경남·경북·강원의 순이었다. 노령지역에도 함경북도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함경도 주민이 이주의 선두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는 두만강을 쉽게 건너 간도와 노령지역으로 이주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555)
550) | 金俊燁·金昌順,≪韓國共産主義 運動史≫I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1974), 34∼35쪽. 田川孝三,<近代北鮮農村社會と流民問題>(≪近代朝鮮史硏究≫1, 朝鮮總督府朝鮮史編修會, 1944), 607쪽. 朝鮮總督府,<國境地方視察復命書, 其三>(≪白山學報≫11,<資料>, 1971), 201∼202쪽. 盧啓鉉,≪韓國外交史硏究≫(海文社, 1968), 28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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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1) | 朴永錫,<滿洲問題에 對한 申采浩의 見解-1900年初 日本의 滿洲侵略에 관련하여>(≪軍史≫창간호,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80), 160쪽. 朝鮮總督府,<國境地方視察復命書>(≪白山學報≫9, 1970), 195쪽. 東支鐵道經濟調査局 編,≪北滿洲と東支鐵道≫上 (大阪:大阪每日新聞社, 1922), 26쪽. 玄圭煥,≪韓國流移民史≫上 (語文閣, 1967), 680쪽. |
552) | 李勳求,≪滿洲와 朝鮮≫(평양:평양숭실전문학교 경영학 연구실, 1933), 95쪽. 玄圭煥, 앞의 책, 11·16쪽. 朝鮮人組合 編,≪滿洲における移住鮮人の狀況≫(安東縣, 1916), 8쪽. |
553) | 朴永錫,<日帝下 滿洲·露領地域에서의 抗日民族獨立運動-北路軍政署 獨立軍兵士 李雨錫의 活動을 中心으로>下(≪東方學志≫35, 1983), 285쪽. 玄圭煥, 앞의 책, 830쪽. |
554) | 松村高夫,<日本帝國主義下における滿洲への朝鮮人移動について>(≪三田學會雜誌≫63-6, 1970), 72쪽. 李勳求, 앞의 책, 140·142·157쪽. 朝鮮總督府,<國境地方視察復命書>, 206쪽. |
555) | 安鍾海,≪露領內의 韓人獨立運動에 관한 一考察≫(嶺南大 大學院 碩士學位論文, 1975), 13쪽. 李求弘,≪韓國移民史≫(중앙일보사, 1979), 21쪽. 朝鮮人組合 編, 앞의 책, 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