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이주 상황
조선인의 만주지역으로의 이주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두만강 대안지방인 북간도 방면에 조선인이 밀집해 살았다. 西北經略使 魚允中은 1883년에 함경북도 시찰중 圖們江 封禁令을 해제하고 함경감사로 하여금 이 지역에 대한 地券을 발급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강력한 행정적 뒷받침의 결과, 도강 이주자가 격증하여 延吉縣과 和龍縣에 연이어 布合爾通河와 海蘭江유역에 조선인의 촌들이 형성되었다.556) 이에 1890년 청의 撫懇局은 조선인의 이주를 海蘭江이남으로 제한하고, 이들이 중국인의 소작인이나 고용인으로 채용될 경우에만 이주를 허용하는 한편, 변발 호복하고 귀화하기를 적극 강요하였다.557) 1898년에 이르면 조선인이 남부 우수리河 남부로부터 북간도 북쪽 내륙의 穆陵지방으로 이주하여 거의 3리나 되는 촌을 이루었다. 1900년 의화단 사건이 발발하였을 때 러시아군이 북간도지역으로 진군하자 이에 놀란 대부분의 중국인이 길림으로 도피하였고 이에 조선인이 북간도지역의 공백을 메우기 시작했다. 조선정부는 간도지방의 조선인을 보호하기 위하여 1902년에 李範允을 간도관찰사로 파견하였으며, 1903년에는 그를 간도관리사로 임명하였다. 이범윤은 도처에서 조선인이 청군의 박해를 받고 있음을 보고 러시아 세력을 배경으로 장정을 모집하고 포대를 편성하여 이들을 보호하였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자 러시아를 원조하였던 이범윤을 위시한 많은 조선인은 동북 노령지역으로 이주하였다.558)
다음으로 牧丹江 以西지방을 살펴보면, 이 지역은 고구려와 발해의 寧古塔과 東京城이 위치한 지역으로 조선인이 일찍부터 이주했던 역사적인 지역이었다. 봉금령이 완화되면서 이 지역으로 이주하는 조선인의 수가 증가하였고, 더욱이 벼농사가 성공하자 이주자가 일시 급증하여 1892년에 이르면 하얼빈(哈爾濱)까지 조선인이 이주하였다. 1901년부터 1903년 사이에 러시아가 東淸鐵道를 부설하던 당시 노동자로 왔던 함경도와 평안도민들이 그대로 주저앉아 노동·잡업·식당·여관업·상업 등에 종사하였다. 橫道河子지방에도 1894년경부터 조선인이 이주하기 시작하여 1930년경에는 그 부근 10리가 전부 조선인의 마을이 되었다.559)
압록강 연안의 서간도 지방으로는 17세기부터 조선인의 이주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通化縣의 上甸子와 下甸子 부근의 중국인은 1876년부터 벼농사를 경작하는 평북민을 환영하였다. 1897년 조선정부는 徐相懋를 西邊界管理使로 임명하여 압록강 일대뿐만 아니라 더 깊숙한 오지에 이주한 조선인의 권익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1903년 5월에 압록강 대안으로 파견된 西間島有志視察團의 조사에 의하면 長白에서 신의주 맞은편의 丹東에 이르는 지역에 남자 23,937명, 여자 21,656명인 약 6,357호의 조선인이 거주하였다. 특히 단동 서쪽의 각 현은 토지가 비옥하여 도처에 논을 경작하는 조선인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 곳에는 철도부설공사에 고용된 노동자와 곡물과 연초 재배에 종사하고 있던 조선인이 적지 않았다.560)
1906년경에는 주로 압록강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남만주 지역인 營口·遼陽지방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하였다. 이민수가 점차 증가하게 되자 海龍·鐵嶺·新京지방 등 만주 전지역으로 이주범위가 확대되었다. 특히 러일전쟁 중 군용으로 부설된 安奉線이 1911년에 개통된 후 더욱 많은 조선인이 편도 여행비와 일년간 지낼 수 있는 생활비만을 가지고 철도변을 따라 이주하였다.561) 일찍이 1883년에 金華龍 등 수명이 通化小彎溝로부터 瀋陽지역으로도 이주하였다. 그후 벼농사가 이 지역에서 가능하게 되자 많은 조선인들이 이주하여 1916년경에는 그 수가 이미 544호로 3,227명 이상이나 되었다. 한편 1906년 평북 벽동사람 金時禎 외 수명이 처음으로 심양현에 이주하여 개간사업에 착수한 후, 평안도와 경상도의 농민이 점차 황무지를 매입하거나, 중국인의 소작인이 되어 농업에 종사하였다. 1908년 동부 만주에 이주하였던 조선인은 벼농사에 적당하다는 新民公太堡 부근으로 많이 이주하였고, 撫順에는 1910년경에 평북 의주 출신 宋秉柱와 金萬里가 농경을 목적으로 처음 이주하였다 한다.562)
노령지역으로는 1860년대 초기부터 조선인이 가족이주 형태로 두만강 어귀의 북쪽 연해주에 위치한 뽀시에트(Posieta)·치씬허(Tizinkhie)·옌띠허(Yantikhe)로 집단 이주하였다. 1860년대 후기와 1870년대에 이르면 興凱湖를 따라 이주하여 沙蔓里와 우스리河 남부 일대인 니꼴스크(Nikol'sk)를 중심으로 한 라즈드리노에(Razhdrinoe)·베니야진(Benyazhin)·시꼬또바(Sikotova), 그리고 북방 綏芬(Syufan)강 연안의 꼰스딴띠놉스끼(Konstantinovski)·까자께비쳅까(Kazakevichevka)·뿌찔롭까(Pucilovka)·코르사꼽까(Korsakovka)·사마르가(Samarga)河와 흑룡강의 합류지점인 블라고슬로벤노에(Blagoslovennoe)와 블라디보스톡(Vladivostok)에 조선인 마을이 생겼다.563)
더욱이 1884년에 조러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어 이주가 자유롭게 되자 조선인의 이주는 급증하여 南石洞을 위시하여 많은 곳에 조선인 마을이 다투어 형성되었다. 특히 1898∼1899년에는 그로데꼬프(Grodekov) 프리아무르 군사령관이 조선인의 이주를 적극 장려하였기 때문에 하바로프스크(Khabarovsk)부근과 키(Kii)강 유역에 위치한 루끼아노프까(Luk'yanovka)·오시포드까(Osipodka)·알렉싼드로브까(Aleksandrovka) 등에 조선인 마을이 생기게 되었고 또 금광지역에도 다수의 조선인이 거주하게 되었다. 수분河·레후(Lekhu)하·다라뷔에(Daravie)하 유역에도 시넬리니코프(Sinel'nikov)·코르사꼽까·빌흐네또마노프(Vilkhnetomanov) 외에 수십 개의 마을이 건설되었다.564)
1909년의 통계는 블라디보스톡·뽀시에트·니꼴스크·니꼴라옙스크(Nikolaevsk) 일대에 각각 약 2만 명, 기타 지역에 5천여 명으로 모두 8만 5천여 명의 조선인이 이주하였음을 말해준다. 1910년 일본에게 국권을 강탈당한 이후 10년간 46,064명이나 추가로 노령으로 이주하였고, 1915년에는 연해주에만 조선인의 촌락이 40여 곳이나 되었다. 이상과 같이 노령 연해주의 대부분은 조선인에 의하여 개척되었다. 조선인이 황무지와 沼澤을 개척하여 옥토로 만들고 나면, 러시아인이 이주하였고, 조선인은 강제로 또 다시 황무지를 개척하기 위하여 오지로 이주되었다. 이리하여 뽀시에트 일대부터 우수리의 이만(Iman), 흑룡강의 연해주 및 나아가서 바이칼일대에 이르기까지 조선인촌이 건설되었다.565)
556) | 松村高夫, 앞의 글, 239∼24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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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7) | 이러한 청측의 적극적인 귀화정책에도 불구하고 수만 호의 조선족이 거주하는 茂山부터 穩城에 이르는 두만강 대안지역에서는 변발·호복한 자는 1%에 불과하였다. 柳光烈,≪間島小史≫(京城:太華書館, 1933), 34쪽. |
558) | 柳光烈, 위의 책, 34쪽. 李求弘, 앞의 책, 17쪽. |
559) | 朴春光,<在滿百萬 朝鮮人의 現況>(≪彗星≫1권 7호, 1931)(太學社,≪韓國近世史論著集-舊韓末編≫2, 影印版, 1982), 228쪽. |
560) | 朝鮮人組合 編, 앞의 책, 8쪽. 朴永錫,<日帝下 韓國人 滿洲移住에 關한 硏究-日帝下 韓國人移住政策을 中心으로>(≪省谷論叢≫10, 1979), 90쪽. |
561) | 朝鮮人組合 編, 앞의 책, 8쪽. |
562) | 朴春光, 앞의 글, 227쪽. 朝鮮人組合 編, 앞의 책, 20∼21쪽. |
563) | 朝鮮總督府內務局社會課 編,≪滿洲及西伯利亞地方に於ける朝鮮人事情≫(京城, 1923), 8쪽. Walter Kolarz, 李碩昆 역,<The People of the Soviet Far East:在소련 韓人들의 生態>(≪思想界≫3, 1958), 25쪽. 松村高夫, 앞의 글, 62쪽. 高承濟,<沿海州移民의 社會史的 分析>(≪白山學報≫11, 1971), 155쪽. 田原茂,≪滿洲와 朝鮮人≫(奉天:滿洲朝鮮人親愛義會本部, 1923), 139쪽. 金俊燁·金昌順, 앞의 책, 27∼30쪽. 田川孝三, 앞의 글, 570·571쪽 및 581쪽. 玄圭煥, 앞의 책, 188쪽. 李智澤,<시베리아의 3·1운동>(≪月刊中央≫3월호, 1971), 187쪽. 南滿洲鐵道株式會社 編,≪極東露嶺における黃色人種問題≫(大阪:每日新聞社, 1929), 103쪽. 蔡根植,≪武裝獨立運動秘史≫(대한민국공보처, 1949), 68쪽. |
564) | 임계순,<만주·노령 동포사회(1860∼1910)>(≪한민족독립운동사≫2, 국사편찬위원회, 1987), 597쪽. |
565) | 임계순, 위의 글, 597∼599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