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경아전과 향리
京衙前과 鄕吏는 함께 吏胥 또는 胥吏라고 불리우는데, 각각 중앙정부와 지방관아의 행정기능인으로 종사했다.662)
경아전 또한 갑오개혁과 더불어 가장 큰 신분적 변화를 맞은 집단 중의 하나이다. 종래 경아전은 조선초기에 신분적으로 격하된 뒤 양반관료제의 외곽에 보조적 기능인으로 위치했지만,663) 새로운 관료체계하에서 정규 관료 그것도 중견급의 일원으로 통합되어 들어갔기 때문이다.
1894년 7월 8일에 의결된 군국기무처 의정안((47)항)에 의하면, “각부 아문의 主事 총액 중 1/3은 현역 이서 중에서 廉勤하고 文算있는 자를 골라, 전고국 시험을 거친 후 (벼슬을) 올려 임명할 것”이라고 규정함으로써 경아전 중 상당수를 중견 실무관료로 발탁하게 되었으며, 이어 7월 13일에는 “각부 아문의 勅任官을 파정한 후 먼저 도찰원에서 잠시 회동하여, 각사 이서 중 문산과 才諝가 있는 자를 시험하여 실시일을 기다려 재능에 따라 관직을 줄 것”((69)항)이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아전은 적어도 그 일부는 새로운 관료체계를 구성하는 일원으로, 그것도 중견 실무관료의 1/3을 차지하는 규모로 당당히 끼이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경아전은, 적어도 그 중 일부는 새로운 관료제 구조 속에서 실무관료의 일각으로 편입되어 들어갔고, 따라서 사실상 지위 상승의 계기를 맞을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각부 아문의 주사가 전통관료제의 참상관급에 해당되는 위치에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이는 경아전층의 대단한 성공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향리들은 사정이 그렇지 못했다.664) 갑오개혁의 핵심 기획자의 위치에 있던 兪吉濬은 지방제도의 개혁을 추진하면서 吏胥層의 배제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665) 이것은 실제로 갑오개혁기에 조세징수과정에서 이서층을 儒鄕層으로 교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666) 또한 제2기 갑오경장 내각의 실력자였던 朴泳孝도 1895년 3월 10일 공포된<內務衙門訓示>를 통하여, 이서의 부정과 비리를 척결하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던 것이다.667)
그러나 1896년 갑오정권이 무너지자 이서층은 다시 지방행정 실무자로 복귀하고 鄕員層은 배제되었다. 나아가 비록 그 정원은 감액하였지만, 이서에게 월봉을 지급함으로써 오히려 이들의 입지를 세워주게 되었다.668) 이로써 이서층은 일시적인 배제의 위기를 넘어 다시금 지방행정의 실무자 위치로 복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향리들의 운명이 이렇듯 일시적인 위기를 거쳐 과거의 지위를 복구하는 데 머물러 있었던 것은 아니다. 더구나 갑오개혁 이후 지방행정제도의 기본 틀은 바뀌었기 때문에 갑오개혁 이후 향리층의 위상 변화를 이런 각도에서만 이해하는 것은 부족하다. 향리층은 시대적 변화에 좀더 적극적으로 적응해 나갔다. 즉, 갑오개혁 이후 향리층은 변화된 지방제도 속에서의 자신의 위상을 확립해 나가는 한편, 시대적 변화에 더욱 민감하게 대응해 나갔는데, 그 중 하나가 근대적인 교육에 적극 동참해 간 것이고,669) 또 다른 하나가 새롭게 대두하는 상업적 농업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사회변동기에 지주·대지주로 성장해간 것이다. 그 중 가장 극적인 사례의 하나를 우리는 전라도 동복현의 지배적 향리가문인 同福 吳氏家에서 찾을 수 있다.670) 예컨대 동복의 향리 출신인 吳啓鍊과 吳在永은 갑오개혁 이후 군수를 역임했고, 오재영은 나아가 일제하에서 중추원의관을 역임하는 등 식민지체제하에서도 적극 적응해 나갔던 것이다.671) 또한 이들을 포함한 동복 오씨 일문은 그 지방의 대표적인 대지주로 성장하였다. 이것은 향리층의 동향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지만, 다른 지역에서도 유사한 사례를 찾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를 향리층 일반으로 확대하여 향리와 그 후예들은 근대 이후, 특히 식민지시기에 엄청난 사회적 진출을 이룩했고, 그 결과 식민지시기의 군수의 절대 다수를 향리의 자손들이 차지하게 되었다는 주장도 나온 바 있다.672) 그렇지만 이 주장은 충분히 실증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최근 한 연구에 의하면, 이러한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673) 한편 또 다른 방증 자료로서 1909년 전북지방의 통계에 대한 보고를 보면, 사족 중 토지를 소유한 사람이 20%인데 비해 吏校의 경우는 5%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674) 따라서 근대 이후 향리와 그 후손의 진출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견해는 다소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675) 그러나 상대적으로 보면 또는 구래의 다른 신분 범주에 비겨볼 때, 근대 이후의 사회변동에 향리층이 상당히 민감하게, 그리고 실리적 차원에서 매우 성공적으로 적응한 것만은 인정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물론 중간신분층의 지위 변화의 중요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金弼東>
662) | 경아전은 다시 錄事·書吏 등의 東班京衙前과 皂隷·羅將·諸員 등의 西班京衙前으로 나뉘는데, 중간신분층으로서의 경아전은 동반경아전을 가리키는 것이다. 경아전에 대해서는 신해순,≪조선전기의 경아전연구≫(성균관대 박사학위논문, 1986)를 참조할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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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3) | 경아전은 품계가 주어지지 않는 이서로서, 9품제로 편제된 양반관료체계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
664) | 조선시대의 향리에 대해서는 다음 글들을 참조할 것. 이성무,<조선초기의 향리>(≪한국사연구≫5, 1970). 이수건,<조선조 향리의 일연구>(≪문리대학보≫3, 영남대, 1974). 김필동,<조선후기 지방이서 집단의 조직구조>(≪한국학보≫28·29, 일지사, 1982년 가을·겨울). 이훈상,≪조선후기의 향리≫(일조각, 1990). |
665) | 兪吉濬,<與福澤諭吉書>(≪兪吉濬全書≫Ⅴ, 일조각, 1971), 278쪽. 이상찬,<1906∼1910년의 지방행정제도 변화와 지방자치 논의>(≪한국학보≫42, 1986)에서 재인용. |
666) | 이상찬, 위의 글, 52쪽 참조. |
667) | 내무아문 훈시에서 이서의 통제를 겨냥하고 있는 관련 조항을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인용문은 유영익, 앞의 책, 부록 참조. 序文 …士氣는 해이하며, 吏胥 苞苴에 眩며 인민은 저축 念이 無니… 제37조 관과 민이 상접 下情을 詳察야 吏胥輩로 여곰 居中 奸弄이 없게 事. 제76조 執卜 色吏의 加卜고 移卜 弊 일체 엄금할 事. 제79조 京邸吏와 營主人의 役價弊 捄正 事. |
668) | 윤정애,<한말(1894∼1905) 지방제도 개혁의 연구>(≪역사학보≫105, 1984). |
669) | 보수적인 양반에 비해 향리들은 근대적인 교육에 좀더 빨리 적응해 갔다. |
670) | 홍성찬,≪한국근대 농촌사회의 변동과 지주층≫(지식산업사, 1992). |
671) | 홍성찬, 위의 책. ―――,<한말·일제초 향리층의 변화와 문명개화론-보성군수 오재영의 경우를 중심으로->(≪한국사연구≫90, 1995). |
672) | 稻葉岩吉,<朝鮮社會史ノ斷面>下(≪東亞經濟硏究≫9-3, 1925). 이훈상, 앞의 책, 1쪽. |
673) | 홍순권에 의하면, 일제하의 군수는 1920년대에는 전체의 79.2%가 서기를 거쳐 군수로 임용되었으며, 1930년대에는 70%가 서기를 거쳐 임명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서기가 바로 향리 또는 그 후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일제시기의 서기란 이미 신분의 표시가 아니며, 근대 관료체계상의 한 직급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지금 선내 300명의 군수 중 260여 명의 군수는 모두 아전의 자제(출신)에서 나왔다고 한다”는 稻葉岩吉의 평가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홍순권,<일제시기의 지방통치와 조선인 관리에 관한 일고찰>(≪국사관논총≫64, 국사편찬위원회, 1995). |
674) | ≪대한매일신보≫, 1909년 12월 16일, 잡보에 의하면, 사족 전체수 대비 토지소유자는 4,826명:22,746명, 이교 전체 대비 토지소유자 수는 136명:2,842명으로 되어 있다. |
675) | 이 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결론은 좀더 구체적이고 광범위한 실증작업 이후로 미뤄져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