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서얼
庶孼은 조선 후기를 통하여 중간신분층 중에서 가장 활발한 신분상승 운동을 전개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656) 서얼에게 있어 가장 큰 장애로 되어 있던 것은 과거(문과) 응시 자격을 제한하는 것과 청요직에의 진출 제한에 대한 것인데, 비록 현실적인 제약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지만, 19세기를 통하여 제도적으로는 차별에 대한 완화를 획득했기 때문이다. 또한 지역에 따라서는 서얼의 陞班운동도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657) 특히 1882년 ‘壬午軍變’이 수습된 뒤 국왕이 내린 전교에서는 “우리 나라에서 門地를 숭상하는 것은 진실로 天理의 공정함이 아니다. 국가가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서 어찌 귀천을 가릴 것인가. 이제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려는 날을 기하여 마땅히 용인의 길을 넓혀, 무릇 西北·松都·庶孼·醫譯·胥吏·軍伍(常民)를 막론하고 (유능한 인재들을) 일체 顯職에 등용코자 하니 오직 재능에 따라 (인물을) 천거하도록 하라”고 함으로써 관직에의 등용문이 크게 열리게 되었는데, 서얼 또한 혜택을 받았음은 말할 것도 없다.658) 이후 서얼 출신들 중에는 李祖淵·李範晉·金嘉鎭·閔致憲·閔商鎬·閔泳綺·李允用·尹雄烈·安駉壽·金永準 등 청현직을 거쳐 대관에 이른 자가 다수 나타나게 되었다.659)
그러나 서얼층의 성장이 두드러지게 확인되는 것은 역시 갑오개혁 이후의 일이다.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갑오개혁 정부에는 다수의 서얼 출신들이 참여하게 되었다. 또한 갑오개혁에서의 신분제 개혁은 서얼이 그 동안 획득한 법적 지위를 더욱 확고하게 보장해 주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군국기무처의 의정안 중에서 서얼과 직접 관련이 있는 조항은 다음 세 가지이다.
⑥ 嫡妻와 妾에 모두 아들이 없는 연후에야 비로소 양자 들이는 것을 허용하여, 舊典(≪경국대전≫)을 밝게 펼 것. ⑧ 寡女의 再嫁는 귀천을 毋論하고 그 자유에 맡길 것. (26) …그저께 회의에서 “嫡·妾이 모두 아들이 없는 연후에야 비로소 양자 들이는 것을 허용하여, 舊典(≪경국대전≫)을 밝게 편다”고 한 조항 아래에 “令이 내리기 전에 있던 일은 追論할 수 없다”는 한 마디를 첨가해 넣을 것.
이 중에서 의정안 ⑥항은 서자의 가계 계승 자격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일 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 이를 보장해준 것이며, ⑧항은 재가의 자유와 그 정당성을 인정함으로써 대부분 서얼로 될 수밖에 없었던(양반일 경우) 재가녀 자손의 지위를 간접적으로 보장해 주는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이로써 서얼의 지위는 가정내에서도 향상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었다. 다만 (26)항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러한 변화에 대한 저항을 무마하려는 조치가 취해지기도 했다.
한편 19세기말 20세기초에 서얼은 재산상속의 측면에서도 상당한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원래 조선시대 전 기간을 통하여 서얼의 재산상속분은 매우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었지만,660) 조선시대 말기로 가면서 그 비율을 꾸준히 상승시켜 왔고, 19세기 말엽에는 적서간의 차이가 2:1 정도로 좁혀지게 되었던 것이다.661)
물론 서얼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특히 가정내에서 또는 사회적인 차별은 상당히 오랜 뒤까지도 강인한 사회적 관습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갑오개혁 이후의 변화는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656) | 이상백,<서얼금고시말>(≪동방학지≫창간호, 1954). 이종일,<18·19 세기의 서얼허통운동에 대하여>(≪한국사연구≫58, 1987). |
---|---|
657) | 이종일, 위의 글 참조. |
658) | 대표적인 인물이 김가진이다. 김가진은 규장각 검서관으로 관직에 들어온 뒤 장흥주부·교섭아문주사·내무부주사·주진종사관 등을 거쳐 일본판사대신·내무부참의 등으로 승진했다. 이 기간 동안 김가진은 1886년에 문과에 합격하는 한편, 수찬·장령·승지 등의 전통적인 청요직도 역임하였다. |
659) | 이종일,<양반서얼의 통청운동>(≪한국사≫34, 국사편찬위원회, 1995), 55쪽 참조. |
660) | ≪經國大典≫에는 奴婢와 田宅의 상속 비율을 良妾子女는 嫡子女의 1/7, 賤妾子女는 1/10 수준으로 규정하고 있다. |
661) | 이종일, 앞의 글(1995), 55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