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갑오개혁 이후의 가족관계 변화
가.≪형법대전≫을 통해본 가족관계
갑오개혁의 신분·가족 관계법의 개정에 수반하는 형법의 개정은 11년 후인 1905년에 제정 반포되었다.≪刑法大典≫의 제정은 일본의 조종이나 압력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후에 제정되는<조선민사령>에서의 관습존중의 의제를 마련하는 법제적 계기가 되었던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한다.734) 그러나 관습존중이라는 측면보다는 통치에 유리한 봉건성의 온존이라는 측면이 보다 크게 작용된 정책의 반영인 것으로 보여진다.
가) 신분제의 온존
≪형법대전≫은 신분의 고하에 따라 달리 적용되는 신분제를 전제하고 있다. 관리는 三等, 친속간은 상복제도상의 친소를 기준 六等 구분하고, 雇工과 주인 가족과의 관계도 친속-비유의 관계로 보고 논죄하는 등의 제 조항을 설정하고 있다.735) 이것은≪大明律≫의 규범 조항을 답습한 것으로, 신분제의 타파가 아닌 봉건적 신분계급제의 유지·온존하기 위한 법제로 평가된다.
나) 친족의 남녀차별 및 금혼 차별
친족의 범위에 대하여 父系 10촌, 夫系 7촌, 그리고 母系 6촌, 妻系 3촌으로 규정하고 있다.736) 남계와 여계간의 친족의 차이가 크다. 이 조항은≪經國大典≫의<五服> 및≪文公家禮≫에 명시된 상복제도상의 친족범위규정, 즉 ‘有服親及無服親’을 親屬으로 규정한 규례의 답습이다.
그리고 친족범위를 전제로 통혼금지 규정을 설정하고 있다. 남성에 대해서는 전처의 자매와의 통혼까지 허용하면서, 여성에 대해서는 전남편의 四從兄弟(10촌)까지의 통혼을 일체 금지하고 있다.737) 즉 여성에 대해서는 광범위한 근친혼 금지규정을 강제한 것이다. 물론 이 규정 역시≪대명률≫의 조항을 답습한 것이다. 나아가서 처첩에 대해서 夫의 喪中 개가를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부에게 대해서 처의 상중 개가를 금지하는 조항은 없다. 이 규정도 또한≪대명률≫조항의 답습이다.
다) 혼인 및 이혼
≪형법대전≫은 ‘정혼’을 법률상의 행위로 간주하여 위약에 대해서는 형까지 설정하고, 원한다면 상대방의 의사와 관계없이 그 혼인을 성사시킬 수 있다. 첩을 처로 맞이하는 것과 부의 법률상의 중혼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축첩은 인정하고 아울러 ‘七出’·‘不出’제에 입각한 처에 대한 일방적인 이혼규정을 설정하고 있다. 철저히 남성중심적 혼인제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상 지적한 바와 같이 형법대전상의 가족관계 규범은 대명률 답습 남계혈통중심주의와 도덕적 이상주의를 주류로 하고 있다. 이것에 대한 반성의 여론도 적지 않아 두 차례의 개정과정중에 ‘3편 300개조’로 된 형법초안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본인의 3촌 이내의 혈족과 그 배우자 및 부모의 형제매제의 자녀 그리고 배우자의 3촌 이내의 혈족과 형제매제의 배우자를 친족으로 간주하는 등 현실적이며 합리적인 남녀평등 원리에 완전히 입각한 조항도 있었다. 그러나 끝내 채택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