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러시아지역
미주에 이어 러시아령에서도 교포신문의 발간이 있었는데, 그 효시는≪죠(됴)신문≫이었다. 1908년 2월 26일자로 창간된 이 신문은 崔鳳俊이 사장을 맡고 있었다. 최봉준은 함북 경흥출신의 러시아 귀화인으로 러시아령 교포 가운데 대표적인 자산가였다. 연해주 지사의 허가를 얻어 발간한 이 신문은 ‘海蔘威(블라디보스톡)에 거주하는 조선인 신문’이라는 의미에서≪죠신문(海朝新聞)≫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놀라운 것은≪죠신문≫이 비록 3개월밖에 간행되지 못하지만, 활판으로 인쇄한 일간신문이었다는 점이다.
≪죠신문≫의 창간을 주도한 것은 鄭淳萬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輔安會 활동에도 참여하고 尙洞靑年會의 부회장도 역임하였는데, 1906년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여 최봉준과 협력하여 신문 간행을 추진하였다. 그 발간취지서를 보면 신문을 통하여 교포를 계몽하여 실력양성을 도모하고, 국민정신을 배양하며 국권회복을 주장하겠다는 목적을 밝히고 있었다. 이는 결국 노령교포의 구제와 국권회복을 위하여 신문을 발간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신문제작을 위하여 국내에 있던 전 황성신문사장 장지연을 주필로, 李剛·金河球 등을 편집·기자로 초빙하였다. 이 신문은 국문 4면으로, 일요일과 부활절 다음날만을 제외하고 매일 발행되었는데, 러시아가 러시아정교를 국교로 하고 있던 사실과 관련이 있었다. 발행부수는 400∼500부에 지나지 않았다.
≪죠신문≫의 내용은 국권회복과 노령교포의 계몽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국권회복을 위하여 망국인이 되지 않도록 고국을 생각하여야 한다는 1908년 3월 17일자의<고국을 도라다 보시오>와 같은 논설이 그 단적인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권회복에 관심을 집중시킨 나머지 노령교포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역할에는 소홀하여, 당시 교포들의 생존문제에 대한 기사는 별반 싣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다만 교포들의 교육에 대해서는 자주 논의하였다. 이처럼 국권회복에 대한 논의는 일제의 반발을 사게 되고, 일제는 국내와 무역을 하던 최봉준에게 압력을 가하여 결국 1908년 5월 28일자 제75호를 마지막으로 폐간하지 않을 수 없었다.060)
러시아령의 교포사회에서는≪죠신문≫의 폐간 직후부터 새로운 신문의 창간이 준비되었다. 이 때까지 러시아지역에서는 교민단체가 활발하지 않아, 신문은 교포사회 지도자를 중심으로 발행되고 있었다. 해조신문사의 인쇄시설을 구입하여 1908년 11월 18일자로 창간된 것이≪大東共報≫였다. 노령동포들의 문명개화와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한 이 신문은 발행인으로 러시아인을 내세우고, 사장에 車錫甫가 취임하고 兪鎭律·이강·정순만 등이 참여하였으며, 崔在亨·李尙雲·鄭在寬·韓馨權 등도 뒤에 관여하였다. 주 2회, 1,500부 가량 발행된≪대동공보≫는 국내의 의병활동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도 동포들의 계몽운동을 지원하여 민족의식과 애국심을 고취시키며, 일제의 국권침탈과 만행을 규탄하였다. 아울러 러시아거주 한국인의 생활개선과 권익보호에 앞장서 교포신문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대동공보≫는 安重根의 이등박문포살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었다. 안중근은 이 신문사의 탐방원으로 煙秋지방의 지국을 운영하기도 하였는데, 이등박문의 포살을 대동공보사의 관여자들과 협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1909년 한 해에만 국내에서 압수된≪대동공보≫가 57건 2,235부였던 것만으로도, 이 신문이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며 국권회복에 진력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1910년 7월 한일합병 직전, 러시아는 일본과 협약을 맺어 러시아내에서 한국인의 활동을 규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대동공보사에서는 폐간 압력에 대처하기 위하여 1910년 8월 18일자로≪大東新報≫라고 제호를 바꾸기도 하였으나, 결국 지령 250호인 9월 1일자로 폐간하지 않을 수 없었다.061) 유진율 등은 이후 1911년≪大洋報≫와 1912년≪勸業新聞≫을 발행하여, 계속 국권회복과 국민계몽을 내세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 신문은 勸業會의 기관지로 발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