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근대46권 신문화운동 ⅡⅡ. 근대 종교운동3. 천주교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1. 근대 신문의 효시
          • 1) 신문 발간의 배경
          • 2)≪한성순보≫의 창간
            • (1) 박문국 설치
            • (2) 신문 발간의 목적
            • (3) 필화와 중국과의 관계
          • 3)≪한성주보≫의 발간
            • (1) 순보와 주보의 차이
            • (2) 국내소식과 의견기사 증가
            • (3) 기사의 출처
          • 4) 박문국의 운영
            • (1) 발행부수
            • (2) 주보의 폐간
          • 5) 개화와 국민교화의 기능
        • 2. 근대 언론의 발달
          • 1) 민간지 등장의 시대적 배경
          • 2) 최초의 민간지≪독립신문≫
            • (1) 서재필의 망명과 귀국
            • (2) 체재의 변화
            • (3) 광고
            • (4)≪독립신문≫의 역할
            • (5) 서재필의 추방
            • (6) 윤치호와 아펜젤러의 경영
          • 3) 외국인의 신문 발행과 잡지
            • (1) 일본인 발행의 신문들
            • (2) 기독교계통의 종교신문
            • (3) 잡지의 시초
          • 4) 일간지 ≪일신문≫
            • (1) 배재학당의 ≪협셩회회보≫
            • (2) 일간신문으로 발전
            • (3) 기사의 외교문제화
            • (4)≪상무총보≫발간
          • 5) 새로운 신문들
            • (1)≪경성신문≫·≪대한황셩신문≫
            • (2) 필화사건
        • 3. 언론의 구국투쟁
          • 1) 한말 언론과 계몽운동
            • (1) 국내신문
            • (2) 국외신문
          • 2) 한말 언론의 국권회복운동
            • (1) 일제의 국권침탈에 대한 저항
            • (2) 국채보상운동의 주도
            • (3) 국민계몽과 애국심의 고취
          • 3) 일제의 언론규제
            • (1) 사전검열
            • (2)<신문지법>의 제정
            • (3)<신문지법>의 개정
      • Ⅱ. 근대 종교운동
        • 1. 유교
          • 1) 유교개혁사상의 발생
          • 2) 한말과 일제강점기 한국의 유교개혁사상
            • (1) 도학파의 유교개혁사상
            • (2) 애국계몽사상가의 유교개혁사상
            • (3) 심학(양명학)파의 유교개혁사상
          • 3) 유교개혁사상의 한계와 의의
        • 2. 불교
          • 1) 근대와 한국불교
          • 2) 문호개방과 한국불교
          • 3) 개화운동과 불교
          • 4) 일본불교의 침투와 입성 해금
          • 5) 입성 해금 이후의 교계 동향
          • 6) 임제종운동-반조동종운동
        • 3. 천주교
          • 1) 한국근대사와 천주교회
          • 2) 병인박해와 한국천주교회
          • 3) 그리스도 전교자유의 구현
          • 4) 교안과 신교자유의 문제
          • 5) 제도교회로의 발전과 새로운 고민
          • 6) 근대 천주교회의 사회적 기여
            • (1) 교육활동
            • (2) 근대적 출판·언론 문화활동
            • (3) 근대적 사회복지사업의 전개
        • 4. 기독교
          • 1) 기독교의 수용과 정착
            • (1) 중국과 일본을 통한 접촉
            • (2) 한미수호조약의 채결과 미국의 대한선교
          • 2) 교회의 발전
            • (1) 교회의 설립과 교단조직
            • (2) 선교지역 분할과 교파 연합활동
            • (3) 네비우스선교방법과 대부흥운동
          • 3) 기독교와 민족의식
            • (1) 민족의식의 태동
            • (2) 교회의 비정치화
          • 4) 기독교와 한국의 근대화
            • (1) 의료활동
            • (2) 교육활동
            • (3) 사회개혁운동
        • 5. 천도교
          • 1) 천도교의 성립
          • 2) 천도교의 중심사상
          • 3) 천도교의 민족운동
            • (1) 제1단계 천도교의 민족운동
            • (2) 제2단계 천도교의 민족운동
        • 6. 대종교
          • 1) 대종교의 창립과 의의
          • 2) 대종교의 교단조직과 포교활동
            • (1) 나철교조시기 교단조직과 포교활동
            • (2) 제2세 교주 김교헌시기의 교단조직과 포교활동
          • 3) 대종교의 항일민족독립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1. 서양과학에 대한 인식
          • 1) 수학
          • 2) 물리학
          • 3) 화학
          • 4) 박물학
          • 5) 천문학과 기상학
          • 6) 세계관의 변화
        • 2. 근대 과학기술의 도입
          • 1) 교통·통신·전기
            • (1) 근대적 교통·통신·전신 및 전기의 도입 배경
            • (2) 사회간접자본의 전개과정
          • 2) 근대 의료기술
            • (1) 서의한역서의 소개와 유입
            • (2) 일본을 통한 의료기술의 도입
            • (3) 서구 선교사들을 통한 의료기술의 도입
            • (4) 주체적인 서양의술의 수용
          • 3) 근대건축
            • (1) 19세기 말 양식건축의 이입
            • (2) 20세기 건축
          • 4) 근대 산업기술
            • (1) 개항 이전 서양식 무기기술의 개발
            • (2) 개항 이후 기계기술의 도입정책
            • (3) 대한제국시기 방직기술의 이식
            • (4) 1905년 이후 정미기술의 이식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5) 제도교회로의 발전과 새로운 고민

1886년에 체결된 한불조약에 의해 외국인 선교사에 대한 전교활동의 자유가 외교적으로 약정되었다. 그 후 잇따라 敎案의 근원적 해결을 위해 천주교 당사자와 內部 당국자가<교민조약>을 체결하게 되었고, 1904년 선교조약이 타결되는 것을 계기로 한국교인들에 대해서도 신교의 자유가 보장되기에 이름으로써,197) 조선천주교회는 그 창설 이후 1세기 남짓에 걸쳤던 박해의 시기를 벗어나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되었다. 즉 박해받는 ‘잠행적인 지하교회’로서의 역사가 법으로 보호받는 ‘자유로운 지상교회’로 새롭게 발돋움하게 된 것이다.

근대교회로의 발전은 먼저 사목권의 강화로 나타났다. 丙子修好條約으로 조선왕국이 개항정책을 취하게 된 후인 1877년에 조선교구 제6대 교구장 리델(Ridel)주교가 드세(Ducet)·로베르(Robert) 등 두 신부를 대동하고 만주의 조선교구 해외임시본부로부터 조선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그는 3개월 후 당국에 체포되어 만주로 추방되자 프랑스로 돌아감으로써 조선교구의 사목권자의 자리가 비게 되었다. 그가 1884년 사망한 후 조선교구의 교구장이 된 성직자는 리델주교 추방 후 副主敎 직책을 맡아 오던 블랑(Blanc)주교였다.198)

블랑주교는 조만간 실현될 종교의 자유시대를 대비하여 原州 부흥골(현 京畿道 驪州郡 康川面 釜坪里) 산협에 조선교회의 邦人성직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신학교는 한불조약체결 후에 서울 龍山으로 이설하여 ‘예수성심신학교’로 개편된 오늘날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의 전신이다. 블랑주교는 지상교회로 전교의 자유를 보장받은 새 교회의 사목지침으로 ‘敎會指導書’을 제정 공포하는 한편, 개방시대의 전교활동에 필요한 교리서를 찍어 낼 인쇄시설로 그간 일본 長崎에 두었던 조선교구의 聖書出版所를 서울에 이설하였다. 또한 조선전도의 협력자로 프랑스 샬트르聖바오로女子修道會를 조선으로 유치하는 등 근대교회로 발전할 체제정비에 힘썼다.199) 1890년에 사망한 블랑주교의 뒤를 이은 교구장은 뮈텔(Mutel, 閔德孝)주교였다.200)

뮈텔주교는 원래 1880년에 조선교구 소속의 전교신부로 조선에 입국하여 5년간 전교활동에 종사하다가 1885년 파리본부로 소환되어 파리외방전교회신학교의 학감직을 맡던 중 조선교구 8대 교구장이 되어 재차 조선왕국으로 나오게 되었다. 1891년 2월 그는 조선으로 부임해 왔다. 조선전교의 경험자인 그는 이제 박해에서 벗어난 조선교회의 발전을 새로운 각도에서 추진할 필요가 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1933년에 서울에서 善終할 때까지 43년간을 조선천주교회 최고책임자로서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조선왕국이 일제침략의 마수 때문에 국운이 기울기 시작하던 무렵부터 1910년 일제에 의해 한반도가 강점된 후에도 23년 동안, 그는 主敎座가 있던 명동에서 지내면서 한민족의 고난과 일제의 만행을 지켜 보왔다.

그는 지상교회로서의 새 역사를 다지게 된 조선천주교회의 근대적 발전을 부단히 추진하였다. 그가 조선에 부임하기 전인 1888년에는 교인 15,416명에 성직자가 16명이고 전국에 성당이 네 곳뿐이던 교회를,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1910년에 이르러는 교인 73,517명, 성직자 63명, 수녀 59명에 전국 69개의 성당을 가지는 교회로 교세를 신장시켰다. 이처럼 조선교회는 藥峴·明洞 등에 우리 나라 최초의 서양식 교회건물을 마련하고 파리본부로부터 전교성직자를 증원받아 성직 진용을 강화하였고, 仁川·大邱·旺林·水原·咸悅·橫城·豊水院·釜山·全州·江景·倭館·元山·濟州 등과 그 밖의 전국 각지에 교회를 설립하여 교세를 확장하기에 힘썼다.

또한 조선교인 자제들을 교육하기 위하여 각지에 교회 부설의 사립학교를 속속 설립하였다. 한편 조선에서 교사교육을 담당시키는 동시에 조선교회 전도의 동반자로 독일의 베네딕트(聖芬道)수도회를 유치하였으며, 교인을 중심한 조선인들의 근대적 계몽을 위하여≪京鄕新聞≫과≪京鄕雜誌≫를 창간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천주교회가 낳은 순교자들의 순교사적 조사에도 힘을 기울여 뒷날 韓國聖人들이 생겨날 수 있는 기초자료를 작성하는 등 한국천주교회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201) 그의 권위주의적이며 성직자중심(Clericalism)적인 교회사목과 敎階制度를 강조하는 교회운동은 조선교인들의 신앙생활에 특이한 영향을 미치게 했다. 가혹한 박해시대에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자세로 목숨을 걸고 박해에 맞서면서 교회발전에 헌신적이던 조선교인들로 하여금 차차 성직자의 영향력에 안주하고 순종적·소극적·퇴영적인 신앙자세에 젖어들게 하였고, 내세지향적인 個人救靈 신앙, 초월주의적 신앙으로만 흐르게 되는 신앙자세를 낳게 했다. 한편 그의 철저한 정교분리의 사목방침은 서구신학의 聖俗二元論을 수용하고 초월주의적·경건주의적 신앙의 충직한 봉행에 치중하던 파리외방전교회의 기본 성향을 받은 것이었으나, 동시에 신앙자유정책 구현 후 새로운 박해자로 등장할 일제 침략세력으로부터 한국천주교회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계책이기도 했다. 뮈텔주교는 정치에 대한 비판과 항쟁을 금지하는 사목방침을 취하며 일제에 대한 타협 내지는 그들의 조선침략정책에 대한 체제옹호적인 입장을 고수하였다.202)

물론 조선교구 소속의 프랑스인 성직자나 조선인 성직자 가운데 한말 사회에서 자행되는 일제의 침략정책과 만행에 대해 음성적인 반대나 저항을 시도한 예가 없지 않았다. 교구장의 이러한 사목방침에도 불구하고 일제침략으로 가물거리는 조국의 운명을 돌이키고자 하는 조선인 신자들의 구국운동이 여러 형태로 전개되었었다.203) 조선인 성직자들은 교구장의 엄격한 정교분리의 원칙에 따라 직접적인 정치참여나 저항투쟁보다 의거·의사의 막후 지원이나 교육사업을 통한 애국계몽운동의 형태로 구국운동에 간접적으로 참여하였었다. 이러한 한말 교회의 존재는 조여드는 일제 침략세력 앞에 놓였던 조선인의 절박한 위기의식 속에서 구국투쟁과는 거리를 느끼게 하는 것으로 비추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에 제도교회로의 발전과 달리 민족교회로의 사회적 기대치는 오히려 낮아지고 있었다. 한말의 한국천주교회는 정교분리를 내세우는 사목방침의 고수와 개인구령적 경건주의신앙·몰사회적 영혼의 悅福이나 소박한 내적 안식, 세속과의 절연, 사회 무관의 초월주의적 신앙자세로 비춰지면서 민족교회로의 발전이나 사회흡인력의 강화와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으며, 천주신앙으로의 입교율이 체감되는 현상을 낳게 되었다.204)

197)宣敎條約의 조문에 한국인의 신교자유가 명시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교인들의 신교를 묵인적으로 전제하고 선교사들의 활동에 관해 규정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198)Blanc, Jean Marie Gustav(1844∼1890, 한국명 白圭三, 朝鮮敎區 제7대 敎區長 1882∼1890 재임).
199)Blanc文書, 韓國敎會史硏究所 소장의 佛文文書(복사간행).
200)Mutel, Gustav Charles Marie(1854∼1933, 한국명 閔德孝, 朝鮮敎區 제8대 敎區長, 1890. 8∼1933. 1. 재임).
201)Mgr. Larribeau, Un grand Evéque missinnaire, S. Exc. Mgr. Gustave Mutel, Paris, 1935.
202)Mutel主敎는 비정하리만치 철저하게 정교분리의 사목원칙을 고수하였다. 그는 교인들이 항일투쟁에 나서 교회에 難境을 초래하게 됨을 극도로 경계하였다. 그 하나의 예로 安重根義士가 하얼삔에서 伊藤博文을 포살하고 체포된 후 旅順監獄에서 재판받고 1910년에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을 때 최후의 告解를 위해서 그에게 洗禮를 베풀어 주었고 또 그 동안 뒤에서 후원해 주던 Wilhelm 신부를 旅順으로 오도록 간청한 일이 있었는데 Mutel주교는 朝鮮敎區 책임자로서 Wilhelm신부의 旅順行을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Wilhelm신부가 이 명을 어기고 旅順에 가서 사형 전의 安重根義士를 만나자 Mutel주교는 Wilhelm신부의 聖事權을 정지시키고 프랑스로 추방하는 조치를 취했다.
203)豊水院聖堂의 본당신부이던 鄭圭夏신부가 의병을 격려하고 자금을 대주는 등 적극적으로 도운 바 있고, 천주교인 安重根의 의거와 安明根의 安岳事件과 李基唐의 南滿州에서의 무장독립운동이나 國債報償運動을 선도한 大邱의 교인 徐相燉(敦) 등의 일은 유명하다. 그 밖에 黃海道와 間島지방에서도 천주교인들이 주도한 항일운동이 한말, 일제 초기에 걸쳐 끊임없이 전개된 바 있다(盧吉明,≪가톨릭과 朝鮮後期 社會變動≫(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1988), 266∼274쪽).
204)1900∼1904년 그리스도신앙인의 연평균 증가율은 가톨릭 10.19%, 장로교 14.95%, 감리교 12.58%로 모두가 10%를 약간 상회하였으나, 1905∼1909년 연평균 신자 증가율은 가톨릭 2.24%, 장로교 43,77%, 감리교 49.75%로 가톨릭은 매우 저조한 반면에 개신교의 신자 증가율은 놀랄 만큼 상승한 것으로 나타난다. 가톨릭의 경우에는 乙巳條約이 체결된 1905년 이후 1년간은 오히려 신자수가 감소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盧吉明, 위의 글, 286∼287쪽).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