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1920년대 후반 재일조선인 민족해방운동
국내 대중운동의 고양과 함께 재일조선인 민족해방운동도 일본 전역에서 활발해졌다. 이에 따라 지역 단위에서의 조직적 성과에 기초해 전국적인 대중 조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재일조선인 노동운동단체는 초기의 상호부조와 친목을 목적으로하는 경향에서 노동자계급의 성장과 함께 계급해방을 내건 조직으로 성장해 갔는데 가시적 산물이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이었다. 이 단체는 1925년 2월 22일 오전 10시 조직되었다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은 기존의 각종 조선인단체를 통일하여 대중을 단결시켜낸다는 단체 가입의 원칙 아래 12개 단체 800명으로 출발했다.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은 조직확대가 계속되어 1925년 10월 1220명의 조합원을 가진 조직으로 성장했다. 물론 그 이전에 동맹회 조직들이 존재하여 재일조선인 노동자들을 조직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의 활동은 일월회의 지도와 기타 대중단체와의 공동으로 행해졌다.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이 결성된 1925년에는 조선수해 이재민 구제운동과 小樽高等商業學校 군사훈련사건 규탄운동이 있었다. 이와 함께 三重縣壓殺事件에 대한 조·일연대투쟁이 있었다.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은 1926년 2월 10일 삼월회·재동경조선무산청년동맹회·일월회와 공동으로 이 사건에 대해 일본의 무산계급에게 연대투쟁할 것을 호소했다.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은 일본지역에서의 방향전환을 외형상 주도해 갔다.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정치부는 1927년 1월 12일자로<방향전환에 관한 선언>을 발표하고, 민족적 단일정당의 결성을 선동했다.
1926년이래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의 중앙간부들은 조직의 개편에 대해 고민하다가 당시 합동조합에 지나지 않던 각 조합을 산업별 혹은 직업별로 정리하려고 했다. 그러나 사회적 조건이 허락하지 않아서 보류하고 당분간 지역정리에 노력했다.
방향전환론이 대두한 이후 최초의 대회인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제3회 대회가 1927년 4월 20일 열렸다. 대회는 선언과 신강령을 채택했다. 선언은 민족·계급적 차별의 상황을 설명했는데, 다음과 같다.
우리의 노동생활은 일본의 노동자에 비하여 거의 특수한 취급을 받고 있다. 민족적 차별과 학대는 우리에게 이중의 질곡이다. 그리고 우리 대부분은 자유노동자이기 때문에 조합의 형태는 직업별·산업별 기준을 갖는 것이 불가능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대다수는 언어가 불통, 감정이 다르고 습관이 상이하며 지식의 부족 등 여러 가지 조건에서 일본노동조합에 직접 참가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은 내부에서는 자유노동자만으로 한정하고 공장노동자는 일본노동조합평의회에 가입하기로 하는 의견도 있었으나 민족별 차별 등 특수한 조건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견해가 채택되었다. 제3회 정기대회 이후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은 각지에 분산적으로 조직된 조합을 정리·통합하려는 ‘1府縣 1組合’ 원칙을 수립했다. 개편된 조직은 최고기관으로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중앙이 있고, 각 부현에 조합이 있으며, 그 아래에는 지부를 설치했다.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제4회 대회는 1928년 5월 13, 14일 양일간 東京帝國大學 셋츠루멘트 대강당에서 열렸다. 이 대회에 대해 조선공산당 4차당 일본총국은 조직적인 준비를 했다. 당시 朝鮮共産黨日本總局의 대책은 ①간부의 전형, ②신간회 지도문제 논의, ③대판조선노동조합 분쟁의 해결, ④기관지 발간, ⑤대회결과의 정리 등과 같았다.
당시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의 간부는 조선공산당 4차당이 장악하여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의 주도권을 일본총국이 잡았다. 제4회 대회는 오사카사건의 처리와 함께 일반정세보고와 12개안의 토의가 있었다. 이와 함께 제4회 대회는 산업별 조합의 조직에 대해 토의했다. 당시에는 실현되지 않고 있다가 이후 ‘1산업 1조합주의’로 본격적으로 나아감에 따라서 실현되었다.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에 있어 제4회 대회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을 노동조합으로 확인한 대회였다. 그러나 자유노동자 중심의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은 공장노동자의 경우도 대부분이 가내, 영세 사업장 취업노동자이기 때문에 산업별조합으로의 재편은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았다. 1928년 9월 재편성 지령이 내려졌으나 실시되지 못했고 지역별 조직의 실체는 변하지 않았다.
한편 제3회 대회 이후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은 조선공산당 3차당 일본부 조직의 강화와 이에 따라 대중적 정치투쟁을 전개했다. 1927, 1928년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의 활동의 대강을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1927년의 경우, 첫째 각 조합을 지역단위에서 정리하여 과거의 소규모 조직을 전부 해체하여 1府1縣에 단일조합을 설치하여 대중의 자연생장적 소결합체를 의식적 결합체로 상승시켰다.
둘째 조합의 활동분자들의 교육을 강화했다. 재일본 조선노동자는 70% 이상이 문맹으로 계몽사업이 대단히 중요했다. 구성원들은 조합활동의 의의와 한계 등에 대해 무지한 상태여서 강사의 파견, 교재의 제작 그리고 강좌의 설치로 교양을 실시했던 것이다. 셋째 조·일 연대를 계속적으로 강화해 갔다.
넷째로 전민족적 단일당 결성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조선인 노동자의 일부로 일본의 노동시장에 고립되어 있는 재일조선인 노동자는 전민족적 단일당 결성운동에 참가했다. 조선인의 문제는 단순히 경제투쟁에 국한해서는 해결을 볼 수 없고 정치운동을 긍정하고 전민족적 단일당 결성을 주저없이 결성함으로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의 1927년 활동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조선총독부 폭압정치 반대운동이다. 이것은 지부의 연설회·강연회 등을 통해서 전개되었다. 이를 통해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의 민족적 정치세력화가 보다 강화되었는데, 조선총독 폭압정치 반대운동에만도 전국적으로 1년간에 23회의 연설회, 14회의 시위, 40회의 삐라 살포가 있었다.
1928년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은 지역 단위조직의 활성화에 따라 지부·반 조직의 강화가 눈에 띤다. 이 가운데 동경과 오사카지역의 조선인 노동조합은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산하조직으로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의 플랙션에 의해 지도되었다.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중앙은 1928년 활성화된 지부·반 조직을 통해 민족해방운동을 보다 강력하게 전개했다. 조선 내의 탄압, 간도공산당사건에 대한 항의 등이 삐라로 선전되었고, 7, 8월에는 국치기념일, 관동대학살 기념일에 즈음하여 일본의 조선지배 전체를 비판하고 정치적 선전을 대대적으로 수행했다. 그리고 삼총해금운동과 1927년 이후 계속된 조선총독부 폭압정치 반대운동이 있었다.
국내와의 지속적인 연대와 지지투쟁을 계속하여 하의도 소작쟁의 때에도 조선농민총동맹과 연락하여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6월 부산 전차스트라이크에 대해서도 선전활동을 전개했다.567)
1929년에도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은 원산총파업 지지 활동을 전개했고, 나아가 관북이재민 구원을 위해서 朝鮮水災神奈川縣救濟會를 조직해 활동했다. 이후에는 이와사키(川崎), 히가시 요코하마(東橫濱) 등에 분회가 조직되었고 국내 동포의 참상이 널리 알려졌다.568)
나) 조선공산당 일본부
조선공산당은 1925년 4월 17일 창건되었다. 이것을 소위 1차당이라고 한다. 조선공산당 1차당 시기 일본에는 일본부가 설치되는데, 이 조직은 崔元澤이 책임을 맡았다. 최원택의 지도로 金燦·이석·金正奎로 야체이카가 조직되었다. 조선공산당 1차당 시기 일본부는 당시 일본지역의 재일조선인의 여러 조직과 공산주의 세력을 묶어 내지는 못했다.
조선공산당 2차당은 제3회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일본부 책임자로 김정규를 선정하여 그에게 일본부조직에 관한 모든 지령을 내렸다. 조선공산당 2차당이 일본부를 설치한 목적은 조선 내 기타 조직과 연락하며, 아울러 일본의 공산주의자들과 연락하는 것이었다. 또한 일본부 책임비서에게 일본에서의 당원신분, 야체이카조직, 당 사업에 관한 모든 권한을 부여했다.
조선공산당 2차당 시기에는 일본내에 공산주의적 경향을 갖은 청년학생들의 서클적 모임은 있었으나 아직 당조직 안에 高麗共産靑年會 일본지부가 조직되지는 못했다.
일월회계의 국내 진출과 함께 일본부는 조선공산당 3차당 안광천 책임비서 때 부활되었다. 안광천은 일월회 시기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일본부를 재건했다. 책임비서 朴洛鍾으로 조직된 일본부는 일월회에서 활동하던 다수가 포진하고 있었다.
조선공산당 3차당 일본부는 매월 한번씩 개최된 간부회의를 통해 중요사항을 의결·수행했다. 일본부에 소속되어 있던 조선공산당원들은 지역적 특이성과 인테리적 성향, 공산주의 이론흡수의 상대적 선진성 때문에 조선공산당 중앙의 전술과 활동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일본부의 구성원은 조선공산당 중앙의 계급투쟁의 선명성이 보장되지 못한 가운데 당의 지도정신이 혼란함을 가장 먼저 지적하고, 이론과 실천의 결합을 위한 이론학습과 신간회를 통한 민족해방운동을 제안했다. 일본지역에서는 조선공산당 3차당 시기에 와서 재일조선인 조직운동이 강화되어 처음으로 고려공산청년회가 조직되었다.
조선공산당 3차당 일본부의 주요한 활동은 조직의 확대 강화와 유학생과 재일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선전활동이었다. 조선공산당 3차당은 “노동자는 전민족운동의 선두가 되자”, “모든 힘을 신간회로”라는 슬로건을 제기했다. 조선공산당 3차당 시기 일본부 야체이카는 각종 노동단체와 공장 안에 들어가 조직사업을 전개해 동경·오사카·교토·요코하마에 60명의 당원을 포섭했다.
한편 국제공산당의 지도를 받는 지역당은 상대적인 독자성을 가지며 동시에 지역적 특수성에 따라서 활동을 전개했는데 조선공산당 일본부도 일본공산당과 연계관계를 갖고 있었다. 조선공산당 일본부 조직에 대한 일본공산당과 사회주의자의 관심은 일정하게 존재했고 특히 1, 2차 조선공산당에 대한 공판이 임박하자 여기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569)
조선공산당 4차당 중앙은 일본총국과 만주총국을 설치했다. 이에 따라 조선공산당 3차당 일본부는 일본총국으로 1928년 4월 경 재건되었다. 5월 조선공산당 4차당 책임비서 차금봉의 지령에 따라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의 간부가 결정되었다.
조선공산당 4차당 시기 고려공산청년회 제2회 중앙집행위원회는 1928년 3월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 간부로 책임비서에 印貞植을 선정했다. 그리고 關東部와 關西部를 설치했고, 다시 관동부를 東京區와 橫濱區로 나누었다. 일본총국 한림책임비서 시기의 당 플랙션은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신간회 동경지회, 동경조선노동조합 등에 설치되었다.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의 활동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조직의 강화와 계급의식의 고양, 반일사상의 고취에 중점이 두어졌다. 그리고 선전활동을 통해 당원의 획득과 당세의 확대에 노력했다. 따라서 대부분의 활동은 주로 일본총국과 대중단체인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재일본조선청년동맹 중앙 그리고 각 지부·반의 플랙션을 통해 전개되었다.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은 당 중앙의 민족해방운동에 있어서의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 쟁취와 신간회 전술에 주목했다.
다) 동경조선무산청년동맹회
일본에서는 1920년대 초부터 전술했듯이 동경·오사카 등지를 중심으로 사상·청년단체가 계속적으로 결성되었는데, 1925년 1월 기존의 朝鮮無産靑年會·東京朝鮮無産靑年同盟이 합동하여 동경조선무산청년동맹회가 되었다. 白武·李如星·안광천 등이 주도한 이 조직은 회원자격을 25세로 한정했다.
동경조선무산청년동맹회는 1926년 11월 일본에서 무산정당운동이 활성화되자 널리 청년을 규합하여 공동전선을 조직하기 위해 ‘무산’의 두자를 빼고 ‘동경조선청년동맹’으로 개칭했다. 이밖에도 오사카의 대판고려무산청년동맹이나 효고(兵庫)의 兵庫縣조선무산동맹의 경우도 개칭하여 지역청년운동의 구심으로 그 역할을 수행했다. 한편 삼일청년회가 오사카에서 활동했다.
동경조선무산청년동맹회는 조직적인 연계와 제휴를 통해 활동을 전개하며 1926년 1월부터 기관지≪청년조선≫(월간)을 발간했다. 동경조선무산청년동맹회는 강령의 실현을 위해 선전활동을 지속했던 것이다.
라) 동경조선청년동맹
재일본무산청년동맹은 박천을 위원장으로 고학생과 무산청년을 중심으로 1925년 조직되었다. 이 조직이 1926년 겨울 개칭하여, 일월회의 해체와 함께 일월회의 회원으로 25세 이하의 다수 청년이 가입하여 東京朝鮮靑年同盟으로 새롭게 발족되었다.
발족 이후 동경조선청년동맹은 조선청년총동맹에 가맹했다. 조선청년총동맹은 조선청년운동의 최고기관으로 중앙이 경성에 있었고 각 도에 도연맹, 군에는 군동맹이 결성되었다. 동경조선청년동맹은 조선 내의 府·縣동맹과 같은 자격의 단위단체였다.
동경조선청년동맹은 재정상의 어려움에도 프린트로 기관지≪청년조선≫을 속간했는데, 이 기관지는 단순한 재동경조선청년동맹의 기관지에서 전국적 청년신문으로 발전할 전망을 갖고 있었다.
동경조선청년동맹의 활동은 다른 재일조선인 민족해방운동조직보다 계급적 입장을 분명히 했다. 특히 이 조직은 사회과학의 교양에 필요한 강좌와 강연회·독서회를 주로 개최했으며, 연대 투쟁도 활발히 전개했다.
마) 재일본조선청년동맹
지역에서 청년운동의 조직화에 따라 재일조선인 청년운동단체도 전국적인 조직전망을 갖게 되었다. 재일본조선청년동맹은 이에 따라 준비위원회의 활동에 기초하여 1928년 3월 21일 오후 6시 오사카 天王寺 공회당에서 창립대회를 열어 결성되었다.
在日本朝鮮勞動總同盟의 결성과 함께 청년운동진영의 조직은 보다 강화되어 동경·오사카·교토의 조선청년동맹이 지부로 변경하여 조직내에 들어왔다.570) 그리고 1929년 4월에는 효고지부가 결성되었다.
재일본조선청년동맹은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과 가장 긴밀한 우의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간부들은 양쪽의 역원을 겸임하는 사람이 많았다. 실제로 재일조선인 민족해방운동에서 공산주의계를 대표하는 2대 세력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 조직에는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고려공산청년회 플랙션이 들어가 있었다. 이들의 지도로 실제 투쟁은 조직되었는데,571) 특히 기관지를 통해 조선총독부의 삼총해산음모에 반대하여 해금운동에 궐기할 것을 호소하고 치안유지법 개악, 조선 증병과 중국출병반대, 식민지 노예교육 반대에 일어난 조선의 학생동맹휴학투쟁 지지 등을 표명했다.
이상과 같은 1928년 시기 재일본조선청년동맹은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과 함께 4대 기념투쟁과 조선총독 폭압정치 반대운동, 삼총해금운동, 삼단체 해산 반대운동, 치안유지법개악 반대운동, 조선 증병·경찰 증치·중국출병 반대운동,572) 그리고 식민지교육 반대운동과 특히 국제연대조직 사업과 투쟁 등을 전개했다.
바) 학우회
1920년대 학우회는 상당수의 구성원들이 재일조선인 유학생단체, 예를 들면 조선기독교청년회·조선학회의 주요 구성원으로 되어 있었다.
조선기독교청년회와는 이명동체라고 할 수 있는 학우회는 1925년 일월회계의 한림에 의해 조직이 장악되어, 기존의 민족주의적 색채를 일정하게 벗었다. 학우회가 합법적 대중단체이기 때문에 다수가 재일조선인 단체에 이중, 삼중으로 소속되어 있었다. 특히 학우회는 1920년대 중반 이후 재일본조선인노동총동맹·동경조선무산청년동맹회·재일본조선청년동맹·일월회·신흥과학연구회 등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학우회의 사업은 주로 대중사업이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이 가운데 강연회·연구회·운동회·웅변대회·환영회·환송회·축하회 등을 통해서 대중교양과 계몽활동을 전개했으며, 이를 통해 공산주의와 반일투쟁사상을 선전·선동했다.
재일조선인 유학생운동은 1920년대 초에 주로 학우회와 각종 동창회 등을 중심으로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와 달리 1920년대 중반 이후에는 학우회 활동이 침체되면서 신흥과학연구회를 비롯한 공산주의계의 유학생 운동단체가 선진·전투적인 투쟁을 주도했다.
사) 신간회 일본지역 지회
1927년 5월 7일 早稻田대학 스콧트홀에서는 新幹會 東京支會가 창립되었다. 이렇게 동경에 신간회 지회가 빨리 설립될 수 있었던 것은 민족단일당을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국내와 연결되어 동시에 전개되었던 점과 지속적으로 공동투쟁이 동경지역에서 전개되어왔기 때문이다.
신간회 동경지회는 1928년 초 본부와 대립했다. 그 계기는 대회금지에 대한 대응방식의 차이에서 기인했다. 또한 동경지회의 기관지 발간을 놓고도 본부와 대립했다. 동경지회는 1927년 성립된 이후 기관지 발행을 계획했고,573) 제2회 대회에서도 결의되었으며 그 해 6월 내지는 8월에는 동경지회의 기관지로≪신간신문≫이 준비되었다. 그러나 결국 본부의 발간중지 명령으로 햇볕을 보지 못했다.
신간회 동경지회에는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당 조직 개편 때인 1928년 4월, 韓林·姜小泉이 플랙션으로 활동했고, 6월에 가서는 서인식·임종웅으로 개편되었다.574) 특히 신간회 동경지회는 조직 초부터 무정부주의계의 재일조선인단체와는 조직적, 개인적으로 거의 연대를 구축하지 않았는데 이후에도 무정부주의계와는 계속 대립관계였다.
비타협적 민족주의세력과 조선공산당이 연대하여 결성한 신간회는 동경지회의 경우 대부분의 활동을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조선인단체협의회 등 다른 단체와 공동으로 전개했다. 조직 이후 신간회 동경지회의 활동은 다음과 같다. ①반동단체 민중회 박멸운동, ②관동대지진 학살동포 추도회, ③조선총독폭압정치 반대운동, ④조선공산당사건 비공개공판 반대운동, ⑤자꼬 반제티 사형처분 반대운동, ⑥중국시찰단 조선대표 파견운동, ⑦국치일 기념운동, ⑧러시아혁명 기념운동, ⑨조선인대회 소집, ⑩西神田署 고문사건 항의 등이었다.
신간회 동경지회는 대중투쟁의 장소를 제공하기도 했다. 1927년 9월 17일 신간회 동경지회 회관에서 조선총독폭압정치반대관동지방동맹이 결성되었다. 여기에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신간회 동경지회·학우회 등과 동경조선청년동맹·동경조선여자청년동맹·동경조선노동조합·동경조선노동조합 4지부·신흥과학연구회·협동조합운동사·여자학흥회의 모두 14단체가 참가했다.575) 조선총독폭압정치반대관동지방동맹은 1927년에 결성된 조선인단체협의회에서 아나키즘계를 제외하여 구성되었으며, 결국 신간회 동경지회와 같은 구성이었다.
1929년 신간회 동경지회는 개별 단위운동을 조직하며, 투쟁을 지속했는데, 주요한 투쟁목표는 다음과 같다. ①도일저지 반대, ②거주권 확립, ③삼총 해금, ④언론·출판·결사·집회의 자유 획득, ⑤<치안유지법>제령 제7호의 철폐운동, ⑥이민 반대운동, ⑦ 증병증경 반대운동, ⑧ 민족적 차별배척 및 특수 폭압 반대운동, ⑨부당 금족·구인·검속·불법감금 및 고문경찰 반대운동, ⑩학교 내 사법경찰 간섭 반대운동, ⑪내선융화 기반정책 반대운동, ⑫해방운동 희생자 구원운동, ⑬정치적 자유획득, 노동동맹 지지 등이었다.576) 이러한 활동은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과 재일본조선청년동맹과의 긴밀한 유대 속에서 진행되었다.
실제로 신간회 동경지회의 1929년의 주요 활동은 원산총파업을 지지하는 격려 전보를 발송한 것, 3·1기념일·국치기념일 연설회 등이 있었다. 그리고 제3회 대회의 준비 이외에 1929년 9월 조선인 노동자 강제송환에 대한 항의 활동지령을 본부로부터 접수한 것 말고는 1931년 신간회 해소 때까지 활동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없다. 신간회 일본지역 조직은 토쿄·나고야·오사카·교토지회가 있었다.
아) 근우회 동경지회
민족단일당을 조직하려는 움직임에 따라 조직된 신간회 일본지역 지회와 함께 근우회 일본지역 지회도 결성되었다.
근우회 동경지회의 창립대회는 기독청년회관에서 1928년 1월 21일 열렸다. 이 조직은 신간회 동경지회가 쓰는 사무실을 함께 쓰고 있었다. 따라서 중요한 조직·활동의 내용은 상당 부분 신간회와 함께 했다. 특히 본부와 동경지회 간의 대립에서도 횡보를 함께 했다.
근우회 동경지회는 1929년 6월경부터 내분으로 활동에 많은 장애가 초래되었다. 동경지회는 1929년 이후에는 실제활동의 기록이 보이지 않다가 신간회 동경지회의 자연해산과 함께 조선 내 근우회의 해체를 기다리지 않고 일본 각지의 지회와 함께 해산했다.
동경지회의 활동에 있어 특기할 만한 것은 1928년 3월 18일부터 전개한 여성문제 대강연회였다. 이 모임은 재일조선인 대중단체의 적극적인 지지와 찬조에 의해 전개되었다.577) 이 자리에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신간회 동경지회·동경조선노동조합·학우회·프로예술동맹 동경지회·신흥과학연구회·재일본조선청년동맹·三總解禁同盟 등의 찬조연설이 있었다.578) 이와 함께 일본지역 근우회 조직은 교토지회·오사카지회가 있었다.
자) 조선인단체협의회
朝鮮人團體協議會는 정우회선언 이후 국내 및 일본에서의 통합운동의 결과 1927년 2월 19일 결성되었다.
재일조선인 민족해방운동 단체들은 3·1 기념투쟁·국치일 투쟁·관동대지진·조선인학살 추도회 등을 전개했고, 이것이 조선인단체협의회 결성의 토대가 되었다. 조선인단체협의회는 형식과 실제에 있어 신간회보다 광범위한 조직으로 주의·주장이 다르더라도 조선인으로 조선민족의 해방을 희구하는 단체 18개가 결집했다.
신간회 동경지회의 설립이 재일조선인 단체의 공동투쟁의 산물이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신간회 동경지회를 주도하던 인물 가운데 조선인단체협의회에 가입해 있던 조직의 구성원이 많이 포진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선인단체협의회에 참가했던 아나키즘계 단체는 신간회의 운동에 대해서 대립하다 탈퇴했다.
이상과 같은 재일조선인 민족해방운동 조직과 함께 불교·천도교 조직의 움직임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위와 같이 재일조선인은 일본 전역에서 끊임없이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했다. 1910년대의 재일조선인 민족해방운동은 초기 유학생 중심의 단체를 중심으로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강하게 드러내며 전개되었고, 그 가운데 재일조선인 유학생들은 자연스럽게 민족의식을 체득하게 되었다.
1910년대에 결성된 단체의 특징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고 있었다.579) 첫째, 노동자 구호를 목적으로 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둘째, 1910년대에 결성된 단체가 1920년대 초에 결성된 단체에 비해 생명이 길지 못하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결성의 목적이 추상적이고, 대상이 제한적이며, 지도부의 잦은 변동을 들 수 있다.
한편 1920년대 재일조선인 민족해방운동은 조직운동의 성과에 기초하여 발전했다. 1925년에서 1931년 시기 재일본 조선민족해방운동사에서 조직의 중심은 일월회→조선공산당 일본부→조선공산당 일본총국→‘재건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무산자사·‘일본출판부’로 옮겨갔다. 이러한 전위조직은 대중단체인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재일본조선청년동맹·신간회·학우회 등을 직·간접적으로 지도했다.
1920년대 재일조선인 민족해방운동은 지속적으로 발전했다. 단체 중심으로 발전하던 1920년대 초 재일조선인 운동은 관동대지진으로 일시적 공백이 없지는 않았으나 조직적인 재건이 대중운동의 고양과 함께 이루어져 보다 투쟁이 강화되었다.
발전의 고양기를 향해 치닫던 1927년에는 재일조선인의 민족해방운동이 본격적으로 운동단체 연대에 기초해 공동투쟁의 길로 나아갔다. 1928년은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의 조직강화가 도모되어 야체이카와 플랙션을 통해 직접 대중단체의 지도가 통일적으로 이루어졌으며 1929년에도 재일조선인의 민족해방운동의 발전은 거듭되었다.
<金仁德>
567) | 金浩永,<釜山電車乘務員の罷業を勝たせろ>(≪進め≫, 1928년 7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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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8) | 神奈川縣조선노동조합본부,<神組 ニユ-ス>10(내무성 1928년 11월 13일 압수 문건, 早稻田大學 마이크로필름실 소장). |
569) | <再び捕縛された朝鮮共産黨員に對する大衆的釋放運動を起こせ!!>(≪赤旗≫3, 1928년 3월). |
570) | ≪대중신문≫, 1928년 4월 1일(朴慶植 編,≪朝鮮問題資料叢書≫5), 388쪽. |
571) | <재류조선인운동상황>(朴慶植 編,≪在日朝鮮人關係資料集成≫2-1, 1930), 137쪽. |
572) | <조선청년총동맹 재일본조선청년동맹 대판지부 東南반 반보>1(내무성 1928년 8월 15일 압수문건, 早稻田大學 마이크로필름실 소장). |
573) | ≪중외일보≫, 1927년 7월 20일. |
574) | <1929年の共産主義運動>(金正明 編,≪朝鮮獨立運動≫4), 38∼39쪽. |
575) | ≪동아일보≫, 1927년 9월 22·24일. |
576)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별집3, 85∼86쪽. |
577) | ≪대중신문≫, 1928년 4월 1일. ≪동아일보≫, 1928년 4월 14일. |
578) | 早稻田大學 마이크로필름실 소장. |
579) | 정혜경, 앞의 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