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연길현
연길현 최초의 시위운동은 3월 13일 용정에서 시작되었다. 시위운동 장소인 용정 서전대야에는 수많은 한인들이 멀리서는 200리부터 70, 80리 밖에서 전날부터 출발하여 모여들었다. 용정의 800호 한인들은 집집마다 문앞에 태극기를 내걸었다. 12개 한인학교 학생들은 교사들의 인솔하에 대열을 지어 사방에서 참가하였다. 총독부 부설 학교에서도 온갖 장애를 무릅쓰고 식장으로 모여들었다. 상해판≪독립신문≫은 이날 모인 亡國의 한인이 3만 명을 헤아렸다고 하였다.645)
천주교 성당의 정오 타종을 신호로 큰 태극기와 “정의인도”·“대한독립”이라고 써 걸은 五杖旗를 중심으로 둥글게 서서 부회장 배형식 목사의 개회선언에 이어 대회장 김영학이<독립선언포고문>을 낭독하였다.
<독립선언포고문>
아 조선민족은 민족의 독립을 선언하노라. 민족의 자유를 선언하노라. 민족의 정의를 선언하노라. 우리는 4천년 역사를 가진 나라요, 2,000만 신성한 민족이었노라. 그런데 우리 역사를 澌滅하고, 우리민족을 타파하여 羈絆 밑에 신음하게 하며 농락 중에 고통케 함이 어언 16개 성상을 閱歷하였다. 이는 强隣의 무정이라 할 수도 없고 학정이라 할 수도 없으며, 침략주의적 묵은 옛시대의 사용방법이었고, 萎靡 자축적 少弱人生의 自然禍源이라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허물하리오. 그러나 지사의 눈물은 동해에 보탰었고, 愚民의 원한은 창천에 사무쳤다. 天聽으로 향하고, 天視는 民視로 향하야 世運이 일변하고 人道가 새로워지는 때에 정의의 曉鐘은 큰 거리에서 떨쳐울리고 자유의 배는 앞마루에 두둥실 떠오르는도다. 강국의 비행기와 잠수함은 洋海에 침몰하고 약자의 높이 날린 義旗는 춘풍에 나부끼는도다.
우리는 역시 天民의 하나요, 약자의 하나이다. 이제 천명을 承順하고 인심을 合應하여 二千萬衆의 한 입으로 일제히 자유의 노래를 부르며 두 손을 곧게 잡고 평등의 큰 길로 전진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저 동양문명의 수뇌가 되고 동양평화에 아성이 되는 선진의 나라는 현세의 변천을 회고하여 猛省改悟할지며 우리들의 성의를 양찰하여 黙認特許하리로다. 이에 우리의 首府인 서울에서 독립기를 먼저 들매 사방이 파도같이 움직여 반도 강산은 초목금수가 모두 향응하여 轟鳴하니 우리 간도 거류 80만 민족도 혈맥을 멀리 이어받아 聲氣를 서로 통하여 皇天의 부르심에 감동하여 흔연히 인류의 계급에 동등하는 바이다.
<공약 3장>
1. 오인의 이 거사는 正義·人道·生存·尊榮을 위한 민족적 요구인 즉 배타적 감정으로 광분치 말라.
2.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1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발표하라.
3. 일체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히 하여 오인의 주장과 태도로 하여금 어디까지든지 公明正大케 하라.
조선건국 4252년 3월 13일
간도거류조선민족 일동
이 포고문은 이역에 나와 조국의 운명에 대해 느끼는 슬픔과 회오를 바탕에 깔고 서울의 독립선언에 호응하여 독립에의 비장한 각오를 밝혔다. 이 포고문의 공약 3장을 보면 서울 선언문의 영향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포고문 낭독이 끝나자 조선독립만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유예균·배형식·황지영 등 3인의 비분강개한 연설은 군중들을 더욱 격려하였다. 이에 시가행진에 돌입하여 대형 태극기를 선두로 대열을 지어 시가지로 향하였다. 대열이 오층대 앞을 지날 때 중국 무장 육군대가 시위대를 향하여 발포를 시작하여 현장에서 13명이 목숨을 잃고, 중상자가 30명이 넘었다. 중상자 중에 나중에 목숨을 잃은 사람이 6명 추가되어 사망자는 모두 19명이 되었다. 3월 17일 사망자들을 위한 장례식이 캐나다 선교사 민산해가 하는 제창병원에서 4,000여 명이 애도하는 가운데 엄수되어 허청리에 안장되었다. 한편 이날의 중국군의 발포는 일본 군대가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빌미로 간도로 침입할 것을 우려하여 시위운동을 저지하고자 한 것으로 보고 있다.
3월 13일 용정시위가 있던 날, 용정에서 40리 거리에 있는 연길현 내 二道溝에서도 700여 명의 한인과 중국인들이 모여 독립축하회를 열었다. 15일 志仁社 8도구에서 200명이, 16일 頭道溝에서는 약 2,000명의 동포들이 독립선언식을 개최하고 6명의 연사들의 강연을 들었으며 군중들이 만세를 높이 부르고 해산하였다. 17일에는 守信社 이도구 시장에서 약 4,000명의 동포들이 모여 독립만세를 불렀다. 20일에는 용두산에서 500명이, 中南溝에서 400명이, 23일에는 守山里에서 1,200명이, 24일에는 이도구에서 800명이, 26일에는 局子街에서 具春善의 지도로 명동·정동학교 학생들과 기독교 신자들을 포함하여 2,000명이, 27일에는 수신사 九沙坪에서 훈춘 이남의 각지 학교 교사와 학생 및 거류 동포 4,000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29일에는 馬牌市에서 2,000명의 시위가 있었고, 4월 4일 樺田子에서 1,500명, 5일 三道溝에서 300명이 모여 독립선언축하식을 거행하였다. 6일에는 평강상리사에서 70명이, 12일에는 용정촌에서 명동 예수교학교 직원과 학생, 영신학교 학생 등 200명이 장날을 기해 시위운동을 계획하였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되었다.
645) | 사방자,<북간도 그 과거와 현재>(≪독립신문≫, 1920년 1월 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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