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훈춘현
훈춘에서는 용정 시위운동 1주일 후에 일어났다. 3월 20일 아침 6시 반 경부터 한인 집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하고, 상가는 모두 철시하였다. 오전 8시 경 훈춘시가 東大人溝에는 인근 지역에서 350명의 한인들이 모여 대한독립만세의 오장기를 세우고 주악에 맞추어 태극기를 들고 행진해 왔다. 국한문으로 된<독립선언서>가 거리에 뿌려졌다. 중국 군경의 삼엄한 경계는 있으되 용정에서와 같은 무단적 저지는 없었다. 각지에서 온 군중이 더하여져 3,000명이 원형으로 대열을 이룬 가운데 독립축하회가 시작되었다. 대회장 황병길이 “이번 강화회의는 단서도 없이 한국독립의 기회를 주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차제에 일치단결하여 강적의 銃火 앞에 空拳으로 서게 되어도 신명을 아끼지 않고 다년의 소지를 관철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646)고 했다.
회중은 모자를 벗어 손을 높이 올려 만세를 불렀다. 盧宗煥·崔東文·金貞奎 등의 연설이 이어진 후 식은 끝났다. 일동은 다시 동문으로 행진을 하였다. 훈춘강변에 이르러 다시 원형진을 만들고 학생들은 주악을 울렸으며, 군중을 만세를 높이 불렀다. 오후 1시 경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이들 중 500명은 장총으로, 200명은 권총으로 무장을 하였다. 그들은 일본영사관으로 가서 일본기를 끌어내렸다.647) 이곳의 시위운동은 이후 22일까지 계속되었으며, 은성과 종성에서 왔던 인사들은 훈춘시위에 참여하고 돌아가 그곳의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648)
3월 30일 황병길은 훈춘현 漢德子에서 독립운동에 관한 열변을 토하고 만세를 고창한 후 4월 1일 훈춘 북쪽 150리에 있는 塔道溝에서 2,000명이 모인 가운데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3일 煙筒拉子 부근에서는 한인으로서 러시아군인으로 활약하는 청년 200여 명이 총기를 휴대하고 무장시위를 하였다.
훈춘시위 이후 시위대들은 각지로 흩어져 만세시위보다는 결사대를 모집하는 등 무장투쟁 준비에 착수하였다. 황병길은 국내진공대원 1,500명을 선발하고 그 중에서 150명을 뽑아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훈춘현의 대한국민의회는 매호당 무기 1정씩 준비하게 하고 두만강 건너 경원·온성·종성·무산·나남 등지를 진격하기로 하였다. 4월 23일 훈춘 황구 북일학교에서 시위운동이 일어나 염탐하던 영사관 출장소 한인 순사 한 명을 붙잡아 구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