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노인동맹단
한편 3월 26일에는 블라디보스톡에서 老人同盟團의 발단식이 있었다. 金致寶의 집에서 조직된 이 노인동맹단은 한국독립을 목적으로 재외한인 65세 이상의 노인을 모두 결속하려는 데 있었다.679) 이들은 이날 밤 김치보 집에서 창단식을 갖고 다음과 같이 역원을 선출하였다.680)
단장 金致寶, 총무 金舜若, 의장 李逸, 의원 李崙·朴凞平·韓承羽·李得萬·尹余玉·周干漸·姜錫基·徐相矩·鄭致允·李逸·朴大同(11명), 서기 徐相矩.
이 당시 약 320여 명을 단원으로 모집하였는데, 계속해서 왕성하게 단원을 모집 중이며, 남자보다도 오히려 여자들이 더 열심이어서 지방으로까지 다니며 단원을 모집하고 있었다. 노인동맹단은 대표자 6명을 조선총독부에 파견할 것과 결사대를 모집하여 국내로 들여보낼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으며, 이 밖에 단원 150명을 국내로 파견하여 3·1운동을 확산할 계획도 하였다.681) 이 노인동맹단은 점차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노인동맹단은 傳團委員을 두어 이들을 각 지방에 파견하여 단원모집에 힘썼다. 전단위원들은 발기인을 7인으로 하고, 입회금도 7루불씩 하였으며, 연령도 46세 이상 70세까지로 하여 총 7,000명의 회원을 모집하려 하였다.682)
5월 5일 노인동맹단은 李承喬 등 대표 7명을 선정하여 국내로 파견하였다.683) 이들 대표들은 일본에 보내는 문서 2통과 취지서 수백 매, 여비 1만 루불을 지참하고 출발, 5월 31일 서울에 도착하여684) 그날 오전 11시 경 종로 보신각 앞에서 민중들에게 연설을 한 후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체포되었다. 이때 李發은 “義로써 치욕을 당하지 않겠다”며 칼로 스스로 목을 찔렀으나 일경이 그를 대한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았다. 이승교와 정치윤은 너무 노쇠하여 露領으로 추방당하였으며,685) 안태순은 징역 1년, 윤여옥은 징역 10월, 차대유는 징역 8월을 선고받았다.686)
6월 25일 노인동맹단은 姜文伯·延秉佑를 대표로 블라디보스톡 주재 일본 총영사관에 보내<在露領大韓國民老人同盟團謹瀝血禱衷干>이라는 독립요구서를 제출하였다.687) 1918년 8월 노인동맹단은 다시 강우규를 서울로 파견하였다. 강우규는 7월 8일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하여 원산에서 약 1개월 체류하다가 8월 8∼9일 경 서울로 들어와 9월 2일 서울역 앞에서 신임총독 사이토에게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688)
679) | 위와 같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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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0) | 在浦潮斯德總領事 菊池義郞,<鮮人의 行動에 關한 件, 1919년 4월 1일>(≪東西比利亞≫7), 59∼60쪽. |
681) | 在浦潮斯德總領事 菊池義郞,<鮮人의 行動에 關한 件, 1919년 4월 1일>(≪東西比利亞≫7), 59∼62쪽. |
682) | <獨立運動에 關한 件>, 騷密 제209호(1919년 4월 17일)(國會圖書館,≪韓國民族運動史料≫3·1운동편 其3, 1979), 280쪽. |
683) | 姜德相,≪現代史資料≫26, 121∼122쪽. |
684)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9, 348쪽. |
685) | 朴殷植,≪韓國獨立運動之血史≫하, 53쪽. 金正明,≪朝鮮獨立運動≫제1권 分冊(原書房, 1967), 116∼117쪽. |
686)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5, 252∼253쪽. |
687) | 姜德相,≪現代史資料≫ 26, 222쪽. |
688) | 金正明, 앞의 책, 115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