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경성독립단본부’와 신한민국정부
국민대회 당일 서울 종로 일대에 배포된 문건은<임시정부선포문>·<국민대회취지서>·<선포문>의 3종이었다.209) 앞의 두 문건은 국민대회 추진세력이 배포한 것이고<임시정부선포문>은 ‘조선민족대회’의 명의로 배포된 것으로<임시정부령>제1호와 제2호가 附記되었다. 문건을 작성하고 배포한 주체가 서로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임시정부선포문>이 어떤 경위로 국민대회 당일 한성정부 문건들과 함께 배포되었을까. 여기서 이 문건이 1919년 4월 15일 경 평안북도 철산·선천·의주 일대에 살포된 ‘신한민국정부’의 선포문건과 함께 배포되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신한민국정부 관계 선포문건으로는<신한민국정부 선언서>,<각원명단>,<경제적 공약>,<약법>(미 발견) 등이 있는데,210) 이 중 각원명단은 다음과 같다.
집정관 李東輝, 국무총리 李承晩, 내무부장 (미정) 차장 曺成煥, 외무부장 朴容萬, 차장 金奎植, 재정부장 李始榮, 차장 李春塾, 교통부장 文昌範, 차장 李喜儆, 노동부장 安昌浩, 차장 閔瓚鎬.
이들 신한민국정부의 문건이 4월 23일 국민대회에서 한성정부의 문건을 배포할 때 학생조직에게 전해지고 있음은 흥미롭다. 국민대회 사건으로 체포된 이춘균에 대한 공판에서 검사는 1919년 3월 30일 경 학생조직의 리더인 김유인의 지시에 따라 ‘임시정부에 관한 불온문서’을 수령하러 갔었는지를 추궁했다.211)
이춘균은 혐의를 부인했지만 신의주를 갔었던 것은 사실이고 또 국민대회 당일 시위투쟁의 한 당사자인 장채극이<임시정부선포문>을 이춘균에게서 받아 김유인에게 주었다고 진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검사의 추궁은 어느 정도 사실관계를 반영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가 이를 부인한 것은 의주에서 자신이 가져온 문건 가운데 국민대회 당일 배포되지 않은 문건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바로 신한민국정부의<각원 명단>과<7개조의 약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김유인이 이춘균으로부터 받은 문건 속에는 국민대회 당일 배포된<임시정부선포문>외에도 신한민국정부의<각원명단>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전자만 배포하고 후자는 배포하지 않았다. 배포한 문건도 이춘균이 장채극에게 준 것을 김유인이 받아 바로 인쇄한 것이 아니라 시기를 기다려 국민대회 당일에 임박해서야 인쇄,212) 한성정부의 문건과 함께 배포했던 것이다. 이들이 임시정부의 각원명단을 배포하지 않은 것은 한성정부 추진세력과 신한민국정부 추진세력 사이의 협상이 결렬되었기 때문이었다.213)
국민대회 당일 한성정부 선포문건과 별도의<임시정부선포문>을 배포한 주체가 신한민국정부 수립을 주도한 세력과 동일하다는 사실은 이들이 단순한 전단정부가 아님을 확인해 주고 있다. 이들은 누구이고, 이들이 국민대회에 개입하는 경위는 어떠한가.
(1919년) 4월 8일 임시관제를 발포하다.
동일 경성독립단본부 姜大鉉은 이동휘를 집정관으로 한 각원명부 및 임시정부헌법 초안을 휴대하고 상해에 도착하다(外務省警察史 支那之部,≪朝鮮民族運動史(未定稿)≫제1권, 고려서림 영인본, 1989, 87쪽;國史編纂委員會,≪韓國獨立運動史 資料4:臨政編Ⅳ≫, 1968, 207∼208쪽;桂奉瑀,≪朝鮮歷史≫卷之三 원고본, 1952, 67∼68쪽).
이 기사는 서울에 이승만을 ‘집정관총재’로 한 한성정부가 아닌 이동휘를 집정관으로 하는 다른 정부가 이미 조직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앞서 본대로 3·1운동 뒤 국내에서 선포된 임시정부 가운데 신한민국정부만이 이동휘를 집정관으로 한 정부였다. 따라서 姜大鉉이 상해로 가져왔다는<각원명단>과 <헌법초안>은 신한민국정부의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서 문제는 강대현이 상해로 가져왔다는<각원명단>이 신한민국정부와 동일한지의 여부이다.
獨立新報 號外 기원 4252년 4월 10일
京城電, 昨日 下午 10시에 來한 特電을 據한즉 경성셔 우리 臨時政府가 如左히 組織되얏다더라.
집정관 李東輝, 총리 李承晩, 내무총장 安昌浩, 차장 曺成煥, 외무총장 朴容萬, 차장 金奎植, 재무총장 李始榮, 차장 李春塾, 교통총장 文昌範〔차장 玄楯〕(≪獨立新報≫제9호, 1919년 4월 10일, 號外;日本外務省史料館,≪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ノ部新聞雜誌≫, 국사편찬위원회 마이크로필름, 분류번호 4門-3類-2項-2-1-1).
강대현이 상해로 가져온<각원명단>이 이것과 동일하다는 사실은 1919년 4월 11일 상해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이루어진 각원 선출과정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獨立新報≫호외에 실린 이 각원명단은 4월 22일 북간도에서 발행된≪우리들의 편지≫(제12호)에도 全文이 게재되었다.214)
문제는 경성독립단본부가 왜 4월 23일의 국민대회가 있기도 전에 서둘러 정부가 수립된 사실과 각원의 명단을 공표했는가 하는 점이다. 이것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한민국정부의 각원명단과 이것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강대현이 소지한 경성독립단본부案과 신한민국정부안이 다른 점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신한민국정부의 내무부장이 공석인 반면 경성독립단본부안은 ‘내무총장’이 안창호로 되어 있다. 둘째 신한민국정부에서 교통차장은 이희경인데 경성독립단본부안은 현순으로 되어 있다. 셋째 신한민국정부는 노동부장에 안창호, 차장에 민찬호인데 경성독립단본부안에는 노동부가 없고 신한민국정부의 노동부장 안창호는 경성독립단본부안에 내무총장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강대현이 가져온 경성독립단본부의<각원명단>은 신한민국정부안을 토대로 만든 것으로 판단된다. 신한민국정부에 공석인 내무부장은 후자에 안창호로 補任되고 있으므로 안창호가 부장으로 되어있는 신한민국정부의 노동부는 직제 자체가 폐지된 것이다. 남은 문제는 신한민국정부의 교통차장 이희경이 여기서는 현순으로 바뀌어 있다는 점과 신한민국정부 각원의 직명이 ‘부장’과 ‘총장’으로 다르다는 사실이다.
전자와 관련하여 이춘숙의 행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신한민국정부와 강대현이 상해로 가져온<각원명단>에 공통적으로 재무(재정)차장에 올라 있다. 더욱이 각원명단의 인물중 국내에 있었던 인물은 이춘숙 밖에 없었다. 그는 국민대회 직전까지 서울에서 임시정부 수립운동에 참여하고 한성정부 조직을 주도한 이규갑·홍면희·한남수 등에 한발 앞서 상해로 건너간 뒤215) 임시의정원의 성립에도 관여했다. 이 점은 신한민국정부와 경성독립단본부 명의의 수립주체가 동일하다는 하나의 증거가 된다.
그의 활동은 文昌範·尹海 등 노령지역 민족운동 세력과도 연계되었다. 이춘숙은 이들과의 약속에 따라 국내에 들어와 일본유학생 출신들과 접촉하였고, 洪濤를 표면에 내세워 활동했다.216) 홍도는 국내에서 이봉수와 접촉했다. 이봉수는 함남 홍원 출신으로 명치대학 상과에 재학중이었고 홍도와는 명치대학의 선후배 사이였다.217) 이봉수는 상해와 국내를 오가며 독립임시사무소와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이들은 신숙을 통해 국민대회 쪽과 통합을 시도했다.218)
홍도와 이봉수 등은 신한민국정부案을 토대로 홍면희·이규갑 등 국민대회측과 통합, 이를 선포한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교섭 과정에서 이들은 국민대회의 배후에 현순이 있음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결국 교통차장이 이희경에서 현순으로 바뀐 것은 국민대회쪽을 의식한 결과였다. 각원 명칭에서 ‘부장’이 ‘총장’으로 바뀐 것도 한성정부와 타협의 소산이었다.
그러나 통합 협상은 국민대회 개최일자에 대한 이견으로 결렬되었다. 한성정부 추진세력은 4월 8일 경에 열 것을 주장한 반면, 홍도는 그 이후를 고집했다.219) 홍도의 주장은≪독립신보≫호외의 보도일자(1919. 4. 9), 혹은 강대현의 상해 도착일자(1919. 4. 8)와 관련하여 주목을 끈다.
이봉수의 행적도 주목된다. 독립임시사무소의 대변인을 자임했던 이광수는 3·1운동 지도자들이 남겨놓은 의사를 확인하기 위해 이봉수를 서울에 파견했다. 이봉수는 홍도와 국민대회와의 접촉 직전에 상해로 돌아와 자신은 ‘경성독립단본부’의 파견으로 “가정부를 조직하라”는 사명을 띠고 상해에 온 것이라고 했다. 이에 독립임시사무소에서는 이봉수에게 “ⓛ (경성독립단) 본부로서 (임시정부를) 조직함이 가한 것과 ② 파리대표에게 신임이 긴급함과 ③ 국민통일 관계로 정부를 속히 조직하여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이봉수를 다시 서울로 보냈다.220)
그가 다시 서울에 도착한 것은 4월 3일의 협상이 결렬된 직후였다. 협상이 결렬되었음을 확인한 홍도와 이봉수는 4월 8일 이전에 모종의 조치를 취해야 했다. 홍면희·한남수 등이 국민대회를 4월 8일 전후로 계획해 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강대현이 ‘경성독립단본부’의 임시정부<각원명단>과<헌법초안>을 가지고 서둘러 한성정부측보다 먼저 상해로 건너간 것이다. 강대현은 4월 8일에 상해에 도착할 수 있었다.
209) | <獨立運動에 關한 不穩文書 發見의 件>, 1919년 4월 24일, 騷密第783號(국회도서관,≪韓國民族運動史料≫三一運動篇 其三), 323쪽. |
---|---|
210) | 姜德相 編,≪現代史資料≫26:三一運動編二(みすず書房, 1972), 70쪽. 金正明 編,≪朝鮮獨立運動≫Ⅱ:民族主義運動編(原書房, 1967), 22쪽. |
211) | <公判始末書>4 (國史編纂委員會 編,≪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19), 23쪽. |
212) | <覆審公判 公判始末書>, 59쪽. |
213) | <公判始末書>5(國史編纂委員會 編,≪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19), 34쪽. 申肅, 앞의 책, 50쪽. |
214) | 姜德相 編,≪現代史資料≫27, 朝鮮三:獨立運動一(みすず書房, 1970), 51∼52쪽. 李智澤,<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第28話:北間島 21>(≪中央日報≫, 1972년 11월 4일). |
215) | 李炳憲, 앞의 책, 1,016쪽. 金東成,<祖國光復에 바친 一生-晩悟 洪震先生의 16周忌를 마치고->(≪京鄕新聞≫, 1962년 9월 27일). |
216) | 洪濤는 洪震義의 가명이며 洪鎭義로도 쓴다. 1894년 함경도 함흥 태생으로 명치대학을 졸업했다(<在外鮮人新運動團體と其中心人物>1927年 5月條〔未定稿〕,≪齋藤實文書≫10:民族運動二, 고려서림 영인본, 281쪽). |
217) | <本年度卒業生一覽>(≪學之光≫17, 1919), 81쪽. <在日京 우리 留學生界의 消息>(≪學之光≫20, 1920), 62쪽. |
218) | 申肅, 앞의 책, 39·48쪽. |
219) | <公判始末書>5(國史編纂委員會 編,≪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19), 34쪽. |
220) | 國史編纂委員會 編,≪韓國獨立運動史≫資料4:臨政篇Ⅳ, 2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