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근대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1. 임시정부의 수립과 초기 활동2) 임시정부의 수립과 통합(1) ‘국민대회’와 국내 정부수립운동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1. 문화정치의 실상
          • 1) 경찰기구의 강화
            • (1) 보통경찰제의 확립
            • (2) 신간부의 선정과 보통경찰의 기능
          • 2) 지방제도의 개편
            • (1) 동화정책하의 참정권 문제
            • (2) 지방제도의 개편과 자문기구의 설치
            • (3) 면제의 운영과 촌락정책의 실상
          • 3) 친일세력의 양성
            • (1) 친일과 협력이란 개념
            • (2) 친일파의 육성과 이용책
            • (3) 친일단체의 조직
        • 2. 수탈체제의 강화
          • 1) 총독부 산업정책의 전환
          • 2) 농업―산미증식계획
          • 3) 공업
            • (1) 식민지 공업구조의 형성
            • (2) ‘민족자본’과 조선인 자본
          • 4) 재정·금융
            • (1) 재정
            • (2) 금융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1. 임시정부의 수립과 초기 활동
          • 1) 임시정부 수립의 배경
            • (1) 세계대전의 종전과 민족자결주의
            • (2) 정부수립운동과<대동단결선언>
          • 2) 임시정부의 수립과 통합
            • (1) ‘국민대회’와 국내 정부수립운동
            • (2) 상해 임시정부의 성립
            • (3) ‘통합’ 임시정부의 출범
          • 3) 임시정부의 초기활동
            • (1) 외교·선전활동
            • (2) 국내조직과 활동
            • (3) 군사외교와 독립전쟁 준비
        • 2. 임시정부와 국민대표회의
          • 1) 국민대표회의 소집론과 ‘정부옹호파’의 반대운동
            • (1) 국민대표회의 소집배경과 참가세력
            • (2) 정부옹호파의 국민대표회 반대운동
            • (3) 제10회 임시의정원
          • 2) 국민대표회의의 전개 과정
            • (1) ‘비공식회의’와 제11회 임시의정원
            • (2) ‘삼방회의’와 국민대표회의의 결렬
          • 3) 국민대표회의에서의 쟁점
            • (1) 국민대표회의의 적법·부적법 문제
            • (2) ‘임정존폐’ 문제와 ‘임정법통론’
        • 3. 임시정부와 유일당운동
          • 1) 유일당운동의 배경과 계기
          • 2) 유일당운동의 추진과 임시정부의 개헌
            • (1) 임시정부 중심의 대당결성 주장
            • (2)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 결성
            • (3) 임시정부 개헌과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 결성
            • (4) 의열단의 선언과 광동·무한·남경촉성회 결성
          • 3) 유일당운동의 발전과 임시정부 참여
            • (1)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의 결성
            • (2) 전위조직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의 성립
          • 4) 유일당운동의 중단과 임시정부의 여당 결성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1. 독립군의 편성과 국내진입작전
          • 1) 시대적 배경
          • 2) 독립군의 편성
            • (1) 북간도지역
            • (2) 서간도지역
          • 3) 국내진입작전의 전개
            • (1) 독립군의 전력강화
            • (2) 국내진입작전
        • 2. 봉오동승첩과 청산리대첩
          • 1) 봉오동승첩
            • (1) 삼둔자전투
            • (2) 봉오동승첩
          • 2) 청산리대첩
            • (1) 일본군의 간도 침공
            • (2) 독립군의 근거지 이동
            • (3) 독립군의 전투준비
            • (4) 청산리대첩
            • (5) 청산리대첩의 전과와 의의
        • 3. 경신참변과 자유시사변
          • 1) 독립군의 북정
          • 2) 경신참변
          • 3) 자유시사변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1. 통의부의 결성과 활동
          • 1) 통군부의 성립과 남만한족통일회의
          • 2) 통의부의 결성과 활동
        • 2. 3부의 성립과 활동
          • 1) 참의부의 성립과 활동
          • 2) 정의부의 성립과 활동
          • 3) 신민부의 성립과 활동
        • 3. 재만 독립운동단체의 민족유일당운동
          • 1) 민족통일전선운동의 대두
          • 2) 3부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1. 의열투쟁의 의미맥락
        • 2. 의열투쟁 본격화의 배경과 계기
        • 3. 3·1운동 직후와 1920년대의 의열투쟁
          • 1) 3·1운동 직후와 1920년의 의열투쟁
          • 2) 1921년 이후의 의열투쟁 양상과 추이
            • (1) 의열단의 국내외 투쟁
            • (2) 재만 독립군의 국내외 의열투쟁
            • (3) 병인의용대의 의열투쟁
            • (4) 개인 단독의거의 흐름과 사례들
        • 4. 1930년대와 일제말의 의열투쟁
          • 1) 한인애국단의 의열투쟁
            • (1) 이봉창의 동경의거
            • (2) 상해거사의 추진과 윤봉길 의거
            • (3) 국내·만주거사 계획의 추진
          • 2) 재중국 아나키스트들의 의열투쟁
          • 3) 한국혁명당총동맹과 남자현의 의열투쟁
          • 4) 상해와 북경에서의 밀정·친일배 처단 활동
          • 5) 한국독립당과 민족혁명당의 의열투쟁
          • 6) 국내 의열투쟁의 불연속성과 지구성
        • 5. 일제 강점기 의열투쟁의 특징과 역사적 의의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2) 임시정부의 수립과 통합

(1) ‘국민대회’와 국내 정부수립운동
가. ‘국민대회’와 한성정부의 선포

 3·1운동 뒤 국내에서 전개된 임시정부 수립운동은 향후 민족운동을 이끌어 갈 영도기관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민족 구성원의 합의라는 절차가 중시되었다. 이런 점에서 국민대회는 합의의 절차로 간주되었다. 즉 국민대회가 갖추어야 할 요건은 국내를 기초로 13도 ‘국민대표’로 조직되어야 하며, 임시정부의 정치형태는 민주공화정이어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188)

 국민대회를 통해 임시정부를 수립하려는 계획은 3월초부터 李奎甲·洪冕禧(洪震)·韓南洙·金思國 등에 의해 비밀리에 추진되었다. 여기에는 申泰鍊(申肅)·安商悳 등 천도교 측의 인물들도 개입하고 있었다.189)

 이들은 ‘비밀독립운동본부’를 조직하고 임시정부 수립과 국민대회 개최를 위한 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3월 17일에는 현직검사 韓聖五의 집에서 준비위원 회의를 개최하여 “13도 대표자회의를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열고,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이를 국민에게 공포할 것”을 결의했다. 회합에는 위의 4명 외에도 이교헌·윤이병·윤용주·최전구·이용규·김규·이민태·閔橿 등 준비위원 거의 전원이 참석해<국민대회 취지서>와<임시정부 약법>등을 작성하고 임시정부 각원, 평정관, 파리강화회의에 출석할 국민대표 명단을 확정했다.190)

 그러나 인천 만국공원에서 열린 13도 대표자회의는 성원 미달로 국민대회를 준비하는 회합에 머물렀다. 여기서 참석자들은 “국민대회를 조직하고 假政府를 만들어 파리강화회의 및 각국에 조선독립의 승인을 요구할 것”을 결정했다.191)

 국민대회의 실행은 김사국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한남수와 홍면희·이규갑 등이 해외와의 연락을 위해 상해로 망명했기 때문이다. 김사국은 이미 3월 중순께 보성전문학교 졸업생인 朱翼의 소개로 明治大에 재학중인 金裕寅을 만나면서 張彩極·金鴻植·全玉玦·李鐵·崔上德 등을 끌어들였다.192) 김사국·김유인·玄錫七·민강 등 국민대회 지도부는 4월 23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제반 준비를 진행했다. 현석칠과 민강은<국민대회 취지서>·<결의문>·<약법>·<선포문>등을 인쇄하기 위해 서소문동 李敏洪 집 홍제당에서 목판을 새겨 6천장을 인쇄했다.

 이들의 계획은 4월 23일 정오에 서린동 춘추관에서 국내 13도 대표자가 모여 임시정부를 선포하고 노동자를 동원, 종로 보신각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시위를 벌이고 문서를 배포한다는 것이었다.

 당일 종로 일대에서는 이들 주도로 ‘國民大會’와 ‘共和萬歲’의 깃발 아래 만세시위가 벌어졌고 한성정부의 수립이 선포되었다.193)

4월 23일 낮 12시 10분 종로 보신각 부근에서 4∼5명의 학생 같은 자가 3本의 小旗를 흔들고 만세를 부르면서 질주하여 종로서 방면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곧 추적하였는데 소기를 종로통에 버리고 관철동 소로로 도망하여 드디어 소재가 불명되었는데 24일 이 5명 중 2명은 체포했다. 소기는 목면제이며 2本에는 國民大會라고 쓰고 1本에는 共和萬歲라고 묵서한 것이다. 4월 23일 경성에서<임시정부선포문>·<국민대회취지서>·<선포문>이라는 불온인쇄물을 발견하였다. 전항 1부의 행동은 이 선포에 관계가 있는 것으로 관찰되어 목하 신문중이나 … (≪韓國民族運動史料≫三一運動篇 其三, 국회도서관, 1979, 323쪽).

 현장에서 주동자가 체포된 데 이어 5월 초에는 지도부를 포함하여 십수 명이 검속되었고, 8월 30일 예심 개정 전까지 모두 28명이 검거되었다. 이 사건으로 검거된 사람은 270여 명에 달했다.194)

 주목되는 것은 검거가 계속되는 와중에서도 임시정부 수립을 알리는 만세시위와 전단의 살포가 계속되었다는 점이다. 4월 23일의 국민대회가 원만하게 진행되지 못했다고 판단한 김유인·장채극 등은 풍선을 이용한 대규모 전단 살포를 계획, 준비하던 중 장채극 등이 체포되었고 5월 7일 서울 일원에서는 국민대회 당일보다 확대된 규모의 집회가 다시 시도되었다.195)

 한성정부의 조직 소식은 국민대회 이전에 중국 신문에 보도되었다.≪天津大公報≫(4월 11일자)와≪上海時報≫(4월 16일자)는 한성정부의 조직과 각료 명단을 보도했다.196) 뿐만 아니라 한성정부의 성립은 국민대회 직후 尹致昊 등 기독교 세력과 국내 민족운동세력에게 알려지고 서울발 연합통신의 電文에 의해 미국 등 해외 한인사회에까지 전파되었다.197)

 그런데 국민대회를 통한 임시정부 수립운동이 ‘민족대표 33인’이 상해에 파견한 대표와의 연락 속에서 태동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김사국의 공판기록에 따르면 이규갑은 상해에 파견된 현순에게서 편지를 받고 3월 중순 경 이것을 한남수와 자신을 설득하여 국민대회의 준비에 착수했다는 것이다.198) 玄楯의 막후 역할에 대해서는 윤치호도 동일한 견해를 피력한 적이 있다.199)

 현순이 3·1운동 계획에 처음 참여한 것은 1919년 2월 17·8일 무렵 세브란스병원 구내의 이갑성 방에서 열린 회합에서였다. 이 자리에는 이승훈·함태영·안세환·이갑성·박희도 등이 참여했다. 참석자들은 독립을 선언하고 천도교와 공동으로 일본정부 및 조선총독부에 건의서를 보낼 것, 상해에 대표를 파견하여 열강에 독립을 청원하는 문서를 발송할 것 등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상해 파견대표로 현순이 선임되었다.200)

 그에게 부여된 임무는, 즉시 한국을 빠져나가 중국 奉天으로 가서 그곳에서 ‘한 독립운동가’를 만나 동행하는 것이었다. 현순은 봉천에서 崔昌植을 만나고 그와 동행하여 3월 1일 상해에 도착했다. 당일 이들은 미국인 선교사 피치(George A. Fitch)의 소개로 선우혁을 만나고 이튿날에는 申圭植·李光洙·金澈·신석우 등 신한청년당계 인사들을 만나 자신들이 “민족독립당(‘National Independence Party’)을 대표하여 연락·선전과 외교를 위해” 상해에 왔음을 밝혔다. 최창식은<독립선언서>를 소지했고 3·1운동 발발 소식이 연합통신을 통해 3월 4일자 중국신문에 보도되었다.201)

 이들은 상해 프랑스 조계지 내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했다. 현순은 총무로 뽑혀 상해주재 각국 공관에<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국내의 독립운동 상황을 현지 언론에 제공하면서 신한청년당이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한 김규식 및 미국의 이승만에게도 연락을 취했다.

 3월 초·중순 경 현순은 국내의 이규갑에게 편지를 보내 ‘모종의 계획’을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특별히 이규갑에게 편지를 보낸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1919년 1월 이규갑이 전도사로 시무하던 의주장로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했다는 기록이 있어 참고된다.202) 독립임시사무소의 이광수도 현순과는 별도로 3·1운동 지도자들이 남겨놓은 의사를 확인하기 위해 이봉수를 서울에 파견했다.203)

 3월 27일 밤 상해 프랑스 조계의 한 예배당에서 상해의 독립운동자들이 모인 가운데 ‘최고기관’을 조직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다. 다수의 참석자들이 최고기관의 수립을 서두를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현순은 “국내로부터 지시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며 이에 반대했다.

 이광수도 “독립선언을 하였으니 정부를 조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의 의사도 듣지 않고 우리가 여기에서 정부를 조직한다면 미국동포들도, 하와이동포들도, 노령에서도, 서북간도에서도 저마다 정부를 조직하게 될지도 모르니 이리되면 우리 독립운동이 분열될 염려가 있다. 그러므로 서울에 보낸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다”고204) 현순의 주장에 동조했다.

 이규갑은 현순의 편지를 받고 바로 동지 규합에 나섰다. 먼저 정부수립운동을 지휘할 ‘중앙대표’로 이규갑·신태련(신숙)·안상덕·권혁채·홍면희 등 5인이 선정되었다.205) 이들은 실행을 담당할 조직으로 ‘비밀독립운동본부’를 조직했다.

 이 무렵 상해로부터 임시정부 조직문제에 관해 “국내의 동의를 얻기 위해” 洪濤(洪鎭義)와 李鳳洙가 파견되었다.206) 이에 5인의 중앙대표는 신숙의 중재로 통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통합이 결렬되자 5인 중앙대표는 당시 조직중이던 대동단에 주목했다. 대동단은 3·1운동 중 조직되어 의친왕 이강을 상해로 망명시켜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 삼으려던 비밀결사였다. 그러나 이들은 정치사상과 노선의 차이로 국민대회와 조직적으로 결합하지 않고, 일부가 개인으로 참여하는 데 그쳤다.

 남은 문제는 정부형태와 각료의 인선이었다. 국민대회 지도부는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3월 16, 7일 경 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합에서 논란이 된 것은 정부형태였다. 기독교계 인사들은 공화정체를 주장했고 유림출신 인사들은 대한제국의 회복을 역설했다.207) 결국 정부수반과 각료 명칭 등 외형상으로는 후자로 했으나, 실제로는 약법을 통해 공화정체의 틀을 갖추었다.208)

 한성정부의 각원명단은 다음과 같다.

집정관총재 李承晩, 국무총리총재 李東輝, 내무부총장 李東寧, 외무부총장 朴容萬, 재무부총장 李始榮, 차장 韓南洙, 교통부총장 文昌範, 군무부총장 盧伯隣, 법무부총장 申圭植, 학무부총장 金奎植, 노동국총판 安昌浩, 참모부총장 柳東說, 차장 李世永(‘국민대회’ 명의의<宣布文>(≪우남 이승만문서≫4, 28∼29쪽).

188)≪朝鮮獨立新聞≫제2호(國史編纂委員會 編,≪韓國獨立運動史≫資料5:3·1運動編, 正音文化社, 1968), 2쪽.

李賢周,<3·1운동 직후 ‘國民大會’와 임시정부 수립운동>(≪한국근현대사연구≫6, 한울, 1997), 114쪽.
189)李奎甲,<漢城臨時政府 樹立의 顚末>(≪新東亞≫1969년 4월호, 동아일보사), 176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한남수·김사국에 대한 신문조서>(≪독립운동사자료집≫5:3·1운동재판기록, 1975), 78쪽.

申肅,≪나의 一生≫(日新社, 1963), 50쪽.
190)李奎甲, 위의 글, 176쪽.

<국민대회취지서>의 내용은≪이화장소장 우남 이승만문서≫4(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 1998), 26∼27쪽.
191)<한남수 및 안상덕 신문조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5), 138∼139쪽.
192)<김사국 예심조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5, 1975), 140쪽.
193)고정휴는 13도 대표자회회의와 국민대회 개최사실을 부인하고 있다(高珽烋,<세칭 한성정부의 조직주체와 선포경위에 대한 검토>,≪한국사연구≫97, 1997;<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성립과정에 대한 검토>,≪한국근현대사연구≫12, 2000 참조).
194)≪每日申報≫, 1920년 2월 2일.

≪獨立新聞≫, 1920년 2월 12일.

≪新韓民報≫, 1920년 4월 2일.
195)<京城覆審法院 公判始末書, 장채극 신문>(國史編纂委員會 編,≪韓國獨立運動史資料≫5), 61쪽.

<韓人이 端午節에 臨時政府組織布告文을 宣布코자 하는데 關한 電報>, 特第131號, 1919. 5. 9(국회도서관,≪韓國民族運動史料≫三一運動篇 其一, 1977), 177∼178쪽.
196)任椿洙,<1920-30년대 中國 新聞에 실린 韓國 關係記事 硏究>(≪國史館論叢≫90, 國史編纂委員會, 2000), 245쪽.
197)≪尹致昊日記≫7, 1919년 4월 26일.

≪新韓民報≫, 1919년 6월 12일.
198)<三一獨立示威關聯者公判始末書-5>(國史編纂委員會 編,≪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19:三一運動Ⅸ, 1994), 30쪽.
199)≪尹致昊日記≫7, 1919년 4월 26일.
200)<朴熙道先生取調書>(李炳憲 편,≪三一運動秘史≫), 434∼435쪽.
201)Soon Hyun(현순), MY AUTOBIOGRAPHY(나의 자서전), p.79.
202)Soon Hyun, ibid., p.77.
203)이광수,<나의 고백>(≪이광수전집≫7, 삼중당, 1970), 255∼257쪽.
204)이광수, 위의 글, 254쪽.
205)李炳憲, 앞의 책, 854쪽.
206)申肅, 앞의 책, 50쪽.
207)그러나 이들도 공화정체를 대세로 받아들였다(≪省齋遺稿≫, 省齋尹履炳先生遺蹟刊行協會, 1959, 14∼16쪽).
208)<약법>제1조 國體는 民主制를 採用함, 제2조 政體는 代議制를 채용함, 제3조 國是는 國民의 自由와 權利를 尊重하고 世界平和의 韋運을 增進케 함, 제4조 臨時政府는 左의 權限이 有함 ① 一切 內政 ② 一切 外政, 제5조 朝鮮國民은 左의 義務가 有함 ① 納稅 ② 兵役, 제6조 本 約法은 正式國會를 召集하여 憲法을 頒布하기까지 此를 適用함(≪이화장소장 우남이승만문서≫4, 1998, 29쪽).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