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독립전쟁 방침과 군사제도의 정비
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포했다. 통합정부는 승인·개조문제로 대한국민의회의 반발에 부딪쳤지만 이동휘가 국무총리로 취임하면서 그의 오랜 세력기반이며 1910년 이래 독립군의 근거지중 하나인 북간도와 길림지역 독립운동 단체의 지지를 얻게 되었다.
북간도 대한국민회는 1919년 11월 통합정부가 성립되자 “정부의 승인을 得”한 북간도의 통일기관임을 자처하며 북간도 선출 의정원 의원으로 계봉우와 유례균 2명을 상해에 파견했다.280) 북간도의 군정부도 1919년 12월 임시정부의 방침에 따라 군정서(북로군정서)로 명칭을 바꾸고 임시정부를 봉대한다는 뜻을 전했다. 노령에 주둔해 있던 대한독립군도 임시정부 지지를 선언했다. 서간도의 독립운동 단체들도 차례로 임시정부 지지의사를 표명했다. 3·1운동 직후 군정부로 통합된 서간도의 무장세력들은 군정서(서로군정서)로 개칭하고 임시정부 산하로 편입되었다.
1920년 1월 교민단에서 열린 신년회 축하자리에서 안창호는 ‘우리 민족이 斷定코 실행할 6대사’라는 연설을 통해 공식적으로 독립전쟁 방침을 선포했다. 그는 ‘6대사’로 군사·외교·교육·사법·재정·통일을 들고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군사로서 우리의 당면 대문제는 전쟁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임시정부의 기치하에 국민개병주의에 입각한 훈련을 실시하며 외교도 독립전쟁 준비에 최우선의 가치를 두어야 한다고 역설했다.281) 핵심은 당장의 독립전쟁보다는 이에 필요한 군사·무기·자금 등의 준비를 강조하는 ‘독립전쟁준비론’이었다.
임시정부의 독립전쟁 방침은 1920년 3월 2일 국무총리 이동휘가 임시의정원에서 밝힌 시정방침에서 구체화되었다. 그는 “독립운동의 최후 수단인 전쟁을 대대적으로 개시하여 규율적으로 진행하고 최후의 승리를 얻기까지 持久하기” 위해 정부가 실행할 14개항의 준비를 제시했다. 군사 경험이 풍부한 인재를 조사·소집하고, 노령과 중령 각지에 10만 명 이상의 의용병 편성을 위해 병사를 모집 훈련하며, 이미 성립한 군사기관을 조사하여 군무부에 예속케 할 軍士私團을 조사하고, 중·노령과 정부 소재지에 사관학교를 설립하며, 미국과 러시아 등 외국과 군수물자 수입을 교섭한다는 것이었다.282)
임시정부는 1919년 11월 5일<대한민국임시관제>를 공포하여 임시대통령 직할기관으로 대본영·참모부·군사참의회의 설치를 규정하고 비서·육군·해군·군사·군수·군법의 6국을 가진 군무부의 조직과 직무를 8조 29항으로 명문화하여 군사활동에 필요한 조직과 기능에 대한 성문화를 완료했다. 12월 18일에는 군무부령 제1호로<대한민국육군임시관제>를 발표하여 독립전쟁시 기본병력이 될 육군의 편성 및 관제에 대한 규정도 마련했다.283)
1920년 2월에는 노령과 중령지역 관할을 위해<대한민국육군임시군구제>가 마련되었다. 독립군 모집에 적용될 군구제는 서간도군구·북간도군구·강동군구(노령지역)로 나누고, 이곳의 사무는 임시지방사령관이 겸임하도록 하며, 독립군에 응할 중령과 노령거주 한인의 병역의무를 만 20세 이상 50세 이하의 남자로 규정했다.284)
이와 함께 임시정부는 1919년 12월 상해에서 초급장교 양성을 목적으로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했다.<임시육군무관학교조례>에 따르면 입학자격은 중등 이상의 학력이 있는 만 19세 이상 30세 이하의 남자로 제한했으며, 교장·부관·교관과 함께 교관이 겸직한 학도대장·학도대부관·학도대 중대장·학도대 구대장이 학생을 통솔하고 12개월의 교육기간을 거친 뒤 졸업생은 參尉에 임명하도록 했다.285) 이 무관학교는 1920년 5월과 12월 2회에 걸쳐 43명의 사관을 배출했다.
군사제도의 정비와 더불어<대한민국육군임시관제>에 따른 국민군 편성방침에 따라 각지에서 18세 이상의 남자를 대상으로 군적 등록사업이 진행되었다. 상해에서는 2월 중순 군적등록 사업을 專任받은 애국부인회가 사람들을 심방하여 군적등록을 권고했고, 군적은 갑과 을의 두 종류로 나누어 갑종은 매일 1시간 이상, 을종은 매주 2시간 이상 군사교련을 받도록 했다.286) 군적등록을 일차 완료한 상해에서는 1920년 3월 20일 국무총리 이동휘를 비롯한 각원들도 포함된 갑종 40명, 을종 백여 명을 대상으로 국민군 편성식을 거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