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재만독립군과의 관계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포함에 따라 임시정부와 서간도 독립군단체의 통일 및 연대노력이 구체화되었다. 윤기섭 등 95명은 1920년 2월 9일부터 4일간 ‘재만국민대회’를 열고 “세계가 우리에게 동정하고 우리 행동만 주목한다. 그런데 우리가 잠잠하고 있으면 외국이 독립을 승인려고 해도 할 수 없다. 하루라도 속히 開戰하기를 주장한다”고 하여 혈전개시를 광복사업의 대방침으로 채택했다.287) 이어 “적당한 기한 안에 혈전을 단행하되 血戰辦備의 책임은 본회와 당국(임시정부)이 공동 부담하며 임시정부를 옹호 지지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임시정부도 서간도와의 협의를 위해 1920년 5월말 경 조상섭을 파견했다. 그러나 서간도 쪽의 혈전방침과 안창호의 ‘준비론’이 접점을 찾지 못함으로써 양자의 공고한 연대는 실현되지 못했다. 서간도 쪽은 준비론을 비판하며 군사활동의 중요성과 이에 소요될 재정의 확보를 강조했으나 서로의 입장 차이만 드러낼 뿐이었다.288) 뒤에 서로군정서는 1921년 4월 북경에서 개최된 군사통일회의에 참여함으로써 임시정부를 반대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한족회와 서로군정서를 산하에 편입시키는 데 실패한 임시정부는 安東의 대한청년단연합회(‘연합회’로 줄임)와의 연대를 적극 모색했다. 연합회는 전부터 임시정부를 지지했고 안동 임시교통사무국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연합회는 임시정부의 지원하에 결사대적 군사기관으로 ‘의용단’을 조직할 계획이었다.289)
그런데 이 계획은 임시정부 군무차장 김희선과 안창호가 연합회 간부들과 논의하여 서간도의 독립단과 청년단이 연합하여 광복군을 조직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290) 이에 따라 1920년 7월 초 이탁을 사령관으로 하고 임시정부 군무부의 지휘 감독을 받는 군사기관으로 광복군총영이 안동에 설치되었다. 아울러 임시정부는 평안도와 황해도를 중심으로 비밀결사 의용단을 조직하고, 상해로 온 金錫璜을 설득하여 국내의 의용단도 광복군총영에 귀속하도록 했다. 결국 임시정부와 서간도 독립군단체와의 연대는 이 지역의 대표격인 한족회와 서로군정서를 끌어들이는 데 실패함으로써 부분적 성과를 얻는 데 그쳤다.
한편 임시정부와 북간도 독립군단체와의 연대는 극심하게 대립된 북간도 독립군 단체 사이의 통일문제와 맞물려 추진되었다. 북간도 독립군단체의 분열이 표면화한 것은 1919년 11월에 대한국민회가 임시정부가 승인한 북간도의 유일단체임을 내세워 북간도 최고기관임을 자처하면서부터였다. 이들은 회장 구춘선 명의로<告諭文>을 발표, 경쟁관계에 있던 군정부(북로군정서)를 배격할 것을 선언하고 자신들이 북간도의 최대 조직이자 최고기관임을 명시함으로써 이후 전개될 북간도 각 단체의 통일을 주도하고 정부를 대신하여 북간도 지역에 대한 군사 및 재정 등 제반 독립사업을 주도하고자 했다.291)
대한국민회의 이러한 행동은 특히 경쟁단체인 군정부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1920년 2월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은 국무총리 이동휘 앞으로 申請書를 보내 ‘無垢捏造’한 대한국민회의<고유문>을≪독립신문≫에 게재한 것을 비난하고 정부위원의 파견을 요청, 임시정부의 중재를 요청했다.292) 5월말 경 내분의 수습을 위해 임시정부는 안정근과 왕삼덕을 북간도에 파견했다.
임시정부 파견원의 중재와 협의 끝에 양대 조직은 1920년 7월 20일 통일안을 마련했다. 이에 따르면 “행정·군사 양 기관을 특설하고 행정기관은 대한민단, 군무기관은 東道軍政署 및 東道獨立軍署로 칭하기”로 했다. 즉 민단은 북간도 한인의 생명·재산의 보호와 민심의 지도, 대외교섭 사무 등 일체의 행정사무룰 통할하고, 조직으로 중앙과 동서남북부의 5부를 설치하며, 단장에 대한국민회 회장 구춘선, 부단장에 서상룡을 선출하고, 임시정부의 간도파견원 이용을 민단고문으로 하여 임시정부의 감독을 받도록 했다. 군무기관으로 북로군정서를 동도군정서로 개칭하여 署長에 서일, 사령관에 김좌진을 임명하여 4개 대대를 편성하며, 홍범도의 督軍部를 동도독립군서로 개칭하여 홍범도가 서장과 사령관을 겸임하고 안정근이 군무기관의 고문이 되어 임시정부의 명령을 받도록 했다.293)
북간도는 서간도와 달리 몇 차례의 회의와 정부 파견원의 중재로 임시정부 산하의 민사·군사 두 기관으로 통일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실제는 민사기관의 성격이 강한 대한국민회가 사실상 민단을 장악하고 군사기관도 단일기관이 아닌 홍범도 부대와 북로군정서의 존재를 사실상 인정함으로써 각 단체의 현실을 그대로 인정한 위에서 갈등을 임시로 봉합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이러한 성과마저 1920년 10월의 간도사변에서 임시정부가 무기력한 대응으로 일관함으로써 사실상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북간도의 주요 독립군 단체들도 견고한 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 막대한 타격을 입고 노령으로 이동했다. 이로써 임시정부는 국무총리 이동휘와 노동국총판 안창호의 사퇴와 각처에서 대대적 개편을 위한 국민대표회의 소집 요구에 직면했다.
<李賢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