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근대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2. 임시정부와 국민대표회의1) 국민대표회의 소집론과 ‘정부옹호파’의 반대운동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1. 문화정치의 실상
          • 1) 경찰기구의 강화
            • (1) 보통경찰제의 확립
            • (2) 신간부의 선정과 보통경찰의 기능
          • 2) 지방제도의 개편
            • (1) 동화정책하의 참정권 문제
            • (2) 지방제도의 개편과 자문기구의 설치
            • (3) 면제의 운영과 촌락정책의 실상
          • 3) 친일세력의 양성
            • (1) 친일과 협력이란 개념
            • (2) 친일파의 육성과 이용책
            • (3) 친일단체의 조직
        • 2. 수탈체제의 강화
          • 1) 총독부 산업정책의 전환
          • 2) 농업―산미증식계획
          • 3) 공업
            • (1) 식민지 공업구조의 형성
            • (2) ‘민족자본’과 조선인 자본
          • 4) 재정·금융
            • (1) 재정
            • (2) 금융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1. 임시정부의 수립과 초기 활동
          • 1) 임시정부 수립의 배경
            • (1) 세계대전의 종전과 민족자결주의
            • (2) 정부수립운동과<대동단결선언>
          • 2) 임시정부의 수립과 통합
            • (1) ‘국민대회’와 국내 정부수립운동
            • (2) 상해 임시정부의 성립
            • (3) ‘통합’ 임시정부의 출범
          • 3) 임시정부의 초기활동
            • (1) 외교·선전활동
            • (2) 국내조직과 활동
            • (3) 군사외교와 독립전쟁 준비
        • 2. 임시정부와 국민대표회의
          • 1) 국민대표회의 소집론과 ‘정부옹호파’의 반대운동
            • (1) 국민대표회의 소집배경과 참가세력
            • (2) 정부옹호파의 국민대표회 반대운동
            • (3) 제10회 임시의정원
          • 2) 국민대표회의의 전개 과정
            • (1) ‘비공식회의’와 제11회 임시의정원
            • (2) ‘삼방회의’와 국민대표회의의 결렬
          • 3) 국민대표회의에서의 쟁점
            • (1) 국민대표회의의 적법·부적법 문제
            • (2) ‘임정존폐’ 문제와 ‘임정법통론’
        • 3. 임시정부와 유일당운동
          • 1) 유일당운동의 배경과 계기
          • 2) 유일당운동의 추진과 임시정부의 개헌
            • (1) 임시정부 중심의 대당결성 주장
            • (2)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 결성
            • (3) 임시정부 개헌과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 결성
            • (4) 의열단의 선언과 광동·무한·남경촉성회 결성
          • 3) 유일당운동의 발전과 임시정부 참여
            • (1)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의 결성
            • (2) 전위조직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의 성립
          • 4) 유일당운동의 중단과 임시정부의 여당 결성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1. 독립군의 편성과 국내진입작전
          • 1) 시대적 배경
          • 2) 독립군의 편성
            • (1) 북간도지역
            • (2) 서간도지역
          • 3) 국내진입작전의 전개
            • (1) 독립군의 전력강화
            • (2) 국내진입작전
        • 2. 봉오동승첩과 청산리대첩
          • 1) 봉오동승첩
            • (1) 삼둔자전투
            • (2) 봉오동승첩
          • 2) 청산리대첩
            • (1) 일본군의 간도 침공
            • (2) 독립군의 근거지 이동
            • (3) 독립군의 전투준비
            • (4) 청산리대첩
            • (5) 청산리대첩의 전과와 의의
        • 3. 경신참변과 자유시사변
          • 1) 독립군의 북정
          • 2) 경신참변
          • 3) 자유시사변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1. 통의부의 결성과 활동
          • 1) 통군부의 성립과 남만한족통일회의
          • 2) 통의부의 결성과 활동
        • 2. 3부의 성립과 활동
          • 1) 참의부의 성립과 활동
          • 2) 정의부의 성립과 활동
          • 3) 신민부의 성립과 활동
        • 3. 재만 독립운동단체의 민족유일당운동
          • 1) 민족통일전선운동의 대두
          • 2) 3부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1. 의열투쟁의 의미맥락
        • 2. 의열투쟁 본격화의 배경과 계기
        • 3. 3·1운동 직후와 1920년대의 의열투쟁
          • 1) 3·1운동 직후와 1920년의 의열투쟁
          • 2) 1921년 이후의 의열투쟁 양상과 추이
            • (1) 의열단의 국내외 투쟁
            • (2) 재만 독립군의 국내외 의열투쟁
            • (3) 병인의용대의 의열투쟁
            • (4) 개인 단독의거의 흐름과 사례들
        • 4. 1930년대와 일제말의 의열투쟁
          • 1) 한인애국단의 의열투쟁
            • (1) 이봉창의 동경의거
            • (2) 상해거사의 추진과 윤봉길 의거
            • (3) 국내·만주거사 계획의 추진
          • 2) 재중국 아나키스트들의 의열투쟁
          • 3) 한국혁명당총동맹과 남자현의 의열투쟁
          • 4) 상해와 북경에서의 밀정·친일배 처단 활동
          • 5) 한국독립당과 민족혁명당의 의열투쟁
          • 6) 국내 의열투쟁의 불연속성과 지구성
        • 5. 일제 강점기 의열투쟁의 특징과 역사적 의의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2) 정부옹호파의 국민대표회 반대운동

 1921년 2월 초 국민대표회 소집론이 제기된 이후 정식 회의가 열리기까지 상해에서는 이 문제를 둘러싸고 국민대표회 소집을 지지하는 상해의 개조파 및 북경의 창조파와, 이를 반대·저지시키려는 정부옹호파가 크게 대립했다. 일반적으로 국민대표회를 반대하고 임정 고수를 주장한 이들을 임정유지파로 일컬어 왔고 이들은 주로 이승만을 중심한 기호파 인사들이었다. 그런데 개조파 역시 기본적으로 임정 유지를 주장한 점에서 이들과 구별할 필요가 있어 여기서는 임정유지파를 당시의 용어인 ‘정부옹호파’로 대신하였다. 예컨대 국민대표회에 대한 찬반논란이 한참 일던 무렵≪독립신문≫에 투고된 한 글에서는 “今日에 至하야 므슨 理由로 所謂 政府擁護論이란 別問題갓치 니러나 누구누구난 政府擁護派라는 名詞가 隱然” 중 생겼다고 하면서, 이들은 “政府 아래 俯首服從하는 者”라고 했다.298) 국민대표회 소집론이 처음 제기되었을 때, 정부옹호파는 이를 ‘政府敗潰運動’으로 파악하고 크게 반발했다.

 1921년 2월 초 이후 국민대표회 소집론이 점차 확산되어가자 趙琬九·윤기섭 등 45명의 정부옹호파는 3월 5일 임시정부를 절대로 지지할 것, 현대통령 이하 각 국무원을 신임할 것, 언론·행동 등 일체의 현시국을 파괴하는 행위를 방지하도록 노력할 것이라는 선언서를 반포하고, 3월 12일 상해 거류민단 사무소에서 현 정부를 후원할 단체를 조직할 목적으로 윤기섭·조완구·김구 등 20명을 조직위원으로 선정했다. 이들은 국민대표회 소집세력에 대응하는 정부옹호파의 외곽 단체로서 협성회를 조직하고, “임시정부를 절대로 옹호할 것”, “광복의 정신과 協進主義를 鼓勵할 것”, “국세의 납입을 勵行할 것”, “군사의 복습을 督進할 것” 등 4개항의 강령을 채택했다.299)

 이 무렵 상해에 머물고 있던 임시대통령 이승만은 1921년 5월 17·18일 임시의정원과 국무원에 외교상 긴급한 일과 재정의 절박함을 이유로 미국에 건너간다는 사실을 통고하고 법무총장 申圭植을 국무총리 대리로 임명한 뒤 상해를 떠났다. 이때 그는 임시대통령 명의의<諭告>를 발포하여 국민대표회 소집론에 대한 자신의 입장과 신규식 내각이 할 일을 밝혔다.

 <유고>에서 이승만은 국민대표회 소집 명분 가운데 하나로 제기되어 상해 정국의 최대 현안이 된 자신의 거취 문제, 즉 대통령직 퇴진 문제에 대해 이것은 완전한 민의기관에서 공식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고 大局을 흔들려는 도의에 어긋난 소수인의 행위라고 일축했다. 그리고 신규식 내각에 대해서는 비상한 결속과 결심으로 임정의 기초를 더욱 굳건히 하고 정무의 중대 안건과 국무원 진퇴에 관한 문제는 자신의 동의를 받아 결정할 것을 강조하는 한편, 다소의 불평자나 음모자들의 선동을 잘못 듣고 대국을 顚覆하는 일이 없도록 당부했다.300) 이처럼 이승만은<유고>를 통해 국민대표회를 반대하는 자신의 입장을 명백히 밝혔다. 그러나 임정이 존폐 위기에 처한 상태에서 임정 유지를 내각에 당부하고 미국으로 건너간 이승만의 행위는 임정의 최고 책임자로서 정국을 수습하기보다는 당시 위임통치 청원문제로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그로 인한 임정 분열의 수습을 방기하고 도피한 성격이 짙었다.

 미국에 도착한 이승만은 국민대표회 소집을 저지시키기 위해 상해의 정부옹호파와 연락을 유지하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그는 국민대표회 소집론자들이 자신의 거취 문제와 관련하여 다시 제기한 위임통치 청원문제를 해명하는 데 노력했다. 자신의 상해 비선조직의 일원인 장붕은 1921년 6월 18일 이승만에게 편지를 보내, 상해나 북경 등지의 청년은 물론 중국인이나 서양인 사이에 “1910년에 한국 주권자가 통치를 일본에 넘겨준 것과 이승만이 한국통치권을 미국에 요구하기를 청원한 것은 다 같은 의미요, 같은 해석에 속한다”거나 이승만은 “이완용과 같다”는 등 위임통치 청원문제와 관련된 좋지 않은 소문이 있음을 전했다. 그리고 鄭漢景으로 하여금 위임통치의 定意와 청원한 이유, 청원한 이후의 결과 및 영향, 사건에 관계된 인물 등을 세상에 공포하게 하여 오해가 없도록 하라고 대응 방안을 제시했다.301)

 장붕의 편지를 받은 이승만은 1921년 7월 16일 국무총리 대리 신규식과 장붕에게 위임통치 청원문제에 대한 경위를 설명한 정한경의 편지를 보내어 공포할 것을 당부했다. 이때 이승만은 이와 관련한 소문이 국내에 퍼질 것을 더욱 우려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특별히 당부하기도 했다.302)

 위임통치 청원문제의 한 주역인 정한경은 1921년 3월 26일과 6월 12일 두 차례 안창호와 이광수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에서 그는 위임통치를 청원한 것은 3·1운동 이전의 일이고 당시 안창호가 회장으로 있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승인을 받아 제출한 것이며, 이것을 가지고 때도 없이 시비거리로 삼는 것은 지나치다고 지적하며 은근히 안창호의 책임론을 제기했다.

 이승만은 이와 함께 미주·간도 및 국내의 지지 세력을 총동원하여 국민대표회를 고립·무산시키려는 계획도 진행했다. 이것은 그가 신규식 및 국내의 李商在에게 보낸 편지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1921년 7월 16일 신규식에게 편지를 보내어 미주에서는 정부옹호책으로 동지회를 조직하여 정부를 파괴하려는 자와 아주 분립하여 奮勵制禦하기를 결심하였으니, 원동에서도 이러한 단체들과 연락하고 특히 북로군정서의 隱溪(白純) 선생과 상의하여 군정서의 이름으로 정부를 옹호한다는 주지를 성명케 하도록 지시했다.303)

 그는 1921년 7월 29일 이상재에게도 편지를 보내어 신규식·손정도·김인전·윤기섭·이희경·조완구·신익희·이동녕·이시영 등은 정부에 충성을 다하는 자인 반면에 박용만·이동휘·남형우·신숙·김규식·안창호·여운형 등 국민대표회 소집론자는 정부파괴를 선전하는 자이며 재정만 있으면 이런 소수인들의 파괴운동이 무효로 돌아갈 뿐이라고 하면서, 지금 국무원은 결속이 잘되어 전과 같이 분열하던 폐가 없으니 정부의 현상유지 경비로 1년에 3만원을 담당해 줄 것을 부탁했다.304)

 이승만은 1921년 11월 워싱턴에서 열릴 예정인 태평양회의에서 한국문제가 잘 결정되면 모든 문제가 쉽게 풀릴 것이라고 하며 이상재에게 경비 20만원을 보내 줄 것을 부탁하고 임정에게도 모든 역량을 태평양회의에 집중할 것을 지시했다. 즉 그는 태평양회의에 대비하여 정부에서 속히 할 일로써 국내와 원동 각지에서 재정을 확보하여 구미위원부로 보내고, 국내와 원동 각지에 시위운동을 신속히 착수하여 민심을 정부로 통합할 것 등을 지시했다.

 이와 같이 이승만은 국민대표회 소집론을 정부를 파괴하려는 소수 불평분자들의 소행으로 왜곡하고 자신이 그 동안 비선조직을 통해 상해와 국내외 각지에 구축해 놓은 지지세력을 동원하여 국민대표회를 무산시키려고 했다. 나아가 그는 태평양회의를 구실로 정치적 위기를 일시적으로 회피하는 한편 태평양회의에서 기대되는 성과를 바탕으로 임시대통령으로서의 자신의 위상을 공고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승만이 미국에 건너간 뒤 임정의 절대옹호의 책임을 맡게 된 신규식 내각은, 1921년 11월 11일 워싱턴에서 개최될 태평양회의는 우리 국가의 근본문제를 해결할 장이 될 것이라고 선전하며 태평양회의 준비에 진력했다. 이때부터 다시 한번 국내외가 미국에 기대를 걸고 온 역량을 태평양회의에 집중함으로써 국민대표회의 개최문제는 일시 잠복되었다. 그러나 1922년 2월 태평양회의는 이승만이나 정부옹호파의 기대와는 달리 아무런 성과없이 끝나고 말았다.

 태평양회의는 결국 그 동안 국민대표회 소집을 반대하며 온 역량을 외교 활동에 집중했던 신규식 내각에게 외교 실패의 책임을 묻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따라 신규식 국무총리 대리가 사직한 데 이어 군무총장 노백린 한 사람을 제외한 이동녕·이시영·손정도 등 모든 각원이 사직함으로써 1922년 3월 이후 임정은 사실상 무정부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298)≪독립신문≫, 1921년 12월 6일.
299)金正明 編,≪朝鮮獨立運動≫Ⅱ(東京:原書房, 1967), 142∼143쪽.
300)中央日報社·延世大學校韓國學硏究所,≪梨花莊所藏雩南李承晩文書≫東文編 六(國學資料院, 1998), 46∼63쪽(이하≪李承晩文書≫).
301)≪李承晩文書≫18, 118∼120쪽.
302)≪李承晩文書≫16, 59∼60·229∼236쪽.
303)≪李承晩文書≫16, 56∼57쪽. 1922년 4월 22일 同志會에서 하와이 各島各地方 代表에게 보낸 통지서에서 “우리가 우리 임시대통령의 권고심을 듯고 동지회를 조직이 무삼 연고인뇨. 우리가 하나님 랍헤셔 맹셔고 이 회를 조직은 우리의 거 독립럽을 위야 우리 동지가 림시정부를 밧들 우리 二千萬의 두령되시 대통령을 압헤셔우고 을 갓치 면셔 조국을 긔어히 광복코져 이라”(≪李承晩文書≫12, 231∼232쪽) 한 데서 동지회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304)≪李承晩文書≫16, 180∼185쪽.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