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근대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2. 임시정부와 국민대표회의2) 국민대표회의의 전개 과정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1. 문화정치의 실상
          • 1) 경찰기구의 강화
            • (1) 보통경찰제의 확립
            • (2) 신간부의 선정과 보통경찰의 기능
          • 2) 지방제도의 개편
            • (1) 동화정책하의 참정권 문제
            • (2) 지방제도의 개편과 자문기구의 설치
            • (3) 면제의 운영과 촌락정책의 실상
          • 3) 친일세력의 양성
            • (1) 친일과 협력이란 개념
            • (2) 친일파의 육성과 이용책
            • (3) 친일단체의 조직
        • 2. 수탈체제의 강화
          • 1) 총독부 산업정책의 전환
          • 2) 농업―산미증식계획
          • 3) 공업
            • (1) 식민지 공업구조의 형성
            • (2) ‘민족자본’과 조선인 자본
          • 4) 재정·금융
            • (1) 재정
            • (2) 금융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1. 임시정부의 수립과 초기 활동
          • 1) 임시정부 수립의 배경
            • (1) 세계대전의 종전과 민족자결주의
            • (2) 정부수립운동과<대동단결선언>
          • 2) 임시정부의 수립과 통합
            • (1) ‘국민대회’와 국내 정부수립운동
            • (2) 상해 임시정부의 성립
            • (3) ‘통합’ 임시정부의 출범
          • 3) 임시정부의 초기활동
            • (1) 외교·선전활동
            • (2) 국내조직과 활동
            • (3) 군사외교와 독립전쟁 준비
        • 2. 임시정부와 국민대표회의
          • 1) 국민대표회의 소집론과 ‘정부옹호파’의 반대운동
            • (1) 국민대표회의 소집배경과 참가세력
            • (2) 정부옹호파의 국민대표회 반대운동
            • (3) 제10회 임시의정원
          • 2) 국민대표회의의 전개 과정
            • (1) ‘비공식회의’와 제11회 임시의정원
            • (2) ‘삼방회의’와 국민대표회의의 결렬
          • 3) 국민대표회의에서의 쟁점
            • (1) 국민대표회의의 적법·부적법 문제
            • (2) ‘임정존폐’ 문제와 ‘임정법통론’
        • 3. 임시정부와 유일당운동
          • 1) 유일당운동의 배경과 계기
          • 2) 유일당운동의 추진과 임시정부의 개헌
            • (1) 임시정부 중심의 대당결성 주장
            • (2)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 결성
            • (3) 임시정부 개헌과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 결성
            • (4) 의열단의 선언과 광동·무한·남경촉성회 결성
          • 3) 유일당운동의 발전과 임시정부 참여
            • (1)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의 결성
            • (2) 전위조직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의 성립
          • 4) 유일당운동의 중단과 임시정부의 여당 결성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1. 독립군의 편성과 국내진입작전
          • 1) 시대적 배경
          • 2) 독립군의 편성
            • (1) 북간도지역
            • (2) 서간도지역
          • 3) 국내진입작전의 전개
            • (1) 독립군의 전력강화
            • (2) 국내진입작전
        • 2. 봉오동승첩과 청산리대첩
          • 1) 봉오동승첩
            • (1) 삼둔자전투
            • (2) 봉오동승첩
          • 2) 청산리대첩
            • (1) 일본군의 간도 침공
            • (2) 독립군의 근거지 이동
            • (3) 독립군의 전투준비
            • (4) 청산리대첩
            • (5) 청산리대첩의 전과와 의의
        • 3. 경신참변과 자유시사변
          • 1) 독립군의 북정
          • 2) 경신참변
          • 3) 자유시사변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1. 통의부의 결성과 활동
          • 1) 통군부의 성립과 남만한족통일회의
          • 2) 통의부의 결성과 활동
        • 2. 3부의 성립과 활동
          • 1) 참의부의 성립과 활동
          • 2) 정의부의 성립과 활동
          • 3) 신민부의 성립과 활동
        • 3. 재만 독립운동단체의 민족유일당운동
          • 1) 민족통일전선운동의 대두
          • 2) 3부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1. 의열투쟁의 의미맥락
        • 2. 의열투쟁 본격화의 배경과 계기
        • 3. 3·1운동 직후와 1920년대의 의열투쟁
          • 1) 3·1운동 직후와 1920년의 의열투쟁
          • 2) 1921년 이후의 의열투쟁 양상과 추이
            • (1) 의열단의 국내외 투쟁
            • (2) 재만 독립군의 국내외 의열투쟁
            • (3) 병인의용대의 의열투쟁
            • (4) 개인 단독의거의 흐름과 사례들
        • 4. 1930년대와 일제말의 의열투쟁
          • 1) 한인애국단의 의열투쟁
            • (1) 이봉창의 동경의거
            • (2) 상해거사의 추진과 윤봉길 의거
            • (3) 국내·만주거사 계획의 추진
          • 2) 재중국 아나키스트들의 의열투쟁
          • 3) 한국혁명당총동맹과 남자현의 의열투쟁
          • 4) 상해와 북경에서의 밀정·친일배 처단 활동
          • 5) 한국독립당과 민족혁명당의 의열투쟁
          • 6) 국내 의열투쟁의 불연속성과 지구성
        • 5. 일제 강점기 의열투쟁의 특징과 역사적 의의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2) ‘삼방회의’와 국민대표회의의 결렬

 1923년 5월 10일 국민대표회의에서 군사·재정·외교·생계·노동문제 등 6분과안이 차례로 상정, 통과됨으로써 각 분과의 의안이 종결되었다. 그러나 그 동안 개조파와 창조파가 비공식회의에서 합의했던 임정의 국민대표회 참여계획이 제11회 임시의정원에서 좌절되면서 시국문제가 다시 쟁점으로 떠올랐다. 지금까지 시국문제와 관련되어 제출되었던 의안은 申二鎭 등의 임시정부개조안, 金宇希 등의 신기관건설안, 朴健秉 등의 국시확립안, 여운형 등의 신독립당 조직안 등 네 가지였다.

 1923년 5월 12일 열린 회의에서 시국문제는 이미 결정된 두 안으로 종결하고 기타 제안은 일체 기각하자는 鄭寅敎의 긴급 제안이 있은 후 김우희·여운형 등의 제안은 취소되었고, 정인교의 긴급 제안에 대한 의결은 다음 회에서 결정하기로 하여 시국문제에 대한 토의는 일단 연기되었다.

 시국문제를 두고 창조파와 개조파의 대립이 계속되는 가운데 1923년 5월 15일 의장 김동삼, 서기 배천택, 헌법기초의원 이진산 그리고 김형식 등은 자신들이 속해있던 서로군정서 및 한족회로부터 국민대표회의가 더 이상 목적을 이룰 수 없다며 대표 소환의 통지서를 받고 사임했다. 국민대표회는 4명의 대표자격 상실을 인정하고 부의장 윤해가 의장에, 부의장 후보자 신숙이 부의장에, 비서 오창환이 비서장에 각각 보궐됨으로써 본회의를 진행하는 주요 직책을 창조파가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튿날 개조파도 통일의 유일 방침인 개조안이 기각되고 국호·연호를 새로 정하면 이는 일민족에 두 개 국가를 형성하여 可恐의 화근을 낳는다는 이유로 개조파 대표 57명이 국민대표회의를 집단적으로 탈퇴함으로써 국민대표회의는 최대의 결렬 위기를 맞게 되었다. 다만 개조파를 이끌던 안창호가 창조파에게 비공식회의를 통한 원만한 타협을 제안함으로써 국민대표회의의 파국을 막을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을 갖게 했다. 이때부터 창조·개조 및 정부 사이에 비공식회의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먼저 윤해 등 창조파 대표들은 개조파가 탈퇴한 근본 문제인 정부문제를 해결하려고 1923년 5월 19일 정부측과의 협상을 모색했다. 창조파의 입장에서도 결렬의 책임을 면하고 나아가서는 개조파를 설득하려면 어떤 형식으로든 정부 문제에 대한 분명한 태도 표명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창조파는 정부측과의 협상을 통해 개조파의 탈퇴 명분을 없애고 동시에 개조파의 회의 참가를 설득하는 데 노력했다.

 창조파는 1923년 5월 20·21·22일 3일간 회의를 휴회시키고 5월 22일 이후 윤해와 국무총리 노백린이 여러 차례 만나 임정과 국민대표회의 통일 문제를 논의했다. 그 결과 24일 협상에서 양측은 노백린이 제출한 임정과 국민대표회의 통합 5개안을 합의하고, 이것을 각각 국무회의와 간부회의에서 결정을 보고 이튿날 다시 만나기로 했다. 합의된<통합원칙 5개안>이란 임정과 국민대표회의는 서로 서한을 주고받는 형식으로 상호 권위를 인정하며, 임정에서 국민대표회의에 3인의 위원을 파견함과 동시에 임정은 국민대표회의에서 정한 헌법을 임시의정원의 승인을 거쳐 선포한다는 것 등이었다. 이때 개조파는 정부측과 건설파(창조파)의 타협이 성립하면 회의 참석을 거부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321)

 그런데 노백린이 제안한 이 안은 형식적으로는 국민대표회와 임정이 상호 승인을 통해서 양쪽의 명분을 살렸지만 여전히 임정의 현상유지를 고집하는 정부옹호파의 입장과는 크게 달랐다. 노백린이 정부안으로 제안했던 통합원칙은 5월 25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미결되어, 창조파와 임정측의 비공식회의에서 논의되던 국민대표회와 임정의 통합 노력도 일단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창조파와 정부측의 비공식회의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이번에는 朴春根 등 상해파 고려공산당측 대표 7명이 창조파·개조파 및 정부측 등 ‘삼방’의 비공식회의를 주선했다. 그 결과 1923년 5월 31일과 6월 1일 두 차례에 걸쳐 임정·개조파·창조파에서 각 3인씩의 대표가 참여한 ‘비공식간담회’가 열렸다. 이 간담회는 정부의 현상유지를 고집하는 정부옹호파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비공식간담회도 아무런 성과없이 끝나자 창조파는 6월 3일 자신들만의 국민대표회의를 열고 국호를 ‘韓’, 연호를 ‘건국기원’으로 정했다.

 창조파에 의한 신기관 건설이 확실해지는 가운데 국무총리 노백린은 1923년 6월 4일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걸쳐 창조파와 개조파의 주요 간부를 정부사무실로 초청하여 다시 한번 비공식회의인 ‘사후삼방회의’를 열어 마지막 타협을 시도했다. 이날 회의에는 창조파의 윤해·신숙, 정부측의 노백린·조소앙·홍진, 개조파의 안창호·손정도·정신·왕삼덕 등이 대표로 참석했다.

 6월 4일 정부사무실에서 다시 열린 사후삼방회의에서 노백린은<국민대표회의의 선언서>및 국호·연호 등 임정에 저촉되는 사항은 일체 취소하고, 정부 및 의정원에서는 국민대표회의에 헌법개정의 권한을 부여하되 국민대표회의에서 이를 개정하면 다시 의정원에 회부하여 통과시킨 후 이를 공포하자는 2개항의 타협안을 제출했다.322)

 노백린의 안은 개조·창조 양파가 모두 반대하여 기각되었다. 이어 창조파의 윤해가 마지막 타협안으로, 임시의정원과 국민대표회의가 비공식 연합회를 열어 헌법회의를 조직하여 헌법 및 일체의 결의권을 위임하고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을 자진 해산하고 국민대표회의는 폐회하자는<헌법회의안>을 제출했다.323) 그러나 이 안마저 6월 5일 열린 국무원 긴급회의에서 거부됨으로써 사후삼방회의마저 아무런 성과없이 끝나고 말았다. 정부옹호파가 임정에 대한 어떠한 변동도 용납하지 않고 현상유지를 고집하는 상황에서 임정개조나 신기관의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개조파나 창조파의 타협안은 애초부터 성사될 수 없었다.

 세 차례의 삼방회의마저 아무런 성과없이 끝나자 이청천 등을 비롯한 9명의 대표들도 통일이 불가능해진 상태에서 국민대표회의 참여를 반대하여 탈퇴했다. 이로써 국민대표회에 남은 창조파 대표 39명은 1923년 6월 7일 마지막 회의를 열어 새로 제정한 헌법을 통과시키고 국민위원 33명, 국무위원 4명, 고문 31명으로 구성된 위원제정부를 조직하고 국민대표회의를 폐막했다.

 신정부를 구성한 창조파 일행 30여 명은 1923년 8월 상해를 떠나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했다. 이들은 이곳에서 소련의 지원을 받아 활동을 강화하려 했지만 곧바로 소련의 반대에 부딪혀 와해되고 말았다. 소련이 신정부 설치를 반대한 주요한 이유는 첫째 창조파만의 국민위원회는 국민대표회의를 통해 민족통일전선으로서 민족단일당 형태를 취하기를 원했던 코민테른의 요구와 달랐기 때문이었다. 둘째 소련과 일본의 협상 전개라는 정세 변화의 영향이었다. 1922년 말 일본군의 시베리아 철병과 소일협상의 새 국면 전개로 소련이 한인의 새 정부를 소련령에 허용할 경우 일본의 재도발에 부딪힐 지 모른다는 우려에서 한인의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할 형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국민위원회는 소련에서 추방되어 북경으로 다시 돌아오면서 사실상 와해되고 말았다.

 한편 삼방회의가 아무런 성과없이 끝나고 사실상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되자 창조파에 대한 정부옹호파의 공세가 적극 진행되었다. 1923년 6월 6일 내무총장 김구는 창조파의 행위에 대해 민국에 대한 반역행위라고 규정하고 6월 이후 일체 행위의 취소를 명하는<내무령>을 발포했고, 같은 날 같은 내용의<국무령포고>3호를 발포하여 창조파의 행위를 격렬히 성토했다.

 ≪독립신문≫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실패할 경우 우리 민족 장래에 가공의 대화근을 낳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듯이324) 국민대표회의의 결렬은 그 동안 국내외 독립운동계 사이에 뿌리 깊은 불신과 분열만을 다시 확인했을 뿐이었다. 민족주의 진영 내부의 서북파·기호파의 대립과 북경파의 반임정 입장, 또한 사회주의 진영 내부에서의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의 분열은 민족적 대단결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국민대표회의를 결렬시키는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321)국회도서관,≪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318쪽.
322)국회도서관,≪島山安昌浩資料集≫1, 97쪽.
323)吳昌煥,<회의록>(≪宣布文, 憲法, 機關組織≫, 러시아:러시아현대사문서보관 및 연구센터 소장, 1923), 19쪽.

국회도서관,≪島山安昌浩資料集≫1, 97쪽.
324)≪독립신문≫, 1923년 6월 13일.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