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근대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3. 임시정부와 유일당운동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1. 문화정치의 실상
          • 1) 경찰기구의 강화
            • (1) 보통경찰제의 확립
            • (2) 신간부의 선정과 보통경찰의 기능
          • 2) 지방제도의 개편
            • (1) 동화정책하의 참정권 문제
            • (2) 지방제도의 개편과 자문기구의 설치
            • (3) 면제의 운영과 촌락정책의 실상
          • 3) 친일세력의 양성
            • (1) 친일과 협력이란 개념
            • (2) 친일파의 육성과 이용책
            • (3) 친일단체의 조직
        • 2. 수탈체제의 강화
          • 1) 총독부 산업정책의 전환
          • 2) 농업―산미증식계획
          • 3) 공업
            • (1) 식민지 공업구조의 형성
            • (2) ‘민족자본’과 조선인 자본
          • 4) 재정·금융
            • (1) 재정
            • (2) 금융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1. 임시정부의 수립과 초기 활동
          • 1) 임시정부 수립의 배경
            • (1) 세계대전의 종전과 민족자결주의
            • (2) 정부수립운동과<대동단결선언>
          • 2) 임시정부의 수립과 통합
            • (1) ‘국민대회’와 국내 정부수립운동
            • (2) 상해 임시정부의 성립
            • (3) ‘통합’ 임시정부의 출범
          • 3) 임시정부의 초기활동
            • (1) 외교·선전활동
            • (2) 국내조직과 활동
            • (3) 군사외교와 독립전쟁 준비
        • 2. 임시정부와 국민대표회의
          • 1) 국민대표회의 소집론과 ‘정부옹호파’의 반대운동
            • (1) 국민대표회의 소집배경과 참가세력
            • (2) 정부옹호파의 국민대표회 반대운동
            • (3) 제10회 임시의정원
          • 2) 국민대표회의의 전개 과정
            • (1) ‘비공식회의’와 제11회 임시의정원
            • (2) ‘삼방회의’와 국민대표회의의 결렬
          • 3) 국민대표회의에서의 쟁점
            • (1) 국민대표회의의 적법·부적법 문제
            • (2) ‘임정존폐’ 문제와 ‘임정법통론’
        • 3. 임시정부와 유일당운동
          • 1) 유일당운동의 배경과 계기
          • 2) 유일당운동의 추진과 임시정부의 개헌
            • (1) 임시정부 중심의 대당결성 주장
            • (2)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 결성
            • (3) 임시정부 개헌과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 결성
            • (4) 의열단의 선언과 광동·무한·남경촉성회 결성
          • 3) 유일당운동의 발전과 임시정부 참여
            • (1)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의 결성
            • (2) 전위조직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의 성립
          • 4) 유일당운동의 중단과 임시정부의 여당 결성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1. 독립군의 편성과 국내진입작전
          • 1) 시대적 배경
          • 2) 독립군의 편성
            • (1) 북간도지역
            • (2) 서간도지역
          • 3) 국내진입작전의 전개
            • (1) 독립군의 전력강화
            • (2) 국내진입작전
        • 2. 봉오동승첩과 청산리대첩
          • 1) 봉오동승첩
            • (1) 삼둔자전투
            • (2) 봉오동승첩
          • 2) 청산리대첩
            • (1) 일본군의 간도 침공
            • (2) 독립군의 근거지 이동
            • (3) 독립군의 전투준비
            • (4) 청산리대첩
            • (5) 청산리대첩의 전과와 의의
        • 3. 경신참변과 자유시사변
          • 1) 독립군의 북정
          • 2) 경신참변
          • 3) 자유시사변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1. 통의부의 결성과 활동
          • 1) 통군부의 성립과 남만한족통일회의
          • 2) 통의부의 결성과 활동
        • 2. 3부의 성립과 활동
          • 1) 참의부의 성립과 활동
          • 2) 정의부의 성립과 활동
          • 3) 신민부의 성립과 활동
        • 3. 재만 독립운동단체의 민족유일당운동
          • 1) 민족통일전선운동의 대두
          • 2) 3부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1. 의열투쟁의 의미맥락
        • 2. 의열투쟁 본격화의 배경과 계기
        • 3. 3·1운동 직후와 1920년대의 의열투쟁
          • 1) 3·1운동 직후와 1920년의 의열투쟁
          • 2) 1921년 이후의 의열투쟁 양상과 추이
            • (1) 의열단의 국내외 투쟁
            • (2) 재만 독립군의 국내외 의열투쟁
            • (3) 병인의용대의 의열투쟁
            • (4) 개인 단독의거의 흐름과 사례들
        • 4. 1930년대와 일제말의 의열투쟁
          • 1) 한인애국단의 의열투쟁
            • (1) 이봉창의 동경의거
            • (2) 상해거사의 추진과 윤봉길 의거
            • (3) 국내·만주거사 계획의 추진
          • 2) 재중국 아나키스트들의 의열투쟁
          • 3) 한국혁명당총동맹과 남자현의 의열투쟁
          • 4) 상해와 북경에서의 밀정·친일배 처단 활동
          • 5) 한국독립당과 민족혁명당의 의열투쟁
          • 6) 국내 의열투쟁의 불연속성과 지구성
        • 5. 일제 강점기 의열투쟁의 특징과 역사적 의의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4) 유일당운동의 중단과 임시정부의 여당 결성

 1928년에 들면서 유일당운동이 답보상태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후의 과정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 살펴야 한다. 그 첫 단계는 1928년 중반부터 1929년 10월의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이하 유호동맹)의 결성까지, 다음 둘째 단계는 유호동맹과 한국독립당이 분립했으면서도 협동전선운동의 여진이 남아있던 1931년 말까지이며, 마지막으로는 1931년 말에 유호동맹이 해체되어 협동전선운동의 한쪽 편 상대가 없어진 시기이다.385)

 첫 단계는 다시 작은 두 단계로 나뉜다. 1928년 중반 이후 1929년 후반기 초입까지인 첫 시기에는 두 가지 구도로 나타났다. 하나는 좌우의 분립구도이며, 또 하나는 좌파 내부의 화요파와 ML파의 분립구도였다. 그리고 두 번째 시기는 1929년 후반기에 나타난 것으로 화요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ML파가 승세를 타면서 국제주의로 몰입하던 시기였다.386)

 먼저 유일당운동이 좌초에 부딪치는 첫 단계는 1928년에 나타났다. 그 하나의 요인은 좌우익 진영의 갈등이었다. 1927년 12월 광주에서의 공산주의 폭동사건387) 이래 한국인 공산당원이 상해로 도피해 오게 됨에 따라, 이들의 세력은 크게 확대되었다. 중국공산당의 지도하에 결집된 공산주의 청년들이 여기에 대거 가세하여 민족주의세력에 압박을 가하면서, “다수 공산계 청년회원을 가진 촉성회를 유인하여 임시정부 및 기타 제 단체를 통일하여 공산제하의 대단체를 건설하려고” 하였다.388) 여기에 국내에서 상해로 망명한 安光泉과 韓偉健의 경우나 광동에서 진출해 온 의열단의 세력도 덧붙여졌다. 이에 따라 1928년 중반에는 촉성회와 이의 전위적 청년단체인 중본한청은 좌우익세력의 결합이란 외적상태에도 불구하고 내적으로는 양분되는 형태를 띠게 되었다.

 민족주의세력과 사회주의세력은 동상이몽적인 자세를 갖고 있었다. 전자는 대당결성을 통한 민족운동계의 통일과 임시정부의 강화를 도모하고 나아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자 했다. 이에 반해 후자는 일시적 전술로 전선통일을 상정하고 자파 세력의 확산을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후자는 전자에 비해 전략적인 면에서 비교적 주도면밀한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사회주의 세력이 강화되는 가운데, 촉성회는 민족운동을 위해서 결집된 조직이라는 당초의 목표와 강령과는 달리 서로의 세력을 확충 또는 방어하는 자세로 바뀌어 혼란을 거듭하게 되었다. 즉 1928년부터 나타난 좌우 분립구도는 “우익진영이 ‘전민일치’의 중앙집권적 대독립당 결성을, 좌익진영은 노농대중의 이해와 입장에 기초한 ‘전투적 협동전선’ 내지 ‘혁명적 통일전선’의 결성을 주창하면서 나뉘었다.”389)

 또 하나의 요인은 화요파와 ML파의 갈등이었다. 그것은 좌파 헤게모니 전략의 즉각 적용 여부를 둘러싼 분립 구도로 나타났는데, “화요파(중본한청)가 우파와의 ‘결합’을 우선시하여 그 적용을 유보했다면, ML파(재중한청)는 우파와의 ‘분리’와 헤게모니 전략의 상시적 및 즉각적인 적용을 강조하여 날카로운 대립을 보인 것이다.”390)

 좌파의 양대 세력이 분열 구도로 나서기 시작한 모습은 재중국한인청년동맹(이하 재중한청)의 성립에서부터 드러났다. 재중한청을 장악한 ML파가 이 동맹을 성립시킨 날(1928년 5월 27일) 보다 하루 앞선 26일에, 그것도 같은 지역인 길림성 반석현에서 조직방법론의 차이를 이유로 전민족유일당조직촉성회의를 결렬시킴으로써 일단 유일당운동에 찬물을 끼얹고, 이어서 상해를 중심한 중본한청의 장악으로 행로를 바꾸었다.

 재중한청의 주도권을 장악한 ML파는 상해의 중본한청을 장악한 화요파에 대해 공세를 취했다. 우선 중국 전역에 걸쳐 11개구로 된 지역단위를 설정하고, 상해를 중심한 관내지역을 제1구로 정했다. 그러면서 중본한청의 대표로 파견되었던 이관수를 상해로 귀환시키면서,391) 상해에 ML파 중심의 재중한청 제1구 조직책임자로 지명했다. 이에 따라 중본한청의 공산계 중앙집행위원인 이관수는 재중한청의 일지대적인 활동을 하고자 이에 가입하고, 1928년 8월에 일방적으로 중본한청상해지부의 해체를 선언한 뒤,392) 이어서 상해에서 재중한청 제1지구의 창립을 선언했다.393) 이에 鄭泰熙·韓鎔 등은 그 선언을 반박하고 중본한청에서 이관수를 제명시켰다.394) 이에 따라 촉성회의 전위조직인 중본한청에서 ML파가 이탈하고 우익진영과 화요파만 잔존하였다.

 1929년 후반기로 들면서 둘째 시기에 접어들었다. 그것은 앞의 구도에 또 다른 하나의 축이 중첩·부가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그 새로운 축은 국제주의 대 민족주의의 대립 구도였다. 즉 코민테른이<12월테제>로 지령한 민족부르조아 세력과의 결별 요구를 좌익진영이 받아들여 유일당운동을 좌절시킨 것이었다.395) 국제주의 노선을 강하게 띠고 있던 ML파의 논리와 태도가 종래 우파와의 결합을 우선시하던 화요파의 그것을 누르고 승세를 얻게 되었다. 특히 의열단도 ML파에 지지를 보냄으로써 우열은 확연히 드러났다.

 이러한 충돌은 특히 1929년 7월에 재중한청제1구상해지부가 발표한 격문에 의해 결정적으로 대두하였다. 그 격문 가운데는 “제군의 조국 소비에트

 러시아는 제국주의 강도군의 무력적 포위에 직면하였다”는 귀절이 있었다. 이에 대해 우익진영은 그 내용을 “모국을 팔아먹고 조상을 바꾸는 행위”라고 강렬하게 비판을 제기하였다.396) 그때 우익세력과의 연합을 ML파보다 강하게 유지하고 있던 화요파는 그 동안의 대립적 관계를 넘어서서 결속을 도모하였다. 결국 좌파의 두 세력 모두가 좌익 국제주의 노선을 걷게 되었다. 즉 좌익의 두 세력은 민족주의에 대한 “국제주의의 논리를 내세워 코민테른-소련의 지도적 지위를 절대시하고, 그 권위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풍조를 갖게 되었고, 이에 따라 결국은 좌우익의 전선분리”397)를 초래하였다.

 그 결과 유일당상해촉성회가 1929년 10월 26일에 해체되었다.398) 상해에서도 만주의 전민족유일당촉성회의와 마찬가지로 조직방법론상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해체선언서>에서 내세운 표면적인 이유였다.399) 이 선언문은 관내촉성회가 성립된 후 만주에서는 독립당의 조직 방법문제를 둘러싸고 분열되어 유일독립당의 산출이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했다. 또 이 선언은 一國의 혁명을 지도할 대당의 결성은 구체적인 조건 아래에서 대중적 공동투쟁을 통하여야만 결합할 수 있다고 하고, 시대의 추이로 볼 때 유일당이냐 아니면 협동전선이 필요한가라는 문제가 논의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민족유일당론’의 단계가 아닌 ‘대중적 협동전선론’을 주장했다.400)

 1929년 10월 26일에 상해촉성회 해체를 결의하기 위한 모임이 프랑스 조계의 斜橋에 있던 惠中學校의 대강당에서 열렸다.401) 이 회의에 참석한 대표적인 인물은 사회를 맡은 崔昌植을 비롯하여 洪南杓·黃勳·具然欽·郭憲·鄭泰熙·李敏達·崔鳳官·曺奉岩·金元植(金炯善)·李東寧·金枓奉·趙琬九 등 좌우파를 대표한 인물이었다.402) 그렇지만 대다수의 인물이 좌파세력의 대표들이었고,403) 그것도 화요파와 ML파의 양 세력이 동참한 가운데 이루어졌다.404) 참석자 가운데 이동녕과 조완구만이 우파인사인 셈이었다. 이 모임에 우파세력 가운데 오직 이동녕과 조완구의 2명만이 참가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물론 당시에 임시정부의 주석 겸 법무장을 맡고 있던 이동녕이 참석함으로써 그 비중은 컸다고 하겠지만, 사실상 유일당운동에 있어 가장 중심인물이었던 안창호나 임시정부의 내무장이면서 실세로 부각된 김구 등이 참석하지 않았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미 우파세력은 좌파세력의 동향을 파악하고서 의례적인 대표만 참석하도록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은 그 자리에서 사회자인 최창식의 주도로 상해촉성회의 해체를 결의하였으니,405) 이로써 상해지역의 좌우합작운동은 일단락을 짓게 되었다.

 상해촉성회가 해체되면서 유일당운동은 일단 멈추었다. 그 자리에서 좌파는 留滬韓國獨立運動者同盟(滬:상해의 별칭)을 조직하였다. 그러자 3개월 뒤인 1930년 1월 25일에 임시정부 중심의 우파세력은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 결국 좌우합작을 통한 유일당 결성이라는 꿈은 깨어지고 각각의 조직으로 분립되었는데, 우파는 전체를 통합한 대혁명당은 아니지만 일단 정당체를 결성하는 데 이르렀다. 이것은 조직 성격상으로 발전한 것이라 규정할만하다. 1920년대 전반을 거쳐오면서 독립운동의 조직이 의열투쟁 단체라거나 임시정부 지원을 도모하는 단체 등이 있었지만, 임시정부 자체를 경영해 나갈 정당조직이 없었고, 때문에 정당 결성을 위한 노력이 되풀이 되었는데, 그 결실이 이때 와서 비로소 맺어진 것이다. 다만 아쉽게도 단일당·민족대당·대혁명당은 아니었다는 데 한계가 있다.

 그렇지만 합작을 위한 노력이 완전히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한국독립당이 채택한 이념에 경제·사회 분야에서 사회주의 요소를 표방함으로써 장차 좌파세력과 만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두기도 했다. 그래서 유일당운동은 1933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이 추진되면서 다시 부활의 길을 걷게 되고, 그 중심에 임시정부가 존재했다. 더러는 ‘정부’라는 이름에 걸맞기도 하고, 또 더러는 이름 값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임시정부는 광복을 맞을 때까지 항상 민족운동세력의 통일운동에서 핵심에 놓여 있게 된다.

<金喜坤>

385)金喜坤,<1930년대 초 상해지역 한인공산주의자의 동향-留滬韓國獨立運動者同盟을 중심으로->(≪國史館論叢≫47, 1993), 169∼194쪽.
386)김영범은 유일당운동이 좌초에 부딪치는 원인을 좌우분립구도로만 보아 왔던 김희곤의 견해를 진일보시켜 좌익진영 가운데서 화요파와 ML파의 갈등 구조를 세심하게 분석하여 추가시켰다. 따라서 본고는 1929년의 유일당운동에 대해 김영범의 연구성과를 참고한다(김영범, 앞의 글(1994), 127∼133쪽).
387)이것은 1927년 12월 11일에 中國共産黨 廣東省委員會 지도하에 무장봉기하여 廣東市에 인민정권을 수립한 사건이다. 廣州公社라고도 하며 파리코뮌을 모방하여 광동코뮌이라 하였다.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원인 張太雷와 사관교육연대를 지휘하는 葉劍英 및 코민테른 대표인 26세의 하인츠 노이만 등이 지휘한 이 봉기는 13일 오후에 붕괴되고, 3일간의 혼란 끝에 무너졌다(佐伯有一·野村浩一 外 著, 吳相勳 譯,≪中國現代史≫, 한길사, 1980, 358쪽).
388)國會圖書館,≪韓國獨立運動史料(中國篇)≫, 633쪽.
389)김영범, 앞의 글(1994), 128쪽.
390)위와 같음.
391)원래 정원이 대표였으나 일제에 투항했고, 그 후임으로 파견된 인물이 이관수였다(金正明,≪朝鮮民族運動≫2, 338쪽).
392)선언은 “… 정당의 조직 원칙 및 과거에 있어서의 쓰라린 경험과 조선의 현실에 따라 단체 본위의 봉건적·할거적 이론을 단연 배제함과 동시에 금후는 재중국한인청년동맹의 1지대로서 우리들이 다하지 못한 임무를 계속 수행하려고 함”이라고 주장했다(獨立運動史編纂委員會,≪獨立運動史資料集≫7, 1405쪽).
393)秋憲樹,≪韓國獨立運動≫2, (延世大出版部, 1972), 94쪽.
394)獨立運動史編纂委員會, 앞의 책, 1410쪽.
395)<12월테제>는 1928년 7월 17일부터 9월 1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제6회 대회에서 채택된 방침에 기초하여 그 해 12월에 작성되었다.<12월테제>가 발표될 당시 코민테른은 신간회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지만, 실제로 국외에서 전개된 민족유일당운동에서는 그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ML계 조선공산당재건운동의 이론적 지도자인 한위건이 1929년 12월 1일, 天津에서 발간된≪階級鬪爭≫에 기고한 논문에서 “현재 조선○○주의운동 진영에는 신간회의 즉시 해체론이 일부에서 일어나고 있다”라고 한 것은 국외에서의 움직임을 지적한 것이었다(李鐵岳,<大衆的戰鬪的協同戰線の結成と新幹會及獨立促成會の任務>;李均永,≪新幹會硏究≫, 漢陽大 博士學位論文, 1990, 198쪽에서 재인용).
396)獨立運動史編纂委員會, 앞의 책, 1425∼1429쪽.
397)김영범, 앞의 글(1994), 128쪽.
398)<해체선언>은 1929년 11월에 발표되었지만 실제로 해체가 결의된 시일은 그보다 조금 앞선 10월 26일이었다.
399)國會圖書館,≪韓國獨立運動史料(中國篇)≫, 635쪽.
400)이 문제는 앞에서도 본 것처럼 신간회에 대한 안광천·한위건의 이론과 그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401)이 학교의 이름을 ‘斜橋中學校’라고 기록한 경우도 있으나, 현지에서 확인한 바로는 프랑스 조계의 斜橋에 있던 惠中學校가 옳다. 이 학교는 현재 李惠利中學校가 되어 있다(金喜坤,≪중국관내 한국독립운동단체연구≫, 지식산업사, 1995, 274쪽).
402)國會圖書館,≪韓國獨立運動史料(中國篇)≫, 638쪽.

<外務省警察史 支那之部>(≪朝鮮民族運動史≫(未定稿)6, 고려서림, 1989), 618쪽.
403)이들 가운데 홍남표·황훈·구연흠·곽헌·정태희·이민달·최봉관·조봉암·김원식(김형선)·김두봉 등이 좌파세력이었다. 이들의 대다수가 이르쿠츠크·화요회계열인데, 뒤에 언급하겠지만, 동일한 자리에서 열린 유호동맹 창립과정에는 ML계열인 黃俊(韓偉健)의 참석과 鄭栢이 위원으로 선임된 사실이 확인된다(<外務省警察史 支那之部>(≪朝鮮民族運動史≫(未定稿)6, 고려서림, 1989), 619쪽).

당시의 성향으로 김두봉과 정태희는 중도좌파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었다. 김두봉은 1920년대에 임시정부 중심의 우파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유호동맹의 결성 직후인 1930년 1월에 우파세력의 결집체로 조직되는 한국독립당에 가담하였다. 그리고 정태희는 1920년대에 줄곧 민족주의계열에서 활동했으나, 유호동맹에 가담하는 무렵에는 공산주의자로 나타난다. 그가 언제부터 공산주의자로 전향하였는지에 대해 확실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을 거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을 해본다.
404)이러한 사실은 유호동맹의 기관지인≪앞으로≫의 창간호 가운데<독립당촉성회의 해체와 독립운동자연맹의 창립경과>라는 기사에 해체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고, 잔무처리위원으로 洪南杓·朴仁煥·鄭臺寅 등이 선출되었으며, 그 자리에서 좌파 단체인 유호동맹이 조직된 내용으로 알 수 있다(國會圖書館,≪韓國獨立運動史料(中國篇)≫, 638쪽).
405)최창식에 대한 일본 관헌의 기록에는 그가 해체과정을 주도했던 것으로 정리하였다(<外務省警察史 支那之部>,≪朝鮮民族運動史≫(未定稿)6, 고려서림, 1989, 618쪽).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