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각종 학교 설립운동
1920년대 초 총독부측은 높아진 향학열에 응하여 공립학교 증설을 발표하였지만 3면 1개교를 원칙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늘어나는 입학지원자를 감당할 수 없었다. 이에 각 지방의 유지들은 사립보통학교 설립운동을 시작하였다. 예를 들어 전북 고창에서는 기존의 각종학교로 되어 있던 사립학교를 몇몇 유지들이 기금을 보태어 사립보통학교로 바꾸어 놓았다.025) 충남 대전에서는 대전교육회가 기금을 모아 사립보통학교를 세웠으며, 금산군 부귀면 등에서도 역시 민간유지들이 기금을 모아 사립보통학교를 설립하였다.026) 하지만 각 지방의 면단위에서 사립보통학교를 세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각종학교로 분류되어 불이익을 받게 되는 사립학교는 학생들이 기피하였기 때문에 한말과 같은 대대적인 사립학교 설립운동도 일어나기 어려웠다.
여기서 당시 학교 설립운동의 중심이 된 것이 사립고등보통학교 설립운동이었다. 그것은 고등보통학교의 입학난이 다른 어느 학교의 경우보다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통영·부산·공주·천안·진주·재령·강릉 등지에서 사립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기성회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립고보 설립운동은 거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각도 당국에서 고보설립 기성회가 낸 기부금 모집에 관한 허가원을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총독부 당국은 “기부금을 대규모로 모집하면 징세에 영향이 크다”는 각종 구실을 붙여 고보설립운동을 방해하였다. 따라서 1923년까지도 사립고보는 전국적으로 8개교(여자고보는 5개교)에 지나지 않았다.027)
각급학교 설립운동은 마침내 1923년 민립대학기성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민립대학기성운동은 1920년 6월 조선교육회 발기회에서 “조속한 시일 내에 문리과·농과·상공과·의과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립대학을 설립한다”고 결의한 것이 그 발단이 되었다.028) 이후≪동아일보≫는 1922년 2월<신교육령>의 발포에 즈음한 논설<민립대학의 필요를 제창하노라>에서<신교육령>에 조선에서의 대학교육은 일본의<대학령>에 의거한다고 되어 있으므로 조선에서도 대학교육이 가능하게 되었다면서 민립대학의 설립을 제창하였다.029)
민립대학기성준비회는 1922년 11월 23일 李商在·玄相允·崔奎東 등에 의해 구성되었다. 민립대학기성준비회는 각 군별로 2∼5인의 발기인을 선발하기로 하고, 그 선발은 각 군의 민간단체의 협의에 일임하였다. 이에 따라 각 군에서는 주로 청년회가 중심이 되어 긴급회의를 열어 군내 유지들을 초청·협의하여 발기인을 선정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전국에서 선출된 발기인은 모두 1,170명에 달하였고, 그 가운데 462명이 모여 1923년 3월 29일 발기총회를 가졌다. 기성회는 발기총회에서 사업계획을 확정하였는데, 그것은 제1기 사업으로 기금 400만원을 모아 학교터 5만 평을 사서 교실 10채와 대강당을 짓고 법과·문과·경제과·이과 등 4과를 설치하며, 제2기에는 300만원으로 공과를 신설하고, 제3기에는 300만원으로 의과·농과를 설치한다는 것이었다.030) 또 총회에서는 6가지 사항을 결의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회원은 會金 납부자로 하며, 경성과 지방에는 각각 중앙부와 지방부를 두고, 중앙부와 지방부는 각기 집행위원을 두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각 지방에서는 발기인들을 확장 모집하여 지방부를 결성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안성군의 경우 발기인들을 더 모아 12개 면의 유지 120여 명을 발기인으로 하여 5월 6일 안성군 지방부를 창립하였다.031) 각 지방부에서는 강연회 등을 통하여 이 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회원과 기금을 모집하는 일에 열중하였다. 기금 모집 방법은 대체로 지방유지와 부호로 구성된 지방부의 집행위원들이 상당액을 부담하고, 나머지 액수를 전 군민이 호당 얼마씩 차등을 두어 부담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그러나 이 운동은 예상보다 성과가 크지 않았다. 우선 지방부가 조직된 군도 예상보다 훨씬 적었다. 또 각 지방부의 활동도 1923년 6월 경까지는 어느 정도 이루어졌지만 9월 이후에는 그 기세가 크게 꺾였다. 그것은 1923년봄 이후 조선청년당 대회에 참석한 각 지방의 청년회들이 실력양성운동 노선을 버리고 사회주의운동 노선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조선청년당대회에 참석한 일부 청년회들은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기성운동 ‘타도’를 결의하고 있었다. 이로써 민립대학기성운동은 사실상 지방 조직을 상실한 셈이었다.
또 이 운동은 부호들의 후원에 크게 의지하고 있었는데, 이 즈음 각 지방의 부호들은 지방자치 실시 등으로 점차 친일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부분적이나마 민족적 색채를 띠고 있는 이 운동에 그들이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당시 각 지방에서 알게 모르게 가해진 관헌의 방해공작도 모금활동에 큰 지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부호들이 이에 적극 참여하는 것을 견제하였다. 그리고 총독부측은 1923년 관립대학 설립 방침을 발표하고, 11월 대학창설준비위원회를 만들었다. 1924년 봄에는 일본 추밀원회의에서<경성제국대학령>이 통과되었고, 1925년 6월에는 개교를 보기에 이른다. 총독부측의 경성제국대학 설립이 민립대학설립에 대한 견제로부터 시작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여기에 덧붙여 1923년 9월 관동대지진과 1924·1925년 계속된 旱災와 홍수는 모금활동을 사실상 더 이상 계속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결국 이 운동은 1924년 여름 이후 중단상태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