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물산장려운동의 전개
위에서 본 것처럼 물산장려운동이 지방과 학생층으로부터 시작되자 이에 자극받은 서울의 사회운동 인사들도 1923년 1월 9일 ‘조선물산장려회’의 발기준비회를 구성하였다. 20일에는 발기총회가 있었고, 25일에는 창립총회가 조선청년회연합회 건물에서 열렸다. 이는 물산장려운동의 본격적인 개막을 알리는 것이었다. 조선물산장려회는 그 취지문에서 “조선사람의 물산을 장려하기 위하여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고, 첫째 조선사람은 조선사람이 지은 것을 사서 쓰고, 둘째 조선 사람은 단결하여 그 쓰는 물건을 스스로 제작하여 공급하기를 목적으로 하노라”라고 그 목적을 밝혔다.053)
물산장려회를 주도한 인물은 당시 이사진을 통해 확인된다. 창립총회에서 선출된 초대 이사와 4월 총회시 추가로 선출된 이사진 30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창립총회시 이사:兪星濬(이사장)·薛泰熙·鄭魯植·金喆壽·金潤秀·白寬洙·羅景錫·金東赫·李順鐸·朴鵬緖·金德昌·李鍾麟·李甲成·朴東完·李得秊·韓仁鳳·李時琓·林敬鎬·高龍煥·吳玄洲 (이상 20명). 4월 총회시 추가 선임된 이사:李東植·朱翼·沈宜成·金秉濬·崔元淳·宋鍾愚·吳尙俊·辛泰嶽·李璜珪·玄僖運·高裕相·張斗鉉 (12명, 金東赫 吳玄洲는 사임).
이들 물산장려운동의 주도층 가운데에는 일본 유학을 하고 돌아온 신지식층이 많았다. 그 가운데 鄭魯植은 1922년 4월 이후 서울청년회 등이 탈퇴한 조선청년회연합회의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었고, 金喆壽·高龍煥·李時琓 등은 3대 집행위원, 辛泰嶽은 4대 집행위원이었다. 성향별로 보아서는 부르주아민족주의자가 다수를 차지했지만, 사회주의경제학을 공부한 李順鐸과 羅景錫, 그리고 길드사회주의적 성향을 지닌 설태희 등도 끼어 있었다. 실업인으로서는 金德昌(동양염직)·張斗鉉(동양물산)·金潤秀(경성상회)·高裕相(경성 안동서관) 등이 끼어 있었다. 김덕창은 1910년대에도 조선산직장려계에 참여한 바 있었고, 한말부터 조선의 토착 면직업을 이끌어 온 인물이었다. 김윤수와 장두현은 종로의 대표적인 포목상 혹은 무역업자들이었다. 물산장려회에는 친일적인 인사는 거의 없었지만, 이사장 兪星濬은 당시 경기도 참여관으로 있는 인물이었다.
서울에서 조선물산장려회가 조직되자 지방에서도 이와 관련된 많은 단체들이 조직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물산장려회·자조회·토산장려회 등의 이름으로 관련 단체들이 조직되었는데, 그 조직을 주도한 것은 각 지방의 청년회들이었다. 청년회가 조직된 군 단위의 지역은 대부분 관련 단체가 조직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특기할 것은 각 지방의 관련단체들이 서울의 조선물산장려회의 지부의 형식을 띠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러면 물산장려운동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서울의 조선물산장려회는 창립시 만든<헌칙>제3조에서 “본 회는 조선물산을 장려하며 조선인의 산업을 진흥하야 조선인의 경제상 자립을 圖함을 목적함”이라고 천명하였다.054) 그리고 會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세칙 2조에서는 産業獎勵·愛用獎勵·經濟的 指導를 그 구체적 방안으로 제시하였다.055) 물산장려회는 또 창립 후 곧 제1기 실행조건을 정하였는데, 그것은 의복의 경우 남자는 周衣, 여자는 치마를 음력 정월 1일부터 조선인 산품 또는 가공품을 염색하여 착용할 것, 음식물에 대해서는 식염·설탕·과일·청량음료를 제외하고는 모두 조선물산을 사용할 것, 일용품 가운데 조선인 제품으로 대용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이를 사용할 것 등이었다.056) 즉 제1기의 운동방침은 ‘애용장려’, 즉 토산애용의 대중 계몽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
당시 물산장려운동의 방향을 둘러싸고 두 가지 견해가 있었다. 하나는 애용장려를 먼저 선행하고 뒤에 생산장려(산업장려)를 병행하자는 견해였고, 다른 하나는 애용장려보다 생산장려에 더 비중을 두자는 견해였다. 전자의 견해는 “순서로 보면 생산이 있어야 소비가 있을 것이지만, 생산을 장려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공장을 경영해야 하고, 이에 상당한 자금과 실력, 용기가 필요하므로 현재 상황에서는 어렵다고 보고, 먼저 소비를 장려하여 일반인에게 자작자급의 관념을 유발하는 데에 중점을 두자”는 것이었다. 즉 애용을 장려하면 자연 생산자가 늘어날 것이라는 견해였다.057) 한편 후자의 견해는 “생산물은 여전한데 소비에만 주력하면 경제학 원칙을 들 것도 없이 물가만 등귀할 것이므로 생산을 장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애용장려운동을 위해서는 먼저 생산장려, 즉 기존 공장의 기술과 품질의 개선, 그리고 신규 공장의 설립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058) 1923년 조선물산장려회 창립 초기의 운동방침은 대체로 볼 때 애용장려를 기본으로 하고 생산장려를 병행한다는 입장으로 정해졌고, 이는 그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059)
물산장려회측은 애용장려를 위한 대중계몽운동으로서 1923년 2월 16일 설날의 전국적인 시가행렬을 계획하였다. 이에 따라 각 지방에서도 이미 창립된 물산장려단체들과 각 지방청년회들이 설날의 물산장려행렬에 대중이 적극 참여해줄 것을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다. 그러나 2월 14일 서울의 종로경찰서는 물산장려의 선전행렬을 금지한다는 통첩을 보내 선전행렬 계획은 중지되었다. 다만 평양에서는 당일 경찰의 감시하에 간단한 선전행렬이 있었고, 충북 영동에서는 2월 9일, 전남 고흥에서는 3월 1일 각각 선전행렬이 있었다. 선전행렬이 좌절되자 각 단체들은 주로 강연회를 통한 선전계몽운동에 나섰다. 서울에서는 물산장려회 주최로 2월 16일 천도교강당에서 강연회가 열렸으며, 각 지방에서도 강연회가 잇따라 열렸다.
물산장려운동에는 ‘물산장려회’·‘토산장려회’ 등의 이름을 내건 단체만 참여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조선청년회연합회는 이미 1922년 4월 제3회 총회 때부터 산업운동의 실행을 선전하고 있었고, 12월에는 물산장려의 표어를 현상 모집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조선청년회연합회의 집행위원장을 비롯한 중요 인물들이 물산장려회의 이사로 참여할만큼 조선청년회연합회는 이 운동에 적극적이었다. 또 각 지방의 청년회들도 물산장려회의 조직을 주도하기도 하였고, 청년회가 직접 물산장려를 위한 각종 선전활동을 펴기도 하였다. 한편 당시 전국 각지에서는 ‘금주·단연·저축’을 구호로 한 소비절약운동이 일어나 이와 관련된 각종 단체가 만들어져 물산장려운동을 측면에서 지원하였다.
이같은 계몽운동의 성과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었을까. 비록 일시적이긴 하였지만 ‘토산장려’·‘자작자급’ 등의 구호는 조선 물산의 소비를 크게 자극하였다. 예를 들어 帽子의 경우 일본·중국·구미산보다 조선 토산이 크게 유행하여 경성 공평동의 한 모자공장은 음력 정월 이튿날부터 40일 동안 3,800여 개의 모자를 팔았고, 4월 초에는 하루 100개씩의 모자를 만들어야 하였다. 그것은 각 지방 청년단체로부터 단체 주문이 많았기 때문이었다.060) 가장 호황을 누린 것은 직물산업이었다. 양복이나 비단옷보다 무명 周衣가 크게 유행하여 무명과 광목을 생산하는 공장과, 특히 이를 취급하는 상인들은 큰 호황을 누렸다. 3월 초 무명 가격은 이전에 매필 2원 20전 전후였으나, 나중에는 4원 10전으로 두 배 가까이 올랐던 것이다. 유통과정에서의 이같은 폭리로 조선상인들은 큰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인 직물업 생산업자들도 이 호황을 놓치지 않기 위해 自社의 상품을 선전하는 데 온갖 힘을 기울였다. 경성방직은 잡지≪동명≫에 실린 광고에서 “조선을 사랑하시는 동포는 옷감부터 조선산을 쓰십니다. 처음으로 조선 사람의 자본과 기술로 된 광목은 삼성표 삼각산표 광목”이라고 선전하였다.061) 김덕창의 동양염직도 잡지≪개벽≫에 실린 광고에서 “外貨를 배척함보다 국산을 장려하여야, 신 발명술을 공부함보다 모방성을 길러야 함이 우리의 백년대계”라고 주장하고, 새로이 셔츠부를 신설하고 일본에서 조선인기술자를 초빙하여 메리야쓰와 자켓트를 최신 編造法으로 생산하고 있음을 선전하였다.062)
그러나 당시 조선인자본의 직물업은 극히 취약하였다. 우선 규모가 어느 정도 되는 공장은 경성방직(김성수)·조선견직(민규식)·대창직물(백낙원)·동양염직(김덕창) 등이 있을 뿐이었다. 또 1년간 전 조선의 무명·삼베·모시의 소비액 1억 1,414만 7,621원 가운데 조선산(이 가운데에는 일본인 공장의 생산액도 포함)은 4,465만 6,442원을 차지하는 데에 지나지 않았다.063) 따라서 설사 조선의 대중들이 모두 조선물산만 사용하겠다고 나선다 해도 그 수요를 감당할만한 생산능력은 전혀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때문에 일시적인 수요 폭발은 조선인 공장에서 생산된 직물의 시장가격만 올려놓았고, 그로 인한 이득은 대부분 상인들에게 돌아가고 말았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서 물산장려회측이 제시한 것이 소비조합 운동이었다. 물산장려회는 창립시부터 소비조합의 설립을 논의하고 이를 추진하였다. 당시 발기회는 도시와 각 군의 면단위까지 소비조합을 설립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에 따라 2월 13일 열린 이사회는 조선물산경성소비조합을 조직하기로 결정하고, 설계위원으로서 김철수·이순탁·나경석을 선출하고, 3월 2일의 이사회에서는 본회 이사 전부를 소비조합 창립준비위원으로 하고 창립준비위원은 1股 5원씩 출자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5월 3일의 이사회는 소비조합설립준비위원으로서 나경석 외 4명을 선출하였다. 그러나 기금 마련은 쉽지 않았고, 결국 6월 16일의 이사회는 소비조합 설립안을 보류하기로 결정하고 말았다. 소비조합 설립준비위원의 한 사람이었던 설태희는 물산장려회를 경성총연합-도연합기관-군연합기관-면단위기관 순으로 단계적으로 조직하고 각 면에는 생산조합과 소비조합을 각기 설립하여 매출과 매입을 공동으로 할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다.064) 하지만 소비조합과 생산조합 설립운동은 실패하고 물건가격의 폭등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또 1923년 봄 물산장려운동의 결과 일시적이나마 조선산 상품의 수요가 폭발하였지만, 이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새로운 공장의 생산도 뒤따르지 않았다. 그것은 조선인들의 조선물산 소비운동이 과연 얼마나 지속되어 당시 일본에서 대량으로 수입되고 있던 일본상품들과의 경쟁에서 승리를 보장해줄 것인가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1921년 경부터는 조선에도 불경기여파가 몰아닥쳐 1919년과 1920년에 설립된 조선인 회사들도 문을 닫고 있는 실정이었다.
한편 조선의 방직업은 당시 조선내에 방적회사가 없어 綿絲나 紬絲 등 원료를 모두 일본에서 수입해서 쓰고 있는 형편이었다. 따라서 설사 조선인 자본의 공장에서 생산되는 직물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것이 순수한 조선물산 장려로 이어진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일본 원료를 소비하는 것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또 이처럼 조선 직물업이 원료를 거의 일본에 의지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제 지배자측에서는 물산장려운동을 언제든지 통제할 수 있었다. 따라서 총독부 당국자들은 이 운동이 적극적인 일본상품 배척운동으로 진전되어 정치적 성격을 띠지만 않는다면 별 문제가 없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총독부측에서 보았을 때 적극적으로 일본상품을 배척한다든가 배일을 표방한다든가 하지만 않는다면 물산장려운동은 단순한 하나의 산업운동에 그치는 것이라고 보았고, 따라서 총독부측은 굳이 이 운동을 가로막고 나설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065)
그런데 당시 물산장려운동론자들 가운데에는 절대로 外貨(외국상품)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급진론자와 점진적으로 외화를 사용하는 대신 토산품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진론자가 있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아예 이 운동이 외화배척운동이 아님을 강조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절대적인 외화배척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 점진적인 토산장려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분위기였다. 예를 들어 물산장려운동의 주요 논자 중의 하나인 鮮于全은 “물산장려회가 표방하는 물산장려는 절대적 의미의 물산장려가 아니요, 상대적인 의미의 물산장려, 즉 우리가 사용하고 소비하는 온갖 필요 용품에 대하여 사용효과와 향수이익에 다소 희생이 따르더라도 절대로 없으면 안될 물품 이외에는 토산품으로써 이에 적용하자는 의미의 물산장려”라고 말하였다.066) 또≪동아일보≫도 “吾人이 물산장려를 계획한다 함은 일체 외화를 배척하여 철두철미 원시산업을 복구하자는 것은 아닐 것이니 이 점에 있어서 오인은 점진적 태도를 취하지 아니하지 못할 것은 多言을 不要할 바”라고 말하였다.067) 위의 선우전은 또 “경제운동을 절대로 다른 운동과 혼합하지 아니할 것”, 즉 “경제문제의 연구는 어디까지나 경제의 원칙에 준하여 독립한 범위 내에서 연구할 것”을 주장하고, 이 운동이 결코 배일운동이 아님을 강조하였다.068)
조선의 물산장려운동은 인도의 스와데시(토산장려)운동을 모델로 한 것이었지만, 인도의 경우에는 스와데시운동과 함께 강력한 외화배척운동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조선의 물산장려운동은 외화배척을 구호로 내걸지 않았다. 조선의 물산장려운동론자들은 외화배척은 조선에서는 현실성이 없는 것이며, 또 외화배척의 구호를 내세우는 것은 공연히 총독부측의 경계심만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이 운동이 외화배척운동이 아니라는 점을 누누히 강조하였고, 또 정치적 성격이 개입되어서는 안된다는 점도 누누히 강조하였다.
결국 이같은 성격을 띤 물산장려운동은 1923년 여름이 지나면서 그 열기가 급격히 식어버리고 말았다. 물론 이후에도 물산장려회는 계속 존속하여 그 이름은 1937년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물산장려운동은 1924년 초 물산장려회 창립 1주년 기념강연을 끝으로 사실상 정돈상태에 들어갔다. 앞서도 본 것처럼 물산장려운동은 일차적으로는 조선물산의 소비를 장려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그런데 생산기관의 확장이라는 궁극 목적에는 전혀 접근하지 못한 채 조선물산의 소비운동조차도 불과 반년여 만에 가라앉고 만 것이다. 이 운동이 이렇게 끝나버린 원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원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자본과 기술의 부족으로 인한 일본자본과의 경쟁력 부족이다. 이는 식민지 조선의 토착자본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한계로서 그들은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치권력의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보고 한때 조선산업대회 등을 조직하여 총독부 권력에도 기대를 가져보았으나 그러한 기대는 좌절되었다. 이제 그들은 조선민중에 호소하여 ‘토산장려’로써 정치권력의 보호를 대신해보려 하였으나, 토산장려만으로는 자본과 기술의 부족이라는 문제까지 해결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자본가계급 스스로, 혹은 국가권력의 지원을 통해 해결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그러나 당장 이 문제의 해결방안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취약한 토착자본이 충분한 자본주의적 생산을 통해 토산소비운동을 뒷받침하지 못할 때, 이미 자본제적 상품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생활할 수 없었던 조선민중들은 더 이상 토산소비운동을 지속할 수 없었던 것이다.
둘째, 조직력의 취약이다. 우선 서울의 물산장려회는 서울만의 조직이었을 뿐 지방의 물산장려운동 단체들과는 거의 조직적인 연결을 갖지 못했다. 즉 각 지방의 단체들을 중앙의 물산장려회의 지부로 끌어들이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각 지방의 운동은 모두 개별 분산적으로 일어났다가 가라앉아버리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각 지방에서 이 운동을 뒷받침하고 있던 청년회의 다수가 이 시기 사회주의운동으로 노선을 전환하고 있었기 때문에 물산장려운동은 사실상 하부조직을 상실한 셈이었다. 1923년 초의 시점은 바로 사회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의 분화가 뚜렷해진 시기로서, 3월 말에 열린 조선청년당대회는 물산장려운동 타도를 결의하는 등 당시 사회주의자들은 물산장려운동을 맹렬히 비난하고 있었다. 따라서 물산장려운동은 조직력에서 극히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069)
이러한 요인들 외에도 일제 관헌의 방해, 상인들의 농간에 의한 물가앙등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근본적인 요인으로서는 식민지 지배하에 놓인 조선에서 실력을 길러 국권회복운동의 발판으로 삼자는 구상, 그리고 특히 경제적 측면에서의 실력 양성에 중점을 두자는 실현 불가능한 구상을 들어야 할 것이다. 식민지 지배하에서, 특히 일제 지배하에서 그러한 구상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물산장려운동의 좌절은 그러한 구상이 현실성이 없음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준 것이었다. 일제 지배당국은 조선인 토착자본이 비록 민족적 성격이 아닌 예속적 성격을 띠더라도 극히 한정된 범위 내에서의 성장만을 허용하고 있었다.
1923년 하반기를 기해 조선물산장려운동은 한계를 뚜렷이 드러낸 채 사실상 막을 내렸다. 이후 조선의 토착자본가들은 어떤 길을 걸어갔을까. 조선민중에 의지하여 자본축적의 기회를 얻어보려 하던 그들은 그 기대가 좌절되자 두 가지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 하나는 자력갱생의 길을 계속 모색하면서 자기 존립을 꾀해 나가는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총독부 권력에 본격적으로 접근하여 보호를 구걸하는 길이었다. 조선의 토착자본 가운데 영세자본과 그들을 지원하는 일부 민족주의자들은 전자의 길을 택하였다. 그들은 이후에도 여전히 물산장려회를 지키면서 1937년까지 물산장려운동을 계속하였다. 반면 토착자본 가운데 비교적 규모가 큰 자본과 그들을 대변하던 일부 민족주의자들은 후자의 길을 택하였다.≪동아일보≫는 1923년 말 총독부측에 보호관세의 설치, 보조금의 지급, 기술인력의 양성 등 ‘보다 철저한 보호와 장려’를 요구하였다.070) 그리고 거의 같은 시기 총독부측은 위의 신문과 뿌리를 같이하는 토착자본인 경성방직에 거액의 보조금을 지급하기 시작하였다.071) 이처럼 총독부로부터 ‘보다 철저한 보호와 장려’를 받을 수 있게 된 경성방직의 자본은 이제 정치적으로 일제와 보다 접근하지 않을 수 없었고, 여기서 1924년 1월 초≪동아일보≫는<민족적 경륜>이라는 글을 통해 ‘법률이 허하는 범위 내에서의 합법적 정치운동’을 제창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세인들은 이를 자치운동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독립운동에서 한 단계 후퇴한 타협적인 운동으로서의 자치운동의 제안은 조선사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게 된다.
053) | ≪동아일보≫, 1922년 1월 11·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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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 | <조선물산장려회 憲則>(≪조선물산장려회보:이하≪회보≫≫1-3). |
055) | <조선물산장려회 세칙>(≪회보≫1-3). 이를 보다 자세히 살피면, 산업장려란 조선인의 산업적 지능을 계발, 단련하여 실업에 종사케 하는 것, 애용장려란 조선인의 産品을 愛用撫育하여 조선인의 산업을 융성케 하는 것, 경제적 지도란 조선인의 생활 및 기타에 관하여 경제적으로 건설 또는 개선할 바를 조사하여 그 실현을 지도 관철하는 것이었다. |
056) | 李鍾麟,<本會의 제2회 총회를 경과하고셔>(≪산업계≫4, 1924). 조기준,<조선물산장려운동의 전개과정과 그 역사적 성격>(≪역사학보≫41, 1969), 91쪽 참조. |
057) | 이종린, 위의 글. |
058) | 윤영남,<自滅인가 圖生인가-물산장려운동에 대하야 曰可曰否의 論難을 보고>(≪동아일보≫, 1923년 4월 26일). 이에 대해서는 오미일,<1920년대 부르주아 민족주의 계열의 물산장려운동론>(≪한국사 연구≫112, 2001). |
059) | 방기중,<1920·30년대 조선물산장려회 연구-재건과정과 주도층 분석을 중심으로->(≪국사관논총≫67, 국사편찬위원회, 1996), 131∼132쪽. |
060) | ≪동아일보≫, 1923년 4월 2일,<帽子로 본 土産運動>. |
061) | ≪동명≫2-20(1923), 3쪽. |
062) | ≪개벽≫31(1923). |
063) | ≪동아일보≫, 1923년 2월 9일,<物産獎勵와 織物界現況>. |
064) | 梧村,<物産獎勵에 關하야>(≪동아일보≫, 1923년 3월 10·12일). |
065) | 丸山鶴吉,<朝鮮現下病弊>(≪在鮮四年有餘半≫, 1923), 294쪽. |
066) | 鮮于全,<當然히 起할 吾人의 經濟運動>(≪개벽≫33, 1923), 42쪽. |
067) | ≪동아일보≫, 1923년 1월 24일, 사설<조선물산장려운동의 단서-이론에서 실제운동으로>. |
068) | 鮮于全,<經濟思想과 經濟運動의 發現 如何>(≪개벽≫30, 1922), 18쪽. |
069) | 사회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의 물산장려운동 찬반 논쟁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고된다. 박찬승,≪한국근대정치사상사연구≫(역사비평사, 1992), 277∼289쪽. 이애숙,<물산장려운동과 민족주의, 사회주의>(≪논쟁으로 본 한국사회 100년≫, 역사비평사, 2000). |
070) | ≪동아일보≫, 1923년 12월 16일, 논설<更히 朝鮮의 産業政策에 대하야>. |
071) | 경성방직은 제5기(1923. 4∼1924. 2)의 시기에 총독부로부터 당시 순이익의 1,088%에 해당하는 16,042원의 보조금을 받았다(권태억,≪韓國近代綿業史硏究≫, 일조각, 1989, 266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