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1. 6·10만세운동
1926년 隆熙皇帝(純宗) 昇遐를 계기로 일어난 6·10만세운동은 3·1운동 때와 같이 전국적 만세운동을 일으키려 한 운동이었다. 때문에 ‘제2의 만세운동’이라고도 하지만, 이들 두 운동은 배경이나 주체·이념·규모 등에 이르기까지 차별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예컨대 3·1운동이 제1차 세계대전 후 人道主義가 부상하며 세계 개조의 분위기가 무르익던 상황에서 일어난 것이라면,219) 6·10만세운동은 제국주의적 지배질서가 공고해진 상황에서 계획된 것이었다. 3·1운동의 계획주체가 종교지도자 같은 자유주의자였다면, 6·10만세운동은 자유주의자와 더불어 사회주의자가 전면에 나섬으로써 새로운 양상을 보였다. 그리고 3·1운동 때의 지도이념이 자유주의 사상이었다면, 6·10만세운동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사상이 민족독립에 귀결되면서 결합된 지향을 보였다.
6·10만세운동 직후 安昌浩는 중국 상해에서 열린 6·10만세운동보고회에서 6·10만세운동이 “전연 자각적으로 일어난 것”이며 “이의 실현을 위해서는 全民衆의 중심이 될 통일기관”을 만들어야 한다면서220) 6·10만세운동에서 드러난 민족통일전선의 이념과 노선을 높이 평가한 바 있었다. 또한 조선공산당은<조선공산당선언>에서 6·10만세운동을 민족혁명유일전선의 첫 기초로221)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즉 6·10만세운동은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발전양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사회주의사상의 유입과 더불어 꾸준히 제기된 민족통일전선의 이념과 노선에 새로운 전환점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219) | 趙東杰,<3·1運動의 理念과 思想-독립선언서와 선언자의 비교 분석->(≪韓國獨立運動의 成立과 獨立運動史 硏究≫, 지식산업사, 1989). ―――,<3·1운동 전후의 民族知性>(≪韓國民族運動의 발전과 獨立運動史 硏究≫, 지식산업사, 19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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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 國會圖書館 編,≪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1976), 601∼602쪽. 당시 상해에서는 독립신문사와 혁명청년사 등의 발기로 6·10만세운동에 대한 연설회를 개최하였다. |
221) | ≪불꽃≫제7호, 1926년 9월 1일. 이들은 6·10만세운동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민족해방운동을 위하여 適宜한 투쟁방침을 세우고, 조직적 희생적으로 진행한 것이 확증’되었다고 주장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