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조선혁명군(정부)의 해체와 동북항일연군 합류
만주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 관동군은 1936년 2월 이후 소위 ‘제3기 치안숙정계획’을 세우고 반만항일세력을 제거하려 하였다. 이 같은 관동군의 계획에 호응해 괴뢰 만주국 軍政部측도 그 해 4월<치안숙정 3개년계획 요강>을 제정했다. 이후 일·만 당국은 이 공작의 대상으로 남만의 동변도 지역을 지목하고 같은 해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동변도 治本공작’이라는 항일세력 말살공작을 추진하였다.661) 이 때문에 왕봉각 등의 중국인 의용군과 조선혁명군(정부), 중국공산당 계열의 동북항일연군 등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조선혁명군은 1935년 9월 중한항일동맹회를 조직하여 왕봉각 등과 연대투쟁하였으나, 일제측의 끈질긴 탄압과 이간공작, 주민들과의 분리정책 등으로 날이 갈수록 어려운 조건에 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조선혁명군은 이미 그 해 1월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대표를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사령부에 파견하여 연합작전을 요구했다.662) 그 후 조선혁명군은 중국공산당 만주조직에서 영도하는 동북인민혁명군과 연대투쟁하기 시작했다. 보기를 들면 1935년 4월 중순 총사령 金活石이 군정부 직속 위수대대를 거느리고 桓仁縣 북쪽 崗山嶺에서 적군과 교전할 때,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군장 楊靖宇 부대와 적을 협공하여 공동투쟁하였던 것이다.663) 또 같은 해 10월 本溪縣에서 일부 부대가 동북인민혁명군과 함께 싸웠다.664)
그 뒤 조선혁명군은 왕봉각 등의 의용군과 공동투쟁하는 한편, 동북인민혁명군(1936년 8월까지 동북항일연군으로 개편)과도 공동투쟁하였다. 이 부대는 1936년 2월 하순 통화현 上龍頭에서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1사와 연합하여 만주국군 1개 중대와 격전을 치렀다.665) 또 같은 해 3월 하순 조선혁명군 4중대장 金允杰이 지휘하는 부대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사령관 양정우 부대와 같이 환인현 缺石嶺에서 이동중인 일본군경 합동 환인경비대를 기습하여 큰 손실을 입혔다. 4월 초에는 조선혁명군 제2군 참모 崔明이 50여 명의 대원을 거느리고 동북인민혁명군 1군과 왕봉각 휘하부대 등 3자의 회의에 참가하여 연합투쟁방침을 결의하였다.666) 이 밖에 관전현 下露河 부근에서 배를 습격하여 1척을 격침시키는 등의 연합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조선혁명군정부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동북항일연군과 공동투쟁하기로 정식으로 결정한 것은 1936년 10월이었지만,667) 이미 그 이전부터 이처럼 적지 않은 사례의 연대투쟁이 실현되었다.
조선혁명군정부는 일제와 만주국 군경의 탄압이 더욱 심해짐에 따라 그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고심하였다. 그리하여 1935년 9월 제14회 중앙집행위원회를 열고 종전의 민간인 출신 總領 고이허 대신 대한제국 무관(장교) 출신의 김동산을 새로운 총령으로 선출하여 군사부문 영도를 강화하였다.668) 이를 계기로 조선혁명군의 비중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응 조치에도 불구하고 1936년 1월부터 3월까지 군정부의 지방지도원 및 후원자 118명이 일제 당국에 대거 검거되는 큰 손실을 입게 되었다.669) 이는 군정부의 생존기반에 결정적 타격이었다. 또 같은 해 3월 총령을 지낸 핵심적 이론가 고이허가 체포되는 등 여건은 더욱 악화되었다. 더구나 조선혁명군의 국내 진입작전에 큰 타격을 받은 조선총독부 치안당국은 1937년 초부터 만주국측의 토벌공작에 부응하여 만주국 군경과 협동하여 조선혁명군에 대한 일대 공략을 도모하였다.
1937년 3월 중순 경 조선혁명군은 약 200명의 부대규모를 유지하며 신빈과 환인현의 접경지대에 있는 新開嶺에 튼튼한 산채를 구축하고 국내로 진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670)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일제의 평북 경찰부는 초산과 위원경찰서에서 차출한 100여 명의 경관을 출동시키고, 만주국의 집안·환인 경찰 및 관동군 정보기관과 협동하여 조선혁명군 본부에 대한 일대 공격에 나섰다. 이들 합동 ‘토벌대’는 군용기까지 동원하여 3월 하순부터 약 10일 간에 걸쳐 조선혁명군 본부를 공격하였다.671) 한편 조선혁명군 총사령 김활석은 1,004미터 고지에 위치한 요새지에서 이들 적을 상대로 100여 명의 부하들을 직접 진두지휘하며 완강히 저항하였다. 그러나 조선혁명군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장비와 병력을 앞세운 일·만 군경에 중과부적으로 큰 손실을 입고 패퇴하고 말았으며, 오랫동안의 근거지였던 산채도 함락되었다. 특히 3월 25일의 전투는 10시간이나 계속되었는데, 이 전투에서 조선혁명군은 9명이 전사하고 산채 3개소가 불타고 말았다.672)
이 3월 하순 일제의 대공세로 조선혁명군은 치명적 타격을 받았고, 그 이후의 투쟁도 큰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 결과 조선혁명군 제1사 사령 한검추와 교육부장 尹一波(본명 尹明浩, 황포군관학교 출신) 등 51명의 대원은 그해 4월 초순 일제에 투항하고 말았다.673) 또 5월 21일에는 조선혁명군정부 총령 김동산도 더 이상의 단독활동이 곤란하여 투항하였다. 김동산의 투항은 사실상 조선혁명군정부의 종말을 고하는 것이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그 뒤 “이에 따라 20여 년의 오랜동안 조선독립을 꿈꾸며 용맹무쌍하게 활동, 치안의 암이라고 일컬었던 조선혁명군도 드디어 재기불능에 빠졌다”라고 하며 그 성과를 매우 강조하였다.674)
그러나 조선혁명군의 활동이 이로써 끝난 것은 아니었다. 총사령 김활석이 100여 명의 남은 병력을 이끌고 투쟁을 계속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독자적 활동이 거의 불가능하였다. 이러한 곤란한 현실에 직면하여 일부 간부들은 남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중국공산당계 동북항일연군에 합류하여 싸울 것을 주장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그에 반대하였다. 결국 박대호와 최윤구 등은 1938년 2월 6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양정우가 인솔하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에 참가하여 투쟁을 계속하게 되었다.675) 이 때 이들은 한인 獨立師로 편제되어 조선혁명군의 명맥을 일부나마 유지할 수 있었다.
한편 김활석은 30여 년이나 면면히 계승된 독립군으로서의 조선혁명군 전통과 명의를 포기할 수 없어 20∼3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독자적으로 활동했다. 사실 김활석은 1935년 7월 5일 남경에서 성립한 통일전선체 조직 조선민족혁명당의 중앙집행위원이었고, 그가 이끈 조선혁명군은 명의상으로는 한 때 이 당의 당군으로 편제되어 있었다.676) 따라서 그는 중국관내에 있던 민족해방운동 세력과 협의 없이 장차 조선혁명전쟁(독립전쟁)을 수행할 이 독립군부대를 해산시킬 수 없었다. 때문에 그는 만주 조선혁명당을 계승한 조선혁명군의 독자성을 유지하며 최후까지 고군분투했지만,677) 1938년 9월 6일 결국 제7단장 鄭匡鎬와 함께 만주국 安東公署에 체포되어 항복하고 말았다.678) 이로써 ‘조선독립’을 직접 표방한 만주 최후의 민족주의계 독립군인 조선혁명군도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그러나 김학규와 최동오·柳東說 등 중국관내로 합류한 일부 인사들은 조선혁명당·군의 이념을 계승하며 민족해방운동을 지속하였다.
동북항일연군과 일정한 협조관계를 유지하거나 나중에 이 부대에 합류한 조선혁명군의 일부 참가자들은 경우에 따라 중국공산당 만주조직이 항일민족통일전선을 표방하며 조직한 독립운동 단체 ‘재만한인조국광복회’에도 가입하여 활동했다. 특히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의 주요간부들은 조국광복회가 창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축하서신을 보내는 한편, 항일투쟁에서 긴밀한 연계를 유지하자고 요청하기도 했다.679) 또 동북항일연군에 한인 독립사의 편제형태로 합류한 조선혁명군의 남은 대원들도 줄기차게 일제의 ‘토벌’에 대항하여 싸웠다. 그러나 동북항일연군 참모로 싸우던 최윤구가 1938년 12월 전사하는 등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희생되고 말았다.680) 그러나 박대호·조화선이 거느리는 조선혁명군 출신 대원들은 1941·1942년 경까지 완강하게 투쟁하는 기개를 보였다. 다만 김명준과 洪春秀 등 극소수의 조선혁명군 대원이 생존하여 1940년 경 소련으로 도피한 뒤,681) 국제지원 세력의 도움을 받으며 조국의 해방을 준비하기도 했다. 일제가 패망한 뒤 김명준 등은 북한에 개선하였다.682)
또 金應基와 金炳奎 등 일부 지사들은 조선혁명군이 해체된 뒤에도 중국인 孫廣厚가 조직한 항일무장대 ‘滿天紅’ 부대에 조선혁명군 출신 대원을 이끌고 가담하여 1944년 경까지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683) 이와 같은 1930년대 남만지역 조선혁명군의 활동은 투쟁강도나 그 끈질긴 지속성, 중국측 항일세력과의 연대투쟁 등 생존전략, 그리고 특정이념에 얽매이지 않는 폭넓은 포용성 등 우리에게 귀중한 역사적 교훈을 주고있다고 하겠다.
661) | 任城模,<1930년대 일본의 만주지배정책 연구>(연세대 석사학위논문, 1990), 4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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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2) | <東北抗日鬪爭的形勢與各抗日部隊的發展及其組織槪況>(≪東北地區革命歷史文件滙集≫甲 44, 1990), 351쪽. |
663) | 黃龍國, 앞의 글(1990), 241쪽. |
664) | 吉林省 公安廳 公安史硏究室 編譯,≪滿洲國警察史≫(長春, 1990), 510쪽. |
665) | 黃龍國, 앞의 글(1990), 242쪽. |
666) | 滿洲國 軍政部 顧問部,≪滿洲共産匪の硏究≫1, 418·447∼448쪽. |
667) | <新派秘 第342號 昭和 12년 6월 19일 在新京服部昇治 朝鮮總督府 警務局長殿 朝鮮革命軍の狀況に關する件>(日本:山口縣문서관 소장≪林家史料≫), 800쪽. |
668) | <新派秘 第342號 昭和 12년 6월 19일 在新京服部昇治 朝鮮總督府 警務局長殿 朝鮮革命軍の狀況に關する件>(日本:山口縣문서관 소장≪林家史料≫), 820∼821쪽. |
669) | 吉林省公安廳 公安史硏究室 編譯,≪滿洲國警察史≫(長春:1990), 318쪽. |
670) | ≪조선일보≫, 1937년 3월 23일. |
671) | <昭和 12년 3월 26일 平安北道 警察部長→朝鮮總督府 警務局長 報告>(≪昭和 12年 2月∼3月 國境討匪狀況≫(韓國 國家報勳處 寫本所藏). |
672) | 姜德想·梶村秀樹 編,≪現代史資料 朝鮮 6≫30, 351쪽. ≪每日申報≫, 1937년 3월 27일. ≪조선일보≫, 1937년 3월 30일. |
673) | 吉林省公安廳 公安史硏究室 編譯, 앞의 책, 318쪽. |
674) | 朝鮮總督府 警務局,<第73回諸國議會說明資料>(1937), 59쪽. |
675) | 張世胤, 앞의 글(1990), 333쪽. 吉林省公安廳 公安史硏究室 編譯, 앞의 책, 335쪽. |
676) | 朝鮮總督府 警務局,≪高等警察報≫5(1936), 84∼85쪽. 재만 조선혁명당이 민족혁명당에 합류할 때 당원은 1,000여 명, 기관총·소총 등 각종 무기 400여 정, 무장대원(조선혁명군) 500명으로 파악되었는데, 약간 과장된 것으로 생각된다. |
677) | 1935년 말 재만 조선혁명당은 중국관내 민족운동세력의 만주투쟁세력 지원이 어렵게 되자 민족혁명당 가입사실을 부정하고 독자성을 유지하기로 했다(金學奎, 앞의 글, 1988, 594쪽). |
678) | 吉林省公安廳 公安史硏究室 編譯, 앞의 책, 318쪽. |
679) | 이에 대해 “조국광복회 창립이 선포된 직후 조선혁명군정부 참모장으로 있던 윤일파는 우리에게 서한을 보내여 조국광복회 창립을 축하하고 앞으로 반일전선에서 긴밀한 연계를 지을 것을 희망해왔다.”고 회고한 기록이 있다. 이 서신은 조국광복회의 기관지≪3·1월간≫창간호(1936)에 수록되었다(≪조선혁명박물관≫도록, 평양:조선외국문출판사, 1963;신주백,<과거 기억과 현재의 相存-1930년대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사>,≪한국민족운동사연구≫27, 2001, 315쪽에서 재인용). |
680) | 현재 중국 길림성 樺甸市 柳樹河子에는 최윤구의 전사를 추모하는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즉 1990년 중국공산당 樺甸市위원회와 樺甸市 인민정부는 “동북항일연군 小柳樹河子 전적지”라고 새겨진 조그만 기념비를 세웠던 것이다. 다만 최윤구의 이름이 정확히 기재되지 못하고 崔雄國(최윤구의 중국식 발음 借字)이라고 잘못 각인되어 있는 실정이다. 이 비석의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1938년 말 양정우가 거느리는 抗聯 1로군 警衛旅와 少年鐵血隊는 紅石砬子 강남 小柳樹河子에서 야간을 틈타 僞靖安軍(만주국군)을 기습하여 적군 100여 명을 섬멸하고 적기 1대를 격추시켰다. 전투중 1로군 참모 崔雄國이 장렬히 희생되었다”(최윤구 집안 崔仁彬씨 현장답사 후 사진 및 자료제공). |
681) | 辛珠柏, 앞의 책(1999), 417쪽. |
682) | 김명준은 1910년생으로 평안북도 출신이었다. 원래 농업에 종사했으며, 동북항일연군 제1군 警衛旅 소속으로 소련으로 월경하였다. 1938년 3월 동북항일연군에 가입한 뒤 그 해 8월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楊昭全·李鐵環 編,≪東北地區朝鮮人革命鬪爭資料滙編≫, 瀋陽:遼寧民族出版社, 1992, 940쪽). 그는 북한으로 귀환한 뒤≪항일빨찌산 참가자들의 회상기≫3권에<광명의 길을 찾아서>라는 회상기를 남겼다. 해방 이후 행적은 잘 알 수 없다(張世胤, 앞의 책, 1997, 275쪽). |
683) | 曹文奇, 앞의 책(1998), 318∼319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