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일본지역 민족운동
재일조선인 민족해방운동은 1920년대 말 30년대 초를 거치면서 새로운 모습을 띠어 갔다. 물론 여기에는 내적인 요인보다도 외적인 요인이 우선적으로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그것은 당시 식민지·반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이 배태할 수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상황인지도 모르겠다. 코민테른(Comintern)의 절대적인 권위에 당시의 혁명가들은 독자적인 노선을 견지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했던 것이다.
조선인의 도일을 촉진시킨 요소는 1930년대에도 상존했다. 그것은 내부적인 요소와 외부적인 요소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내부적인 요소로는 가뭄과 수해를 들 수 있고, 외부적인 요소로는 중국인 노동력의 수입을 거론할 수 있다.
먼저 내부적인 요소를 보면, 1930년대의 경우도 농가 영농수지나 부채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가뭄과 수해 등 자연환경이 농가에 미치는 피해도 1920년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해와 가뭄은 1930년대에도 그치지 않았다. 1930년대 가장 큰 피해를 주었던 가뭄은 1932년과 1935년의 가뭄이었다. 1932년 가뭄은 이른 봄부터 시작되어 남부지방에 큰 타격을 주었다. 곡창지대로 수리시설이 잘 갖추어진 경상도·전라도에서도 수확의 절반이 감소한 것은 물론이고 수만 명의 이재민을 냈다. 조선총독부가 8월부터 구제를 시작했으나 경상남도의 경우에만 7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869)
1935년의 가뭄은 3월부터 5월까지 북부지방에, 6월부터 8월까지는 남부지방에 피해를 주었다. 피해는 전국적이었으나 이 가운데 충청도와 전라도의 피해는 가장 심했다. ‘30년만의 가뭄’이라고 할 정도의 재해로 전라남도에서만 10만 호의 이재농가가 발생했고, 전라북도에서는 6만 7,000호가 이재농가로 기록되었다. 이 가뭄의 여파는 이듬해까지도 가시지 않아 1936년의 춘궁기까지 이어졌다.870) 이러한 가뭄은 농민의 이촌을 촉진함은 물론 조선인의 도일에도 영향을 미쳤다.
외부적인 요소로는 중국노동자의 유입, 높은 실업률, 다양해진 직업구성 등으로 설명될 수 있는데, 이러한 요소는 1930년대 조선인의 도일을 재촉하였다. 조선총독부는 1930년 12월에 중국인 이민노동자 사용인원을 제한하는 법적인 규제를 시행하고, 전국 각지에 직업소개소를 설치하며, 궁민구제·토목사업을 실시하는 등 국내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조선인의 도일을 진정시킬 수는 없었다. 이상과 같은 요소는 1930년대 재일조선인의 증가를 초래하는데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1930년대 이후 재일조선인 민족해방운동은 방향전환기, 1930년대 전기와 후기, 그리고 강제연행기로 잠정적인 구분을 통해 운동의 양상을 정리해 볼 수 있다. 이 때 시대구분의 우선적인 고려의 축은 강제연행이 실시된 1939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