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중국관내 무장세력의 광복군 편입
(1) 한국청년전지공작대의 편입
광복군이 창설되기 이전에, 중국관내 지역에서 결성되어 활동하던 무장세력들이 있었다. 韓國靑年戰地工作隊(이하 전지공작대)와 朝鮮義勇隊가 그것이다. 이들 무장세력은 광복군이 창설된 후, 각기 다른 과정을 거쳐 광복군에 편입하였다. 전지공작대의 편입이 먼저 이루어졌다.
전지공작대는 무정부주의계열의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무장세력이다. 1939년 중국관내 독립운동 세력들이 기강에 집결하였을 때, 그 동안 여러 곳으로 흩어져 있던 무정부주의계열의 청년들도 한 곳에 모이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중국군에 복무하거나 무정부주의자연맹에서 활동하던 羅月煥·李何有·朴基成 등은 자신들의 독자적인 활동방향을 모색하였고, 그 결과 1939년 11월 11일 重慶에서 대원 30여 명이 나월환을 대장으로 하여 전지공작대를 결성하였다.930)
전지공작대는 결성 직후 섬서성 서안으로 이동하였다. 중국인 아나키스트의 소개로 서안에 있던 중국 제34집단군 사령관 胡宗南과 연계를 맺고, 대원들이 모두 서안으로 이동한 것이다. 서안으로 이동한 전지공작대는 호종남의 지원과 협조를 받게 되었다. 전지공작대 대원들은 제34집단군에서 운영하는 중앙전시간부훈련단 제4단에 한국청년특별훈련반으로 입교, 3개월 과정의 군사훈련을 받고 중국군과 함께 활동하였다.931)
전지공작대는 중국 제34집단군의 지원을 받아 초모활동을 전개하면서 세력을 확대하였다. 1940년 5월부터 金東洙·李海平 등의 대원들이 제34집단군 太行山 유격대에 배속되어, 일본군 점령지역에 들어가 한인청년들을 대상으로 병력을 모집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의 초모활동은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들은 일본군 제36사단의 주둔지인 潞安縣을 중심으로 新鄕·焦作·修武 등지에서 초모활동을 전개하였고, 1940년 말 약 100여 명에 달하는 대원을 확보하게 되었다.932)
이와 같이 전지공작대가 서안을 거점으로 적후방에서 초모활동을 전개하며 세력을 확대하고 있을 무렵, 임시정부에서 광복군을 창설하였다. 광복군을 창설한 임시정부에서는 전지공작대를 광복군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교섭을 전개하였던 것 같다. 그 과정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대장인 나월환을 중경으로 불러 전지공작대의 포섭을 시도하였다고 한다.933)
결국 전지공작대는 광복군으로 편입하였다. 전지공작대에서는 “우리의 軍事力量을 國軍인 광복군에 집중하여 그를 健全發展시키는 데서만 우리의 혁명목적을 달할 수 있다”고 하면서,934) 광복군 편입을 결정한 것이다. 전지공작대의 광복군 편입은 1941년 1월에 이루어졌다. 1월 1일 新年 團拜式이 끝난 후, 서안시내에 있는 전지공작대 본부에서 임시정부 군무부장 曺成煥과 서안총사령부 총사령 대리 黃學秀를 비롯하여, 광복군 총사령부 간부와 전지공작대 대원들이 참가한 가운데 제5지대 성립식을 거행하였다.935) 전지공작대는 광복군에 편입, 제5지대로 편제되었다.
전지공작대의 편입과 이에 따른 제5지대의 편성은 창설 초기 광복군이 거둔 가장 커다란 성과였다. 100여 명의 대원을 확보하고 있던 전지공작대가 광복군에 편입됨으로써 광복군의 병력이 크게 증강된 것이다. 그리고 제5지대가 성립됨으로써 광복군은 창설 초기에 단위부대로 4개 지대를 갖추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