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연합군과의 공동작전
광복군이 창설되어 활동을 시작한 1940년대는 세계정세가 급변하면서 독립운동의 객관적 조건이 유리하게 조성되고 있었다. 1937년 중국대륙을 침략한 일제는 戰線을 동남아시아 일대로 확대해가고 있었으며, 1941년 12월에는 미국의 해군기지인 진주만을 기습공격하여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것이다. 미·일간에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즉각 일본과의 전쟁을 선포하였다. 1941년 12월 10일 主席 김구와 외무부장 조소앙 명의로<大韓民國臨時政府對日宣戰聲明書>를 발표,945) 임시정부도 일본과 전쟁에 돌입한다는 것을 대내외에 선언한 것이다.
임시정부의 군사활동 방향도 연합군과의 공동작전으로 설정되었다. 군무부의 군사계획이 “광복군을 확대하여 속히 동맹군과 配合作戰한다”는 전제하에, “태평양 방면에서는 미국과 연계한다”거나, “한국과 일본본토에 지하공작을 진행하며 미국과 배합작전하여 해상으로 조선반도에 진입한다”는 등946) 연합군과 연계하여 대일전쟁을 전개한다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광복군으로 하여금 연합군과 함께 대일전쟁을 전개하게 함으로써 戰後 연합국의 지위를 획득한다는 것이 임시정부의 戰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광복군은 당시 일본과 전쟁을 수행하고 있던 중·영·미 등의 연합군들과 그 절차나 형태는 각기 달랐지만, 일정한 관계를 맺으며 함께 활동하였다. 중국군과는 창설 당시부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광복군 창설 자체가 중국측의 양해와 협조하에 이루어진 것이었고, 광복군은 중국 군사위원회에 사실상 예속되어 중국군과 함께 활동한 것이다.
영국군과도 함께 대일전쟁을 전개하였다. 인도·버마(미얀마)전선에 광복군 공작대원들을 파견하여 영국군과 함께 대일전쟁을 수행한 것이 그것이다. 인도·버마지역에서는 영국군과 일본군이 대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버마는 연합군이 중국에 전쟁물자를 수송하는 주요 통로였는데, 일본군이 이를 점령함으로써 수송로가 차단되었다.947) 영국군이 이를 타개하기 위한 임무를 맡아 인도·버마지역에서 일본군과 전쟁을 전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국군과의 공동작전은 영국군측의 요구에 의해 이루어졌다. 일본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던 영국군은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인원이 필요하였고, 이를 광복군측에 요청하였다. 광복군에서는 韓志成·文應國 등 영어와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는 공작대원 9명을 선발, 1943년 8월 인도 캘커타(Calcutta)로 파견하였다.948) 이를 계기로 광복군은 영국군과 함께 인도·버마전선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광복군 공작대원들은 인도주둔 영국군 총사령부에서 교육을 받은 후, 전선에 투입되었다. 이들은 4개월 동안 영어와 방송기술 등에 대한 교육을 받았고, 1944년 초 영국군에 분산 배속되어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영국군은 임팔(Imphal)전선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고, 띠마플·티딤·비센플 등 각지에서도 계속 전투가 이어졌다. 광복군 공작대원들은 영국과 함께 이러한 전투에 참여하였고, 영국군이 하기 어려운 대적방송·포로심문·적문서번역 등 주로 정보활동을 담당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1945년 초 버마에 대한 총반격작전을 비롯하여, 버마 수도인 랑군(Rangoon, 양곤)을 완전히 탈환하여 일본군을 패퇴시키는 1945년 7월까지 계속되었다. 2년여에 걸쳐 영국군과 함께 인도·버마전선에서 대일전쟁을 전개한 것이다.949)
광복군은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국의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와도 합작하여 국내진공작전을 계획 추진하였다.950) OSS와의 합작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려는 광복군측의 의도와 한국인들을 대일전쟁 첩보활동에 이용하려는 미국측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이루어졌다. 광복군과 OSS의 합작은 독수리작전(Eagle Project)으로 구체화되었다. 독수리작전이란 광복군 대원들을 선발하여 첩보훈련을 실시하고, 이들을 한반도에 침투시켜 적후방공작을 전개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계획은 OSS측에서 입안되었다. 그리고 OSS측과 광복군 사이에 구체적인 내용들이 협의되었고, 1945년 4월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이를 최종적으로 승인하였다. 이로써 독수리작전이란 명칭하에 광복군과 OSS와의 합작이 실현을 보게 되었고, 5월부터 3개월 과정의 OSS훈련에 들어갔다. OSS훈련은 무전교신과 게릴라 활동을 위한 특수훈련으로 일종의 첩보훈련이었다.
OSS훈련은 두 곳에서 이루어졌다. 하나는 西安에서 제2지대 대원들이 참여한 가운데 훈련이 실시되었다. 훈련책임자는 싸전트(Clyde B. Sargent) 대위였고, 제1기생으로 金俊燁·張俊河 등 50명이 선발되어 훈련에 참가하였다. 또 안휘성 立煌에서도 OSS훈련이 실시되었다. 이는 부양에 있던 제3지대 대원들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尹永茂·金永逸 등 20여 명이 훈련을 받았다. 훈련책임자는 윔쓰(Clarence N. Weems) 대위였다.
한편 제1기생의 훈련이 8월 4일 완료되자, 서안의 광복군 제2지대는 이들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입작전을 추진하였다. 8월 7일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비롯하여 李靑天·李範奭 등 광복군 간부와 OSS측 책임자인 도노반(William B. Donovan) 소장 등이 참여한 가운데, 서안에서 국내진입작전을 위한 작전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서 도노반 소장은 “오늘부터 아메리카합중국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사이에 적 일본에 항거하는 비밀공작이 시작된다”고 하여,951) 한미간에 공동작전이 실행된다는 것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OSS대원들의 국내침투는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들을 국내에 침투시키기 위한 국내진입작전의 세부적인 계획과 출동준비가 갖추어졌을 바로 그 순간에 일제가 항복을 선언한 것이다. 일제의 항복소식을 접한 것은 대략 8월 9일 경이었다. 일제의 항복으로 국내진입작전이 좌절된 광복군에서는 곧바로 이범석을 책임자로 한 국내정진대를 구성하였다. 국내정진대는 8월 18일 OSS측과 함께 비행기로 국내에 진입,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하였다가 서안으로 다시 돌아왔다.952)
광복군이 중국군·영국군·미국군과 함께 활동한 것은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전략이었다. 객관적 상황으로 볼 때, 한민족의 독자적인 힘만으로 일본군과 전면적 전쟁을 수행하거나 일본을 패망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하겠다. 그렇다고 할 때 최선의 전략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대일전쟁을 전개함으로써, 전후에 연합국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었다. 광복군이 중국군을 비롯하여 인도·버마전선에서 영국군과, 그리고 미국의 OSS와 합작하여 공동작전을 추진한 것은 이러한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韓詩俊>
945) | 대한매일신보사,≪白凡金九全集≫5, 102∼10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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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6) | <韓國光復軍建軍及作戰計劃>(≪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趙素昻篇 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78∼482쪽. |
947) | 당시 중국측에 제공되던 전쟁물자는 주로 버마 남쪽의 랑군 港으로부터 북부의 라시오를 거쳐 중국 昆明으로 전달되었다. 이 통로는 ‘버마公路’라 하기도 하고, 蔣介石을 원조한다는 뜻에서 ‘援蔣루트’라고도 불렀다. |
948) | ≪독립≫,1945년 6월 13일,<인도에서 활약하는 조선용사들>. |
949) | 韓詩俊, 앞의 책, 266∼271쪽. |
950) | 광복군과 OSS와의 합작훈련에 대해서는 金光載의≪韓國光復軍의 活動 硏究 -美 戰略諜報局(OSS)과의 合作訓練을 중심으로-≫(동국대 박사학위논문, 1999)라는 상세한 연구가 있다. |
951) | 金 九,≪백범일지≫, 345쪽. |
952) | <報告;今番國內進入經過에 關한 件>(1945년 9월 8일자로 제2지대장 李範奭이 총사령 李靑天에게 보고한 문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