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문화운동론의 수용과 문화운동의 전개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후 천도교에서는 1919년 9월 天道敎靑年敎理講演部를 설치하고, 교리의 연구·선전과 조선 신문화의 향상·발전에 치중하려고 방향전환을 하였다. 그리고 1920년 3월에는 天道敎靑年會를 설립하여, 순회강연과≪開闢≫의 발간, 강습소를 통한 교육 등을 통해서 문화운동론을 확산하였다. 그리고 1923년 9월 天道敎靑年黨을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문화운동을 전개하였다.275)
독일에서 탄생하여 일본을 거쳐 국내에 소개된 문화운동론에서는 사회진화론에 입각하고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대량살상 및 대량파괴를 일삼는 기존의 약육강식적 문명을 비판하고, 자유·평등·인류평화 등의 인도적 정신과 문화주의 철학에 기초하여 신문명을 수립할 것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문화운동론은 사회진화론에 기초하면서도, 사회유기체론을 중시하였다. 천도교의 문화운동론에서는 사회진화를 위한 생존경쟁의 단위를 세계 혹은 우주로 보고, 이 사회유기체끼리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유기체를 구성하는 개체들이 조화와 협동을 이룰 것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세계라는 유기체를 구성하는 각 민족들은 조화와 협동을 이루어야만 하였다. 꽃밭을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서는 각각의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야 하듯이, 각 민족은 세계라는 유기체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각 민족의 문화를 발전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천도교의 문화운동론에서 수립하려고 한 문화는 천도교의 문화였다. 그런데 그 천도교문화는 동학사상이 儒·佛·仙의 합일사상이라고 하여 반드시 동양의 전통문화를 계승하려고 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천도교의 문화운동론에서는 미풍으로 여겨졌던 전통적인 孝의 관념도 아버지의 뜻을 무조건 따르는 종속적·비독립적 사상이라고 비판하고, 각 개인은 자아·자주·자립, 진취적·창조적 정신을 지닌 신인간이 될 것을 강조하였다. 또 우리 민족은 崇古思想·依他思想·崇文非武思想·崇禮階級的 思想 등 전통·제도·풍습에 구속된 구관습을 버리고 자주적·독립적인 민족성을 가질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사회를 일종의 유기체로 보고 유기체의 발전을 위한 개체간의 조화와 협동을 강조하였다. 각 개인들이 자유를 구가하는 데서 생길 수 있는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경제적 평등이 아닌 ‘기회의 평등’을 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런 점에서 천도교의 문화운동론에서 지향하였던 문화는 인간의 자율적 능력을 기초로 하여 자아와 개성의 발휘를 중시하면서도, 한편으로 조화와 협동을 강조한 서구의 신자유주의사상에 토대한 문화였다.
천도교의 문화운동론에서는 지상천국의 신사회를 정치체제나 경제구조와 같은 사회적인 방면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치 또는 생활양식인 文化를 바꿈으로써 변혁하려고 하였다. 이런 점에서 문화운동론은 원칙적으로 유물론적·사회주의적 변혁관을 비판하고 유심론적·인간주의적 변혁관을 갖고 있었다. 이 이론을 구체화 한 사람은 李敦化로서, 그는 정신개벽·민족개벽·사회개벽의 삼대개벽론을 주장하였다.276)
문화운동론에서 사회변혁의 주도자를 자산가·지식인·實權者라고 보았던 점에서 엘리트주의의 관점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이 문화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의 특성과 관련이 있었다. 문화운동을 추진한 천도교청년회와 천도교청년당의 주도인물은, 첫째 지역적으로 평안도·함경도의 서북지역 출신이 중심을 이루었고, 둘째 신분적으로 조선말 이들 선조의 신분은 대체로 평민이거나 4·5대에 걸쳐 급제자를 내지 못했던 잔반이었으며, 셋째 경제적으로 자작농 혹은 자소작농 출신으로 주로 교사·언론인·사무직에 종사하였으며, 넷째 교육적으로 일본에 유학하였거나, 국내의 근대적 교육기관에서 수학하였던 신지식인들이었다. 그러니까 이 천도교청년당의 주도인물들은 조선시대에 차별받던 지방의 피지배계급 출신의 청년들로서, 중·소규모의 토지를 바탕으로 근대적인 교육을 받아 새롭게 부르주아 계급으로 성장하던 사람들이었다.
천도교의 문화운동에서는 인간의 정신적 개벽을 통해 신사회를 건설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천도교에서는 문화적 개조운동의 일환으로 농민·노동·학생·상민·청년·소년·여성부를 두고 각 부문별로 새로운 인간을 형성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 운동의 전개를 위하여 각 부문에는 조선농민사·조선노동사·내수단과 같은 부문운동단체를 마련하고, 각 부문에 속한 사람들을 변혁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천도교소년회에서는 자율적 어린이를 형성하기 위한 어린이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농민의 각성과 생활개선을 위해 1925년 10월 조선농민사를 설립하고≪朝鮮農民≫을 발간하여 농민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농민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 조선농민사와 교회를 통한 공생조합운동과 공동경작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정신적·물질적으로 자립된 신여성을 만들기 위해 천도교에서는≪婦人≫·≪新女性≫등의 잡지를 발간하고, 강습·야학·강연, 시일학교·新人間之學을 실시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해 천도교의 문화운동은 새롭게 대두한 부르주아 계급이 문화적 변혁에 의해 자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면서도 사회주의적 요소를 받아들인 천도교적 이상사회를 수립하려한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일제의 압력에 의하여 대두되었고, 그 운동론의 철학적 기초가 일제의 지배체제를 합리화 하고, 수립하려는 문화가 일제가 지향하는 문화와 유사하며, 그 추진집단에 일본유학생이 많으며, 그 운동의 내용이 일제의 지배체제를 공고히 해준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수많은 검열과 검속을 받아가며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하여 활동하였던 천도교 문화운동가와 천도교인들의 활동은, 독립의 기초를 쌓고 민족의 명맥을 유지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