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3·1운동과 불교계의 각성
(1) 3·1운동 참여
거족적인 3·1운동에 불교계도 자발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는 우선 식민통치의 실상 파악, 그리고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열의가 불교계에서도 자생하였음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특히<사찰령>체제에서 야기된 온갖 모순은 바로 그 인식의 촉매제가 되었다. 친일주지의 전횡, 사찰 공동체의 파괴, 비판적인 청년승려들의 사찰밖으로의 구축, 나약한 불교사업 등은 3·1운동이 발발하였을 때 불교계 동참의 기반이 되었다.
불교계의 3·1운동 참여는315) 중앙과 지방으로 대별하여 살펴볼 수 있다. 중앙에서의 활동은 한용운과 백용성의 민족대표 33인의 참가와 중앙학림 학생의<독립선언서>배포활동을 거론할 수 있다. 한용운은 3·1운동 준비단계에서부터 그 운동의 중심부에서 활약하였다.316) 한용운의 개입은 그가 이전의 임제종운동 주도에서 나타난 민족불교 지향 정신의 계승에서 나온 것이었다. 특히 그는 3·1운동 직전에는≪惟心≫을 발간하면서 민족의 지도자들과 빈번한 접촉을 해오면서 자연스럽게 그 운동을 주도케 되었다. 또한 임제종운동시에도 한용운과 같은 노선을 경주하였던 백용성도 민족대표에 피선되었다.
3·1운동 이전 한용운과 백용성이 주도한 선종중앙포교당(범어사 포교당)에 출입하였던 불교청년들은 3·1운동이 발발하자 그 운동의 대중화 일선에 나서게 되었다. 3·1운동 직전 한용운은 당시 그를 따르던 중앙학림의 학생들을 초치하여 그간의 경과를 소개하면서<독립선언서>배포 등 운동의 최일선에 나설 것을 요청하였다. 당시 그 요청을 받은 학생들은 1만여 매의 독립선언서를 서울 시내와 지방 사찰에 배포·전달하고, 서울 시내에서 만세운동을 마친 후에는 각 연고 사찰을 찾아 지방에서의 만세운동의 대중화를 시도하였다.
당시 그 학생들의 영향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난 사찰은 범어사·해인사·동화사·김용사·통도사·마곡사 등이었다.317) 이들 사찰에서는 그 사찰의 學人과 인근의 주민들이 연계하여 만세운동이 자발적으로 일어났다. 그러나 일부 사찰에서는 중앙에서의 연락이 없었지만 자생적으로 만세운동에 참여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예컨대 봉선사와 신륵사에서는 승려·인근 주민·신도들이 함께 태극기를 제작하여 만세운동에 나섰다.
한편 한용운과 백용성은 민족대표로 활동하였기에 옥중에 수감되었지만, 일제에 좌절치 않고 민족불교 지향을 끝내 고수하였다. 한용운은 옥중에서<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을 서술하여 비밀리에 옥밖으로 전달하였는데, 이것은 상해≪독립신문≫에 기고되었다. 백용성은 옥중에서 불교개혁을 고민하였는데, 당시 그의 고민은 출옥 후 전개한 불교의 혁신 및 대중화의 기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