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승려대회와 종헌
1929년 1월 3∼5일, 각황사에서 개최된 조선불교선교양종 僧侶大會는 일제하 불교운동선상에서 기념비적인 의의를 갖고 있다. 이는 1920년대 초반이래 불교계의 숙원이었던 불교통일운동의 일단락을 완성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일제<사찰령>은 한국불교계를 30본산으로 분열·분리·개별화시켜 통치한 근거였다. 이에 불교계는<사찰령>을 극복하기 위해서는<사찰령>에서 규정한 틀을 부정하고 불교계 전체의 운영·사업 등을 공동으로 추진해야만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1920년대 전반기에 그 대안을 통일기관 수립에 두고 치열한 활동을 전개하였지만 끝내 성사시키지는 못하였다.
이에 불교계 통일운동은 1920년대 후반에서도 역사적인 과제로 자리잡고 있었다. 불교계가 통일적인 기관, 운영내규, 자율적인 틀이 부재하였기에 불교의 발전은 말할 것도 없고 민족운동에 나설 기반조차도 마련치 못하였음은 당연하였다. 이에 1928년부터 불교계에서는 이를 재인식하는 가운데 그 해결점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 모색의 중심에 서 있었던 인물들은 불교청년들이었다. 특히 백성욱·김법린으로 대표되었던 그들은 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였기에 한국불교의 문제점을 보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조망할 수 있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이런 배경에서 1928년 11∼12월 서울에서는 중앙기관 및 敎憲(종헌)을 조직하기 위한 제반 준비가 가시화되었다. 구체적으로 지적하면 승려대회를 통하여 불교의 통일적인 기반을 제정하려는 움직임으로 전개되었다. 승려대회 발기대회, 승려대회 준비위원회 등은 바로 그 사전 모임을 말한다. 마침내 1929년 1월 3일 각황사에서 역사적인 승려대회336)가 개최되었다. 전국의 불교계를 대표하는 107명이 참가한 그 대회에서는 종헌, 중앙교무원칙, 교정회 규약, 법규위원회 규칙, 종회법 등이 제정되었다. 그리고 한국불교를 상징·대표하는 교정 7인과 중앙교무원의 간부도 선출하였다.
대회에서 결정한 내용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宗憲(12장 31조)의 제정과 반포였다. 종헌은 불교계의 헌법으로 지칭할 수 있는 것으로, 통일운동의 틀과 내용을 담고 있었다.337) 이에 불교계는 종헌에서 규정한 내용을 실천하면 되었다. 그리고 주목할 또 하나는 종회와 중앙교무원의 설립이었다. 종회는 불교계의 대표·입법기관으로, 중앙교무원은 행정·실무기관으로 지칭되었다. 이로써 불교계는 통일운동 실행의 조건을 구비하였던 것이다.
대회 이후 불교계는 종헌에서 규정한 기관의 운영과 규정의 준수를 통하여 통일운동을 실천하였다. 그 움직임은 종헌실행운동으로 명명되었다. 그리하여 대략 1930년경까지는 운동은 비교적 정상적으로 추진되었으나, 1931년 이후부터는 종헌 실행에 차질이 생겼다.338) 그 같은 차질은 불교계 내부에 종헌 실행을 저지·반대·비협조하였던 세력과 본산이 존재함에서 출발하였다. 또한 그것은 종헌이 일제당국의 승인을 받지 않았다는 논리를 내세우며<사찰령>과 寺法만 유의한 행태에서 나온 것이었다. 즉 나약한 자주의식 그 자체였다. 종헌을 실천하겠다는 굳은 맹서를 불전 앞에서 하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기억과 의식은 퇴색하였다.
이에 불교계에서는 종헌 실행을 정상화하기 위하여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339) 사법개정운동과 종헌반포기념일 제정은 바로 그 구도에서 나왔다. 사법개정은 종헌과 사법을 일치시키자는 것이었고, 기념일 제정은 매년 1월 4일을 종헌기념일로 정하여 의식을 갖음으로써 종헌의 정신을 계승·홍보하자는 것이었다.
한편 이같은 종헌 실행을 둘러싸고 나타난 현상은 본산간의 대립과 갈등의 노골화였다. 종헌 실행을 찬성하는 본산과 그 실행을 반대한 본산간의 대응이 보다 확연하여졌다. 기실 이같은 모순은<사찰령>에서 규정한 본산체제에서부터 잠재되어 온 것이었다. 본산체제로 20여 년을 흐른 결과 통일적인 움직임의 부재하에 본산만을 위한 사업과 이익에만 유의한 결과였다. 그런데 그 모순이 1930년대 전반기에 접어들면서 더욱 확연하였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종헌의 소멸로 이어졌다. 1934년경에 접어들면서 종헌과, 종헌에서 규정한 기관은 사라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 여파는 불교계 곳곳으로 파급되었다. 일시적으로 중앙불전을 경영상의 어려움을 빌미로 매각을 검토·결의하였던 것도 바로 이 사정에서 기인하였다. 불교계를 대표하는 잡지인≪불교≫가 휴간·복간을 거듭한 것, 불교계가 경영하였던 普成高普가 고계학원으로 매각된340) 것도 이같은 정황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본산 간의 대립은 이른바 지방색도 일정 부분 내재하였음을 배제할 수는 없다. 예컨대 범어사·해인사·통도사가 慶南3本山協議會를 설립·운영하였음은 그 단적인 예증이다. 이에 여타 지방의 본산들도 그에 대응하여 유사한 협의회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나아가서 이같은 종헌의 상실과 본산의 대립은 불교계 전체의 부진과 위축을 야기하였다는 데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이 때를 전후하여 불교청년운동의 부진, 종단·敎政의 상실 등이 불교계에 자리잡았다. 이는 곧 불교 자주화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경제 공황, 소작쟁의 급격한 증대, 反宗敎운동 득세라는 조류가 불교계에 거세게 다가왔기에 불교계는 내외의 거센 도전에 직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