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교육을 통한 식민체육정책
구한말 학교교육을 통해 보급되던 근대체육의 싹은 일제의 식민지 교육제도의 확립과정 속에서 통제됨으로써 점차 침체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1910년 강제로 조선을 병합한 일제는 무엇보다도 식민지 교육체제의 확립을 통해 한국인을 충량한 일본신민으로 육성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1911년 8월 23일<조선교육령>과 같은 해 10월 20일에 총독부령을 제정하여 식민지 교육정책의 골격을 마련하였다.541) 그 핵심적 내용은 대학교육이 빠진 보통학교 4년, 고등보통학교 4년, 여자고등보통학교 3년, 실업학교 2년 또는 3년, 전문학교 3년 또는 4년으로 모든 학교를 거의 3년∼4년의 단기교육 연한제를 실시하는 것이었다. 또한 보통학교에서는 지방사정에 의해 체조를 하지 않아도 되도록 하고, 관·공립학교 생도의 신체검사규정에 여학생에게 체조를 적용치 않는다고 발표하였다.542) 이러한 교육정책은 식민지 민중의 우민화를 기도하는 동시에 봉건적 교육관을 그대로 드러낸 전근대성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 학교체육의 내용은 체조교육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다만, 그 내용은 남자보통고등학교에 기계체조 과목이 정식으로 채택되고, 여자고등보통학교의 체조시간이 3시간으로 늘어나며, 종래까지 체육을 통해 “身體의 强健과 協同을 崇尙한다”는 목적에서 일제의 무단통치에 순응하는 “節制를 美德으로 함”이라는 목적으로 바뀐 것이었다.
1914년 6월에는 체조를 포함한 교수요목을 반포하였는데, 이 조치는 식민지하에 학교체육의 방향이 결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학교체육은 종래의 체육과는 크게 변화하였다. 첫째, 체조교육의 내용이 遊戱·兵式體操·보통체조에서 체조·교련·유희로 구분되었다.543) 이때 병식체조가 교련으로 독립되기는 하였지만, 어디까지나 일제의 군국주의적 체육의 기능을 수행한다는 취지를 지닌 것이었다. 둘째, 한말 운동회에서 행하던 전통적 유희와 함께 근대적 스포츠가 행해지는가 하면, 桃太郞·渦卷·池鯉·大和男子 등의 일본의 유희가 도입되었다. 셋째, 체조과 교수시간 외에 체육운동이 권장되었다. 넷째, 학생들의 신체 및 정신발달에 맞게 지도하고 교실의 청결과 통풍, 그리고 채광을 완전케 하도록 하였다. 다섯째, 학교체육이 모든 학교에서 필수과목으로 정착되었다.
이와 같은 체조 교수요목의 반포는 당시 각 학교의 체조교육이 제각기 다른 것을 통일한다는 취지를 띠고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 결과 체조교육이 종래 병식체조·보통체조에서 瑞典體操로의 질적 전환을 이루어 근대체육의 형식을 띠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학교체육이 일제의 식민지 교육의 목적인 황민화정책과 그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구한말 병식체조를 통하여 국권회복의 기초를 굳건히 하고자 했던 방향과는 달리, 근대적 체육이라는 미명하에 서전체조를 비롯한 구미 제국의 새로운 유희를 도입하여 병식체조를 탈피함으로써 식민지 체육교육을 정착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학교체육에서 자주성을 박탈한 것은 체조교육 내용의 변화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학교체육의 실질적 담당자였던 체조교육에 대한 자격을 제한함으로서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즉 1915년<사립학교규칙>을 개정하여 보통교육·실업교육 또는 전문교육을 하는 사립학교의 교원 자격을 제한하였다. 총독부는 우선적으로 체육교사에 대한 자격제한을 통해 구한말의 민족주의적 학교체육을 담당했던 구한국군 출신의 체조교원을 제거하는 대신, 일본군인으로 충당하였다. 이제 학교에서의 체조교육은 황국신민으로서 곧 일본제국을 수호하는 성격으로 변화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책은 1915년에 개정된<사립학교규칙>에서도 일관되어 나타났다.<사립학교규칙>제10조 2항에는 교원자격 규정을 두어 일본어에 통달하고 일정한 학력을 가져야 하는 등 교사의 자격을 엄격히 제한하였다.
한편 일제의 식민지 체육정책은 한편으로는 학교체육의 변화를 통해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운동회와 같은 민족경기에 대한 규제를 통해서도 펼쳐지고 있었다. 한말부터 계속되어 온 운동회는 병탄 이후에 탄압의 대상이 되었지만,544) 그럼에도 각처에서 학교 내지 지역을 연고로 한 연합운동회는 지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1912년 5월 10일 경성부내 8개 사립학교의 연합운동회를 끝으로 연합운동회는 폐지되고 말았다. 당시 경신·배재·보성·오성·중앙·청년회관·휘문의숙 등이 연합한 춘계대운동회는 朴泳孝·閔丙奭·李容植·尹㥁榮·尹致昊 등의 기부금으로 이루어 졌다. 그런데 경기운영 미숙으로 1등기가 잘못 수여된 것에 반발하여 난투극이 벌어지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이에 일제는 교육적인 폐단을 이유로 들어서 동년 5월 31일 내무장관이 학제 716호로 이후 연합운동회를 중지하도록 강제하였다.545) 그후 연합운동회는 폐지되는 대신에 개별 학교 단위의 운동회만이 열려, 사회체육적인 성격을 띤 운동회는 더 이상 개최되지 못하였다.
결국 1910년대 학교체육의 재편과 체조교원의 자격 제한, 그리고 연합운동회의 폐지 등은 일제가 교육을 통한 식민지 체육정책의 구체적인 내용들이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구한말에 활발히 전개되던 민족체육을 압살하면서 장차 일제의 식민통치를 위한 체육적 기반 확보라는 정치적 기도가 깔린 것이었다. 특히 조선의 자립적인 근대화의 싹을 잘라버리고 민족주의 체육운동을 진압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식민지 학교체육정책의 골격은 이처럼 무단통치기에 성립되었던 것이다.546)
541) | 나현성,≪한국체육사≫(교학연구사, 1983 개정판), 139∼14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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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2) | ≪官報≫, 1911년 10월 20일, 號外. |
543) | 체조의 내용은 교육체제마다 달랐다. 우선 보통학교에서의 체조는 유희와 보통체조로 구분되며, 교수시간의 일부 혹은 시간외에도 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유희는 집밖에서 행하는 유희를 하되, 수영·스케이트 등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고등보통학교와 실업학교의 체조는 보통체조와 기계체조를 부과하였다. 다만 고등보통학교의 1년제의 사범과에서는 유희와 보통체조를 부과하여 보통학교 교원으로서의 자격을 갖추게 하였다. 여자고등보통학교의 체조는 보통학교와 같이 유희와 보통체조를 부과하였다(나현성, 앞의 책, 141∼149쪽). |
544) | ≪大韓每日申報≫, 융희 3년(1909) 12월 30일. |
545) | 朝鮮敎育硏究會 編,≪朝鮮敎育法規≫(京城, 1917), 818쪽. |
546) | 西尾達雄,≪日本植民地下朝鮮におけて學校體育政策に關する硏究≫(日本 柰良女大 박사학위논문, 2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