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경기를 통한 식민체육정책
우리 나라에 근대 스포츠가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엽 개항 이후 근대식 교육제도가 도입되면서부터 였다. 주로 학교체육을 통해 소개된 근대 스포츠 가운데 가장 빨리 도입된 것은 체조·육상 등이었다. 체조는 1895년 4월 1일<한성사범학교 설치령>에 체조교과가 정식으로 채택되면서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육상은 1896년 5월 2일 영어학교 교사인 허치슨(Hutchison)의 지도하에 화류회에서 소개되었다. 또한 검도는 같은 해 경무청에서 검도를 경찰교습 과목으로 채택한 것으로 비롯하였다. 전통적으로 행해진 운동이었지만, 1898년 5월에는 무관학교 학생들에게 휴가시 수영연습을 하게 하는가 하면, 1899년 4월 30일에는 학부 주최 관립·사립학교 운동회에서 씨름을 경기종목으로 채택하였다. 이 외에도 1890년경에는 선교사에 의해 테니스가 보급되었다. 당시 양반들은 외국 선교사들이 테니스를 치는 것을 보고 하인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한탄했다는 일화는 근대적 운동경기에 대한 당대인들의 인식을 잘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1900년대에 들어와 근대식 운동경기의 보급은 더욱 확대되었다. 1904년 9월 24일에는 陸軍硏成學校에서 사격을 교과목으로 채택하였고, 1905년에는 미국인 선교사 질레트(Gillet)가 황성기독교청년회 회원들에게 야구를 지도하였으며, 같은 해 외국어학교의 외국인 교사들에 의해 축구가 소개되었다.547) 이듬해인 1906년에는 육군 참위 權元植과 일본인 요시카와(吉川)가 훈련원에서 자전거 경기를 개최하였고, 같은 해 일본인 우치다(內田良平)에 의해 유도가 전래되었다. 1907년에는 농구가 질레트에 의해 보급되었다. 1908년에는 일본인이 대동강에서 빙상운동회를 개최하였고, 탁지부 관리들의 운동회때 정구 경기종목을 채택하였다. 또한 1909년에는 전통스포츠로서 근위기병대 군사들이 훈련원에서 기병경마회를 거행하였고, 李相弼이 射弓會를 발족하였다.
이상의 구한말 체육은 대부분 학교체육과 운동회에서 채택된 것으로 육상경기가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다가 주로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 근대적 경기가 소개되면서 본격화되었다. 다만, 이들 근대적 운동경기는 일반인들에게 광범위하게 보급되지 않았고, 황성기독교청년회 및 서울 소재의 몇몇 학교에서 행해지는 데 불과하였다. 거기에다가 식민지 이후 학교체육에서 유희가 강조되고 일인들이 한국에 대거 이주하여 운동경기를 보급시키는 과정을 통해 점차 일반인들에게도 보급되었다.
1910년대에 활발히 개최된 경기는 야구·자전거·정구·빙상 등이었다. 첫째 야구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구한말 질레트에 의해 서울소재 학교를 통해 보급되어 발전되다가, 1915년 조선공론사 주최로 조선 최초의 야구경기가 열렸다.548) 이처럼 1910년대는 야구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던 시기였으나, 당시 일제의 무단통치하에서 주도권은 일인에 의해 장악되었다.
둘째, 자전거는 이 시기에 크게 유행하던 스포츠의 하나였다. 1913년 처음으로 열린 자전거경주대회는 인천·서울·부산·평양 등 4곳에서 당시 일본 선수와 함께 100여 명이 출전하였는데, 당시 嚴福童이 우승함으로써 ‘자전거대왕’으로 떠받들어질 정도였다. 1915년에는 최초의 전선자전차경주대회가 열렸으며, 1917년에는 경성일보사와 매일신보사의 공동주최에 의해 전선자전차대회가 개최되어 사회적인 스포츠로 발전하였다.549)
셋째, 1910년대에 야구와 함께 크게 보급된 경기가 정구였다. “정구는 가장 일찍 수입되어 청년층의 경기로서 가장 널리 보급된 운동경기였다”고 하듯이, 당시 정구는 크게 보급되었을 뿐 아니라 특히 여성의 운동경기로서 환영받고 있었다. 실제 당시 정구는 서울·인천을 막론하고 모든 지방에서 활발히 행해졌다. 그리하여 당시 “정구와 야구 이외 기타의 운동경기는 볼만한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서, 정구는 근대 운동경기 중에 가장 일찍 보급된 경기였다고 할 수 있다.550) 다만 정구 역시 대부분 일인을 중심으로 한 사회단체가 주도권을 장악한 채 이루어졌다.
넷째, 이 시기에 빙상경기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당시 빙상경기의 열기는 1912년 2월 4일 용산 스케이트장이 개설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이 경기도 역시 일인에 의해 주도된 경기로서, 실제 스케이트장의 개설은 일본인의 연습을 위한 목적이 컸다. 어쨌든 당시 빙상은 근대적인 스피드 스케이팅보다 주로 유희적인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경성고등보통학교는 조선 최초의 빙상경기대회를 개최한 학교였다. 한국인들에 의해 빙상이 보급된 것은 1920년대를 지나야 가능하였다.
위와 같은 경기 이외에도 축구·승마·유도·검도 등이 1910년대 행해진 운동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적 운동경기는 대부분 일인에 의해 주도된 것으로 당시 조선인들에게 널리 보급된 것은 아니었다. 이처럼 당시 근대적인 스포츠가 크게 보급되지 못한 까닭은 아무래도 이를 수용할 만한 사회계층이 성장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근대적 스포츠가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는 적극적인 방법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551)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도 불구하고, 점차 조선에 근대스포츠가 보급되고 확산되어 나갔다. 그러자 일제는 보다 적극적으로 일본인 중심의 체육단체 결성을 통해 본격적인 스포츠 권장책을 펼쳐 나가게 되었다. 1919년 2월 18일에 창립된 ‘조선체육협회’가 바로 그것이다. 조선체육협회는 원래 조선에 있는 15개 정구단이 모여 1918년 가을에 결성한 경성정구회와 1919년 1월에 결성된 경성야구협회가 통합되어 이루어진 단체였다.552) 따라서 조선체육협회는 정구부와 야구부를 두었으며, 매월 1회의 기관지≪朝鮮體育界≫를 발행하고, 필요에 따라 기타 운동부를 설립할 수 있게 하였다. 이 단체는 조선에 설치된 최초의 민간체육단체로서, 경비를 자체 충당하고 있었다. 특히 보통회원 보다는 철저한 회장중심의 조직으로서 운영되었다.
조선체육협회는 조선신문사의 후원하에 창립되었기 때문에 당시 경성일보사를 자극하여 양 신문사가 야구대회·정구대회를 경쟁적으로 개최하는 촉진제가 되었다. 결국 양 신문사의 대립은 조선체육협회에 대한 무조건적인 후원으로 서로 타협되었으며, 그 후 조선체육협회는 명실상부하게 운동경기계를 독점하게 되었다. 이 단체는 1910년대 일인에 의해 주도된 스포츠계의 총본산의 성격을 갖는 것이었음과 이후 일제 식민지하에서 사회체육을 주도해 나가는 체육단체로 성장하였다.553)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개항 이후 1910년까지 근대식 운동경기가 들어오는 계기는 크게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근대식 교육제도가 도입되면서 학교를 통해 근대적 운동경기가 소개되었다. 둘째, 서양의 선교사 및 기독교 단체에 의해 소개되었다. 한국 근대스포츠의 대부분은 이들의 영향이 매우 컸다는 특징을 갖는다. 셋째, 일본인의 이주에 의한 운동경기가 보급되었다. 근대 운동경기의 도입이 구한말에 주로 선교사를 통해 학교체육이나 체육단체라는 제한된 범위내에서 보급되었다면, 1910년 이후에는 그러한 추세가 이어지면서 일인에 의한 운동의 보급이 이루어지는 특색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