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민족체육의 성장과 대응
일제의 가혹한 무단통치에 따라 이 시기의 조선 체육계는 한말에 비해 상당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 체육활동은 일본인에 의해 주도되었고, 조선인의 체육활동은 그 규모나 참여인원이 매우 영세한 실정이었다. 그러나 조선 체육계는 일제통치라는 시련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의 성장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 방향은 크게 3가지로 나타났다.
우선 조선인이 중심이 된 근대 스포츠의 보급이 활성화 된 점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표적인 활동이 바로 종로 기독교청년회, 즉 YMCA의 체육활동이다. 사실 YMCA는 1910년 일제의 무단통치기하에서 체육활동을 자유스럽게 할 수 있던 거의 유일한 단체였다. 당시 일인에 의해 모든 체육이 장악되고 있을 때, YMCA의 조선인들은 이 곳을 통한 체육의 보급과 활동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켜 나갔다.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서양의 세력을 등에 업고 있던 탓에 YMCA는 꾸준히 체육을 발전시켜 갈 수 있었던 것이다.554) 특히 이곳에서는 축구·야구·농구·배구·체조·유술 등의 종목을 보급하고 경기대회를 개최하였을 뿐 아니라, 그 종목을 위한 지도자 훈련도 겸하고 있었다. 당시 모든 경기의 총집회수가 502회, 연 참가인원이 총 1만 2,000여 명에 이르렀고, 운동경기시합도 1년간 총 32회가 열려 평균 10일에 한번씩 열렸음을 알 수 있다.
YMCA의 체육활동은 1916년 5월 6일 실내체육관 준공을 계기로 보다 본격화된다. 실내체육관은 3층 벽돌건물로서 미국 YMCA 회원들과 청소년들의 기부금으로 이루어졌는데 클럽실·체육실·탈의실·샤워실 등을 갖춘 한국 역사상 최초로 실내체육관이었다. 이를 계기로 큰 인기를 얻어 당시 성인부에 연 1만 7,768명, 소년부에 연 2만 4,756명이나 될 정도로 큰 성황을 이루었다. YMCA의 체육활동 결과, 일반인들의 체육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졌다. 몇 해 전만 해도 신사들과 그 자제들은 운동경기를 천하게 여겼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이 일변하여 모든 신사들이 운동을 즐기게 되었는데, 이것은 틀림없는 YMCA의 공헌이다. 사실상 한국에서 연중무휴로 운동할 수 있는 곳은 YMCA 밖에 없었다.555)
이와 같은 YMCA의 활동은 일본인의 체육활동과 더불어 조선에서 근대적 운동경기 보급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일인들이 주로 식민지 지배를 위한 수단으로서 체육을 장려한 반면, YMCA는 순수한 체육을 장려·보급하려는 목적을 가졌다는 점에서 크게 다른 것이었다. 3·1운동 이후 조선에서 근대적 스포츠 경기가 크게 확산되는 배경은 바로 YMCA의 순수한 체육활동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었다. 바로 이점이 1910년대 YMCA의 체육활동이 지니는 역사적인 의미인 것이다.556)
둘째로 민족 고유의 경기인 궁술·鞦韆·씨름 등의 부활 등을 통해 근대스포츠로 발전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들 운동경기에 대한 관심은 이미 구한말부터 계속 이어져 온 것이었지만, 1910년대에 매우 크게 일어났다. 그 가운데 활쏘기는 1916년 4월 30일에 朝鮮弓術聯合大會로까지 발전하였다. 특히 궁술은 조선 고유의 상무정신을 진작시키고 문무를 겸비한 국민을 요구하는 시대적 요구에도 부합되는 면이 있었다.557) 또한 심신수련 뿐 아니라 위생상으로도 오락으로도 적합한 운동이었던 점이 강조되었다. 그리하여 궁술대회는 단지 전통적인 무예의 부활이 아니라 근대적 체육정신이 바탕이 되어 새롭게 부활된 것이었다.
당시 조선궁술연합대회는 3·1운동 당시 천도교 대표로 33인중의 한 사람이었던 權東鎭을 비롯한 많은 민족운동가들이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하지만, 조선궁술연합대회는 일제와의 타협에 의해 개최되는 개량적인 성격을 띤 대회였다. 반면에 씨름은 일제와의 타협없이 순수한 욕구에 의해 개최되었다. 매년 연례적으로 개최되던 씨름대회는 1916년 뚝섬에서 열렸는데, 수천 명의 구경꾼이 몰려들었다.558) 이처럼 시골 장터나 강변 모래판에서 민중들의 자발적 참여에 의해 행해진 이 씨름경기는 일제하에서 가장 민중적인 운동이었다. 이는 조선시대 양반층에 의해 향유되던 궁술과 달리, 씨름은 주로 평민들에 의해 행해지던 전통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셋째, 운동경기를 통해서 일본 선수들을 제압함으로써 민족적 우월감과 울분을 달래는 흐름이었다. 특히 일본인과 조선인의 대항경기가 훨씬 더 관심이 집중되고, 조선인에 대한 응원이 열렬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1914년 10월 10일 훈련원에서 오성학교팀과 일본 철도구락부와의 접전 끝에 14대 13으로 승리하였는데, 이는 전년도의 패배를 설욕한 것이었다. 그런데 일인이 패배하자 조선인과의 충돌이 발생하였다.559)
이처럼 운동경기를 통한 민족의식 고취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운동경기를 통해 민족감정을 발산시켜 버림으로써 식민지 지배에 대한 지속적인 저항 수단이 될 수 있었다. 물론 경기를 통해서만 민족적 울분을 달래는 데 그침으로써 식민지 체제를 극복하려는 독립의지를 흐리거나 마비시키는 역기능이 혼재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1910년대의 체육이 일제의 가혹한 무단통치하에서, 특히 민족운동이 비밀결사의 형태로 잠복한 시기에, 경기를 통해서나마 일인들을 제압하고 조선인의 기상을 드높이는 일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이는 개량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분명 이 시기의 체육이 민족주의에 기반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