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최승희의 무용과 활동
숙명여고를 졸업한 최승희는 경성사범학교 연습과에 진학하여 음악교사가 되기를 희망하였으나 1926년 경성에서 세계적인 무용가 이시이의 공연을 보고 무용가로서의 입신을 결심하였다. 1926년 5월 무용을 위해 동경으로 건너간 그녀는 3년여 만에 주역급 무용수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1929년 이시이의 실명으로 고향에 돌아와 연구소를 개설하면서 1932년까지 세 차례 공연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민족무용의 현대화’를 표방한 ‘영산무’를 발표하였을 뿐 아니라 ‘인도인의 비애’, ‘해방을 구하는 사람들’, ‘방랑인의 설움’과 같은 현대무용 계열의 작품을 선보였다.618)
이들 작품은 진보적 지식인들의 호응을 얻기도 하였으나, 경제적 어려움을 면치 못하였다. 이에 그녀는 다시 1933년 3월 이시이문하에 재입문하여 1년여 만에 청년회관에서 전통과 현대무용의 접목을 꾀한다는 의도에서 창작품 ‘에헤야 노아라’가 대성황을 이루면서,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신인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619) 1936년 말부터 4년간 세계무대로 진출한 그녀는 유럽에서 초립동·화랑무·신로심불로·장구춤·춘향애사·즉흥무·옥저의 곡·보현보살·천하대장군 등 신무용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을 발표하였다. 이에 그의 명성은 아르헨티나의 샹카 등에 비유되면서 세계 정상의 무희로 지목되었다. 그러한 명성으로 1938년 브뤼셀에서 개최된 제2회 세계무용경연대회에서 라반·비그만·리파르 등과 함께 나란히 심사위원이 되기도 하였다. 파리 무대의 후광을 업고 그녀는 뉴욕에서 당시 NBC와 제휴하면서 미국 전역은 물론 중남미 여러 나라에서 공연하였다
1940년 일본으로 돌아왔으나, 최승희의 작품이 조선의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내용이 많다고 판단한 일제는 향후 그의 작품에서 3분의 1을 일본 소재로 바꾸도록 강요하였다. 이에 굴복하여 일본 전통적인 소재를 작품으로 삼기도 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계속되는 일제의 압력을 벗어나고자 그녀는 북경으로 연구소를 옮겨 중국 고전을 바탕으로 작품발표를 하였으나 옛 영광을 되살리지는 못한 채 해방을 맞이하였다.
조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나에게 허용되는 속죄의 길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이제까지의 최승희 무용을 지양하고 코리언발레를 창건하는 일”이라 하여 언론의 질책을 받기도 하였다. 그녀는 결국 친일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불안해 하다가, 남편 安漠과 함께 월북하였다. 북으로 간 그녀는 1950년까지 ‘반야월성곡’·‘춘향전’ 등 두 편의 무용곡과 소품 ‘노사공’ 등 한편을 만드는 데 그치는 위축된 창작활동을 하였다. 평양에서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최승희무용연구소 소장으로 화려하게 비쳐지기도 하였으나, 혁명정신의 결여가 비판되고 끝내는 반동적 부르주아예술의 표본으로 낙인찍혀 ‘인민배우’라는 예술인 최고의 지위에서부터 격하되어 쓸쓸한 생을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