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조택원의 무용과 활동
휘문고와 보성전문학교를 거쳐 상업은행 소속 정구선수였던 조택원은 1927년 11월 두 번째로 조선에 공연을 온 현대무용의 거두였던 일본의 이시이의 공연을 관람하고 무용에 입신하게 되었다.620) 1928년 1월 동경으로 건너간 그는 본격적인 무용수련을 쌓았는데, 1929년 봄 처녀작 ‘어떤 움직임의 매혹’을 동경에서 발표하여 그 재능을 인정받았고, 이시이무용단의 일원으로 동양의 주요 도시를 순연하였다.
1932년 이시이가 실명하면서 독립을 결심하고 경성으로 돌아온 그는 중앙보육학교 무용교수로 취임하는 한편, 무용연구소를 개설하고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였다.621) 1933년 2월 ‘승무의 인상’·‘우울’·‘땅에 바친다’·‘사랑의 슬픔과 기쁨’ 등으로 제1회 작품발표회를 갖는 것을 필두로 해방 이후까지 창작활동을 계속하였다.622) 그 역시 국내는 물론 미국·영국·프랑스·독일 등 구미 여러 나라에서 활동하였다. 그의 무용세계는 현대무용적 성향을 띠고 작품형상은 무용시의 흐름을 보였으나, 독자적 창조활동을 벌이면서부터는 한국적 소재에 눈을 돌려 우리 춤의 멋과 흥을 현대감각으로 여과·수용하면서 사색적이고 명상적이면서도 서정이 넘치는 작품을 발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