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그 밖의 인물들
이처럼 일제하 신무용의 태동은 특히 1926년 이후 최승희·조택원의 무용활동으로 상징지을 수 있다.623) 그렇다고 이 무렵 조선의 무용가가 이들 두 사람만 있었던 것은 분명히 아니었다. 조선의 무용수 가운데 가장 빨리 신무용을 접한 인물은 裵龜子였다. 1915년, 1916년에는 일본 무용계의 거두였던 덴카츠(松旭齋天勝)가 경성에서 공연을 하였다.624) 그 당시 덴카츠의 제자가 되어 일본으로 건너간 배구자는 1918년 경성에서 첫 공연을 하였다.625) 그녀의 출발이 순조롭게 나가는가 했으나, 1926년 덴가츠예술단에서 빠져나와 조선내에서만 활동을 하였다. 그는 고유한 전통무용의 현대화라는 소신과 서양무용의 적극적인 수용에 관심을 가지고 무용활동을 하였다.626)
金敏子는 최승희의 적선동·서빙고 시대의 문하로서, 신무용에 입문했던 인물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그는 유일하게 최승희를 따라 일본에 가서 최승희의 뒤를 돌보아 주었는데, 이 때문에 공연에 출현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최승희가 가정에 신경쓰지 않고 무용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까닭은 전적으로 김민자의 덕택이었다. 몇 년이 흘러도 해외공연에서 돌아오지 않자, 김민자는 1938년 조택원의 귀국공연에 파트너가 되어 공연하였다. 하지만, 공연의 성과는 탐탁하지 않았다. 곧이어 만난 최승희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끝내 무용을 포기하고 조선악극단에서 안무자로 활약하였다.627)
다까가 세이코(高田せソ子)에 사사했던 朴外仙은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1935년 제1회 발표회를 가진 후 곧바로 일본의 언론인과 결혼함에 따라 해방이 될 때까지 활동을 잠시 중단하게 되었다. 박영인은 미국인 루돌프 에플에게 무용을 배우고 그 뒤 무음악무용을 연구하여, 무용은 인간의 감정만을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사상까지도 표현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독일의 베를린 국립극장에서 무용발표회를 가졌으며, 1937년 독일 국립무용학교를 졸업한 후 이태리·헝가리 등지에서 여러 차례 공연을 가졌고,≪무용예술의 연구≫라는 저서를 남겼다. 이 밖에 장추화·金白峰·이속예·金美華 등이 최승희 연구소와 무용단에서 활동을 하였고, 陳壽芳이 조택원에게 사사하고, 趙勇子가 이시이연구소에서 활동하였다.628)
<沈勝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