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여자
여성의 頭飾은 두발과 관모 외에 쓰개가 중요한 부분이었다. 상류사회 여인들의 두식과 禮裝物로는 어여머리·큰머리와, 비녀·뒤꽂이·떨잠·첩지·댕기 등이 남아있었다. 모발을 보호하는 전통적인 방법에는 “단오날 창포물에 머리를 감으면 모발이 잘 자라고, 두통이 없어진다”672)고 하여 계속되었다. 結髮은 미혼은 길게 땋아 늘이고 부인은 낭자와 얹은머리를 하였지만 지역에 따라 그 차이가 있었는데,673) 畿湖지방을 중심으로 남쪽은 쪽진머리이고, 서북지방은 얹은머리가 유행하였다.
결발 개량이 계속 종용되는 가운데 새로운 유행으로 여학생을 중심으로 한 단발과, 부녀자들을 중심으로 한 일본식 머리가 혼용되어 한때 혼란기를 맞이한다. 단발을 한 여성들이 등장하자 이들을 ‘단발미인’, ‘毛短걸’이라 하였다. 또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챙머리가 유행하더니 얼마 안 가서 트레머리와 둘레머리가 등장한다. 트레머리는 교인들에게 유행하였으므로 ‘예배당 쪽’ 또는 ‘전도사부인 쪽’이라고 했는데, 1920년경 平安道 安州에서는 여염집 부인에게까지 유행하자 양반부인들은 이러한 머리를 한 부인들이 공동 우물을 쓰지 못하게 하는 일도 있었다.674) 쪽머리가 유행함에 따라 부인들의 저고리 깃이 머리기름으로 인해서 더러워짐을 방지하는 쪽받힘도 나왔다.675)
두발에서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를 일으킨 것은 파마이다. 1920년대에 미장원이 생기면서 새 전환기가 되었으며, 사회에 적지 않은 물의를 일으킨다. 파마를 한다는 것은 1930년대부터 도회지에서는 보편화하였으나, 시골에서는 1950년대까지도 큰 도전이었다. 파마를 하면 특히 시부모가 계신 경우는 수건을 써서 가리기도 하고, 심한 경우는 친정으로 쫓겨나기까지 하였다. 처음에는 쇠틀에 불을 담아 사용하여 “불파마”라고 하였는데 화상을 입기도 하였다.
쓰개는 조선시대 內外法에 의해 여인의 얼굴을 가리는 데 사용되었던 것으로 쓰개치마·장옷·천의·삿갓 등이 있었다. 쓰개도 계층이나 지방에 따라 달랐으니, 班人계층에서는 쓰개치마를 사용하였으나 차츰 장옷으로 대체되었으며, 西北지방에서는 삿갓이나 천의를 이용하였다. 이러한 쓰개도 의제개혁과 여성의 사회진출로 인하여 차츰 그 실효성을 잃게 된다. 이에 생활개혁의 일환으로 장옷벗기 운동이 일어난다.
학생들의 장옷벗기는 1911년 배화학당에서 교칙으로 정하고 대신 검정우산을 쓰게 하였다. 얼굴을 가리고 內外를 하는 오랜 습속에 젖은 당시 풍토에서는 신식학교에 다니는 여학생들에게도 얼굴을 내놓고 다니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에 새로 들어온 우산이 장옷의 대용품으로 등장한 것이다. 여학생들에게 우산가리기 행위는 잠시동안 과도기적 양상으로 나타났으나 점차 사라진다. 그러나 일반 부녀자에게 우산 쓰기는 차츰 확산되어 자유로이 나들이 할 때 번거롭게 낯을 가리거나 몸을 감추던 가마타기나 장옷쓰기가 양산으로 대신하였다. 양산은 1920년대에는 여러 가지 색과 모양이 나오면서 장옷 대신 이용하도록 선전하고 있으나,676) 민간에서는 쓰개에 대한 인습이 여전히 남아있었다.677) 시골에서는 얼굴을 내놓거나 우산가리기란 용납 될 수 없는 행위였으며, 1930년대까지도 특히 양반행세를 한다는 집에서는 혼례를 치른 새댁이 외출 할 때는 입는 치마라도 반드시 뒤집어 쓰도록 하였다. 그 후 일반 시골노인들에게는 수건이 쓰개의 대용품이 되었으며, 차츰 방한과 치레를 겸한 목도리와 숄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