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토막민·실업자·걸인의 급증
이농민들은 도시로 나가서 날품팔이를 하거나 공사장의 인부로 하루하루를 연명해 나갔다. 이들 대부분은 도시의 공터나 다리 밑에 땅을 파거나 거적을 두른 움집에서 살았기에 토막민이라고 불렸다.704) 특히 1920년 초 산미증산이 시작되면서 두드러지게 생긴 현상이었다. 당시 신문에는 “빈민 소굴의 생활 상태를 본즉 빈민굴이라 할 만한 곳은 만수대 아래를 위시하여 창전리 북부와 본정·남정·유정 하동 일대이며, 토성 일대의 토막민은 가장 적빈자들인데, 그들은 모두 하루에 한끼도 변변히 못하는 可憐 인생들로서 그 수가 무려 5천 명에 달하는 참담한 현상이라”고 하였다.705)
그 외에 이농민들은 도회지에서 직업을 얻지 못하면 실업자가 되거나 걸인이 되었다. 1930년대 신문에 “시중은 걸인의 沙汰요, 각 철도 정거장은 유랑민으로 가득차 있었다”는 기사가 나오고, 걸인 등은 어린 처자를 데리고 이 집 저 집을 찾아다니면서 밥을 얻어다가 2일에 한끼를 하거나 그나마 못하면 4∼5일 씩 굶고 아사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고 한다.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