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주요 정치세력의 통일국가 수립운동
1) 우익 정치세력의 노선과 활동
식민지시기 민족운동세력 중 조선공산당이나 좌익 정치세력과의 연합에 반대한 정치세력들을 우익 정치세력으로 분류할 수 있다. 국내에서 1920년대부터 자치운동·문화운동을 전개했던 金性洙·宋鎭禹를 중심으로 하는 東亞日報그룹(한국민주당을 결성), 중국에서 大韓民國臨時政府(이하 임시정부)내 金九를 중심으로 하는 韓國獨立黨세력, 미국에서 임시정부의 駐美代表部 대표로 활동하였던 李承晩 등이 대표적인 우익 정치세력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우익 정치세력의 특징은 서구적인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추구한다는 것과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정치노선을 가장 중요한 정치적 목표로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8·15 직후에 사회주의적 사회체제를 선호하는 대중들의 열망으로 전자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지 못했다면, 후자는 이들 우익 정치세력들을 하나로 묶는 가장 중요한 고리로서 작용하였다. 따라서 우익 정치세력들은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좌익과의 정치적 합작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였으며, 1945년 말 이후 전개된 信託統治 반대운동은 우익 정치세력들이 공동전선을 형성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우익 정치세력들은 식민지시기 동안 국내에서 활동했던≪동아일보≫그룹을 중심으로 한 韓國民主黨이 가장 먼저 활동을 시작한 이래 이승만과 임시정부의 환국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특히 우익 정치세력들은 미군정의 지원을 통하여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승만과 임시정부의 환국 직후에는 주도권을 둘러싸고 갈등이 있었지만,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계기로 하여 우익 정치세력은 연합체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反託鬪爭委員會·非常國民會議·民主議院 등은 우익 정치세력들이 반탁의 입장에서 미·소공동위원회에 대처하기 위한 공동전선을 취하기 위하여 조직되었다.
그러나 우익 정치세력들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된 이후 우익 내부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분열되기 시작하였다. 우익 내부의 분열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서 및 미·소공동위원회, 그리고 미군정에 대한 견해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였지만,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파쟁의 과정에서 나타났다. 또한 1946년 6월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과 관련된 소위 ‘井邑 발언’ 이후 우익 정치세력들 내부에서 정부수립을 둘러싼 갈등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46년 말 이후 이승만과 임시정부세력은 각기 주도권 확보를 위한 각각의 연합체를 조직하였으며,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1947년 말 이후에는 서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은 대한민국정부의 수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세력은 분단정부 수립에 반대하면서 38선 이남과 이북의 정치협상을 추진하였다.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의 경우에도 정부수립의 과정에서 분열되었다. 양 세력은 모두 대한민국정부에 참여하였지만, 서로간의 견해 차이 및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으로 새 정부하에서 與野로 나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