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좌익 정치세력의 노선과 활동
좌익 정치세력은 8·15 직후 가장 강력한 정치적, 조직적 힘을 가지고 있었다. 식민지시기 이래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농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 해방정국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였던 친일파의 척결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8·15 직후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던 좌익 정치세력은 크게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조선신민당 등이 있다. 이 세력들은 북한에 있는 좌익 정치세력들과의 연계를 도모하면서 38선 이남에서 좌익의 정치활동을 주도하였다.
좌익 정치세력은 8·15 직후 建國準備委員會와 朝鮮人民共和國의 조직을 통해 공동의 정치노선을 걷는 것처럼 보였다. 이들은 토지개혁이나 친일파 문제에 있어서 인식을 함께 하고 있었으며, 미군정에 대해서도 협조노선을 취하고 있었다. 1946년 초에도 ‘모스크바 3상협정에 대한 지지’ 노선을 선언하면서 공동전선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공동전선은 1946년 2월 民主主義民族戰線의 조직으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좌익 정치세력들은 이미 8·15 직후부터 갈등의 소지를 내부에 안고 있었다. 좌익 내부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건국준비위원회·조선인민공화국·민주주의민족전선(약칭 민전) 내에서 조선공산당과 온건좌파 사이에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조선공산당이 주도권 장악에 강한 집착을 보이면서 온건좌파들은 좌익 정치세력의 연합체에서 점차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1946년 중반 미군정의 지원하에 좌우합작위원회가 설치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조선공산당은 소위 ‘新戰術’을 채택하여 미군정에 대한 강경한 투쟁노선을 채택하면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했던 반면, 온건한 좌파들은 좌우합작위원회의 성공에 모든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갈등의 정점은 三黨合黨에 있었다. 삼당합당은 좌파의 대표적인 정당이었던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조선신민당 경성특별위원회가 대중정당으로의 전환을 위하여 추진한 것이었는데, 새로 조직될 대중정당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각 정당이 분열된 것이었다. 결국 삼당합당을 통해 南朝鮮勞動黨이 창당되었지만, 좌익 정치세력을 모두 포괄하는 대중정당이 될 수 없었다. 해방정국에서 좌파만의 주도권을 강조한 조선공산당과, 우익과의 정치적인 결합을 추진하였던 온건좌파가 갈라선 것이었다.
1947년 이후 좌익 남조선노동당은 당세의 확장을 위해 노력하였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1948년을 기점으로 남조선노동당의 상층부 인사들은 대부분 38선 이북으로 정치적 무대를 옮겼고,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에 참여하였다. 온건좌파세력은 중도파세력과의 연합을 통해 38선 이남에서의 유엔 감시하의 총선을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시도하였다. 온건좌파세력 중 일부는 1948년 이후 38선 이북의 정권에 참여하였으며, 38선 이남에 잔류한 세력들은 1950년의 제2대 총선에 개인적으로 참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