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근대52권 대한민국의 성립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1. 미군정기의 사회3) 9월총파업과 10월항쟁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1. 해방 이전 미·소의 대한정책
          • 1) 미국의 전후 대한정책 형성
          • 2) 해방 이전 소련의 대한정책
        • 2. 해방 이후 미·소의 점령정책
          • 1) 분할점령과 미·소의 초기 점령정책
          • 2)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과 미·소공동위원회(1946∼1947)
          • 3) 점령에서 분단으로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1. 광복 전후의 통일국가 수립운동
          • 1) 건국준비위원회의 활동
            • (1) 제2차 세계대전과 해방
            • (2) 해방정국과 건국준비위원회의 활동
            • (3) 조선인민공화국의 탄생과 좌절
          • 2) 신탁통치 논쟁과 좌우대립
            • (1) 모스크바 결정과 국내의 파장
            • (2) 우익세력의 통일전선-비상국민회의
            • (3) 좌익세력의 통일전선-민주주의민족전선
            • (4) 신탁통치 문제와 좌우의 갈등
            • (5) 탁치문제에 대한 논쟁
            • (6) 신탁통치 문제 이후의 정국
        • 2. 주요 정치세력의 통일국가 수립운동
          • 1) 우익 정치세력의 노선과 활동
            • (1) 한국민주당
            • (2) 임시정부세력과 한국독립당
            • (3) 이승만
          • 2) 좌익 정치세력의 노선과 활동
            • (1) 조선공산당
            • (2) 조선인민당과 근로인민당
            • (3) 조선신민당
            • (4) 삼당합동과 남조선노동당
          • 3) 중도세력과 좌우합작운동
            • (1) 국민당
            • (2) 미·소공동위원회 이전의 좌우합작 노력
            • (3) 좌우합작위원회
            • (4) 민주주의독립전선과 민족자주연맹
          • 4) 남북지도자회의-연석회의와 남북협상
            • (1) 김구·김규식의 남북요인회담 제의
            • (2) 북의 연석회의 제안
            • (3) 연석회의와 남북협상
            • (4) 평가와 의의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1. 미군정기의 사회
          • 1) 미군정기의 사회경제적 상황
            • (1) 경제적 혼란
            • (2) 사회적 혼란
          • 2) 미군정기의 사회갈등
            • (1) 노동문제
            • (2) 농업문제
          • 3) 9월총파업과 10월항쟁
            • (1) 9월총파업
            • (2) 10월항쟁
        • 2. 미군정기의 경제
          • 1) 해방의 경제적 의미
          • 2) 농지개혁과 식량공출
            • (1) 농지개혁
            • (2) 식량공출
          • 3) 공업생산의 소장과 귀속사업체 처리
            • (1) 공업생산의 소장
            • (2) 귀속재산의 처리와 자본의 재편
          • 4) 노동자의 존재 양태와 노동운동
            • (1) 노동자의 존재 양태와 미군정의 노동정책
          • 5) 금융·재정과 무역·원조
            • (1) 미군정기의 금융·재정
            • (2) 미군정기의 무역·원조·남북교역
        • 3. 미군정기의 문화
          • 1) 문학
            • (1) 해방공간의 소설
            • (2) 해방공간의 시
            • (3) 문학운동
          • 2) 미술
            • (1) 해방공간과 미술단체
            • (2) 왜색과 민족미술
            • (3) 미술의 대중화와 생활화
            • (4) 미술대학의 출현
          • 3) 음악
            • (1) 시기구분과 음악사적 특징
            • (2) 제1기 음악
            • (3) 제2기의 음악 전개
            • (4) 제3기의 음악전개
          • 4) 연극·영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 1. 대한민국의 수립
          • 1) 단정노선의 확정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입국
            • (1) 미·소공동위원회의 최종적 결렬과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
            • (2)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입국과 남한단선 결정
          • 2) 5·10선거와 대한민국의 수립
            • (1) 단선을 앞둔 미군정·과도정부의 준비
            • (2) 단선에 대한 국내 정치세력의 대응
            • (3) 5·10선거와 그 결과
            • (4) 제헌국회와 정부수립
        •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
          • 1) 해방 후 북한 각 지역의 인민위원회 수립과 소련군 주둔
            • (1) 소련군의 북한 진주
            • (2) 각 지역 인민위원회의 성립과 개편
            • (3) 스딸린 비밀전문과 서북5도행정국
          • 2) 정당들의 조직과 활동
            • (1)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 (2) 조선민주당
            • (3) 북조선천도교청우당
            • (4) 조선신민당
          • 3)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수립과 ‘민주개혁’
            • (1) ‘탁치정국’을 전후한 좌우대립
            • (2)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수립
            • (3) ‘민주개혁’
          • 4) 북조선노동당 창당과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수립
            • (1)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결성과 북조선노동당 창당
            • (2) 1946년 11월 인민위원회 선거
            • (3)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수립
          • 5) 헌법 제정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
            • (1) 헌법 제정
            • (2) 북한에서의 분단정부 수립
(2) 10월항쟁

 9월 23일의 부산 철도파업을 시작으로 총파업이 전국적으로 그리고 각 분야로 확산되었을 때, 대구에서도 철도파업을 필두로 우편국·섬유산업·출판노조 등이 이에 합세하였다. 그리하여 30일 현재 대구를 중심으로 한 경북의 총파업에는 30여 개 업체 총 4,000여 명이 참여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대구의 총파업은 전평의 대구 지역조직이라 할 수 있었던 조선노동조합대구평의회가 주도했는데, 그들은 27일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이를 통해 일사불란하게 대구지역의 총파업을 이끌었다. 그런데 이 대구지역의 총파업은 다른 지역의 총파업이 경찰에 의해 분쇄되거나 자연적으로 약화된 데 비해, 이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즉 10월 1일 경찰의 발포로 군중 1명이 사망하는 사건을 계기로 대구시민의 대규모 항의시위가 발생, 사태는 파업 차원을 넘어 민중항쟁의 차원으로 확대되었던 것이다.493) 나아가, 대구에서 전개되었던 항쟁은 며칠 사이에 경북의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그렇다면 대구파업이 대구와 경북지역의 민중항쟁으로 발전했던 원인은 무엇인가. 우선 9월총파업 발생의 동일한 원인에서 그 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즉 제1차 미·소공위가 결렬된 이후 미군정은 강경 좌파세력에 대한 탄압을 강화시켰고 이에 대응하여 강경 좌파세력은 미군정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신전술’의 새로운 방침을 채택했다. 총파업은 좌파진영의 이러한 전술 변화 속에서 모색되었고, 따라서 항쟁 역시 그 연장선상에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포괄적인 정치적 설명만으로 항쟁으로의 발전 전체를 설명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항쟁의로의 발전을 설명할 수 있는 또 다른 원인은 당시 대구와 경북지역이 직면했던 사회경제적인 상황, 특히 귀환동포문제와 식량문제에서 찾을 수 있다. 우선 다음<표 11>은 당시 귀환동포의 국내 분포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경북의 귀환동포 규모는 경남과 충남에 이어 3번째로 높았다. “고향이라고 찾아와도 굶어 죽겠으니 가다가 죽으나 여기에서 죽으나 마찬가지”라며 대구역을 떠나는 이재민이 1일 100여 명이나 되었다는 보도494)는 당시 대구 귀환동포의 처지가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 같은 귀환동포의 열악한 처지가 항쟁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도명 경기 충북 충남 경북 경남 전북 전남 강원 서울 제주
인원수 142 126 360 312 393 236 293 87.3 255 22 2,226.3

<표 11>귀환이재민의 국내 분포 (단위:1,000명)

≪동아일보≫, 1947년 1월 11일.

 다음으로 대구·경북에서의 민중항쟁은 식량문제와 긴밀한 관련이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미군정은 1946년 2월 미곡의 강제매입을 시행했고, 이에 3월 대구 미군정청은 미곡의 불법운반과 자유매매를 금지시켰다. 뿐만 아니라 그해 여름에 발생했던 콜레라는 그 방역대책을 위해 대구 주변의 교통을 차단시켰는데, 이는 대구 주변의 농촌에서 개별적으로 소량의 식량을 반입하여 근근히 생계를 연명해왔던 대다수 대구 주민들에게 타격을 주었다. 당시 대구에서 빈발했던 식량배급 요구의 항의사태는 당시 대구지역의 바로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었다.495)

 이상의 사태가 주로 대구지역에 해당되었던 문제라 한다면, 대구 주변의 농촌지역에서는 식량의 강제매입이 문제가 되었다. 다음의<표 12>는 1945년산 미곡수집과 1946년산 하곡수집에 대한 전국적인 실적을 보여주고 있다.

구 분 경기 충북 충남 전북 전남 경북 경남 강원
1945년산

미곡수집
8.2 7.3 9.1 20.2 16.9 7.3 5.9 57.5 12.4
1946년산

하곡수집
62.5 70.4 42.6 69.6 11.0 74.4 41.4 142.8 48.0

<표 12>1945년산 미곡수집 및 1946년산 하곡수집 계획대비 실적 (단위:%)

조선은행 조사부,≪조선경제연보≫(1948년)Ⅰ-243쪽과 조선은행 조사부,≪경제연감≫(1949년)Ⅳ-35쪽을 이용하여 작성.

 <표 12>에 따르면, 경북지역의 1945년산 미곡수집 실적은 계획대비 7.3%에 그치는 것으로서 좋지 않은 편이었다. 그러나 경북지역의 1946년산 하곡수집 실적은 계획대비 74.4%로서 강원을 제외하고는 전국적으로 최고였다. 이것이 시사하고 있는 바는 경북 미군정청이 1945년산 미곡수집의 저조한 실적을 감안, 1946년산 하곡수집에 있어서는 계획량 달성을 위해 강력한 입장을 취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경북 미군정청은 하곡수집시 목표 달성을 위해 경찰을 총동원할 정도로 농민들을 강압했고, 때로는 하곡수집에 응하지 않는 농민들을 투옥하기조차 했다. 하곡수집과 관련된 경북 미군정청의 이 같은 강압적 태도가 10월항쟁 확산의 한 원인을 제공했던 것이다.496)

 다른 한편, 대구에서의 파업이 대구와 경북지역의 민중항쟁으로 발전했던 또 다른 원인은 이 지역 좌파세력의 유연하고도 강력한 영향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해방 직후 대구의 좌파진영은 보다 유연하게 행동함으로써 오히려 강력해질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그들은 우파들과 더불어 건국준비치안유지회·탁치반대공동투쟁위원회·대구공동위원회 등을 결성함으로써 9월총파업 및 10월항쟁 이전까지 3차례에 걸친 좌우합작적 연대를 성사시켰다. 그들이 보여주었던 이 같은 유연성은 역으로 미군정의 탄압을 피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했고, 그 결과 미군정의 탄압으로 약화되었던 다른 지역의 좌파세력과는 달리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대구파업의 민중항쟁으로의 발전이 좌파진영에 의해 의도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발전의 배경에는 이 같이 강력한 영향력을 지녔던 대구·경북 좌파진영의 존재가 있었다.497)

 아무튼 10월 2일 저녁 이후 대구항쟁은 경북의 여타 지역으로 확산되었는데, 항쟁은 경북지역 전체 22개 군 가운데 19개 군에서 발생하였다. 태백산맥 以東의 몇 개 군을 제외한 경북 전역에서 발생했던 이 항쟁에는 약 32만 명의 민중들이 참여했다. 항쟁을 통해 농민은 무엇을 요구했는가. 그들이 가장 많이 요구했던 것은 경찰을 비롯한 친일파의 제거였다. 또한 그들은 식량 및 생활난, 미군정 정책 비판, 좌익인사 구속에 대한 항의, 그리고 민주주의 등을 요구했다.498) 즉 그들은 해방의 도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바뀌지 않는, 경찰로 상징되었던 체제의 현실에 분노했고, 귀환동포 및 식량문제 등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욱 악화되어 갔던 사회경제적 혼란상은 그러한 그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던 것이다.

 그러나 항쟁에 참여한 민중들에게 되돌아온 보복은 잔인하고 폭력적인 유혈진압이었다. 대구항쟁 진압에 이어, 경북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약 3천 명의 경북 경찰력 이외에 충남경찰대 400명, 충북경찰대 300명, 경기경찰대 400명이 투입되었고, 충남의 국방경비대 2연대와 3·4관구의 미군도 투입되었다. 나아가 서울에서 내려온 우익청년단도 진압에 합세하였다. 따라서 항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사살, 체포되거나 도피하였고 아니면 적어도 항쟁에 참여했던 사실 자체를 숨겨야 했다. 또한 이후에 많은 사람들은 경찰의 추적을 피하여 낮에는 산에 올라가고 밤에는 마을로 내려오는 ‘산사람’이 되었다. 항쟁이 진압되었을 때 경북지역에서 군중 수백 명이 사망했고 7천여 명이 검거되었다. 한편 경찰측에서도 수십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경북항쟁이 마무리될 무렵 항쟁은 경남지역으로 비화되었다. 경남에서는 10월 7일에서 14일까지 각지에서 다수의 항쟁이 발생했으나, 경북항쟁과는 달리 그것은 분산적이고 고립적인 모습을 띠었다. 이어 10월 17일에서 19일 사이에는 충남의 서북부지역에서 항쟁이 발생하였다. 10월 20일에서 22일 사이에는 경기 서북부의 38선 부근에서 항쟁이 발생하였다. 이곳에서의 항쟁은 소규모의 인원이 경찰서나 지서를 “치고(hit)” 북으로 “빠지는(run)” 모습을 보였다. 10월 29일에서 11월 첫 주 사이에는 강원도 동해안 지역에서 항쟁이 발생하였다. 11월 29일에서 11월 4일까지는 나주와 화순을 중심으로 한 전남 중북부지역에서 대규모의 항쟁이 발생하였다. 11월 7일 이후에는 해남을 중심으로 한 전남 남쪽지역에서 항쟁이 발생하였다. 10월 1일 대구로부터 시작되어 이때까지 전국에 걸쳐 발생했던 10월항쟁은 12월 8일 전북 전주에서의 항쟁을 마지막으로 종료되었다.499)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야기되었던 미군정기의 사회경제적 혼란과, 노동문제 및 농업문제 등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던 좌파 주도의 사회운동과 이에 대한 미군정 정책의 충돌은 결국 이렇게 9월총파업의 형태로, 10월항쟁의 형태로 폭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와 같은 폭발에는 정부수립을 둘러싼 미군정과 좌파세력 간의 정치적 갈등이 커다란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파업과 항쟁의 이러한 폭발은 문제의 해결을 가져왔던 것은 아니었다. 경찰을 앞세운 미군정의 억압에 의해 그 폭발이 진압되고 분쇄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남겨진 문제는 반공을 앞세운 국가권력에 의해 사회에 남겨져 있는 좌파적 잔존 요소들을 척결하는 일이었다. 이후 미군정기 동안 행해졌던 것은 바로 그러한 작업들이었다.

<丁海龜>

493)대구에서의 총파업과 항쟁에 대해서는 정해구, 앞의 책, 102∼113쪽 참조. 이후 10월항쟁 설명과 관련하여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 그 설명은 이 책의 내용에 따른 것이다.
494)≪대구시보≫, 1946년 4월 13일.
495)정해구, 앞의 책, 90∼92쪽.
496)경북지역에서 미군정청에 의한 강압적인 식량수집정책에 대해서는 정해구, 위의 책, 90∼99쪽 참조.
497)해방 직후 대구지방 정치의 전개에 대해서는 정해구,<해방직후 대구지방 정치의 전개>(≪역사비평≫1, 역사문제연구소, 1987) 참조.
498)정해구, 앞의 책, 148쪽.
499)타 지역의 항쟁에 대해서는 정해구,<경북지역 이외의 10월인민항쟁>(정해구, 위의 책, 제5장) 참조.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