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고려교향악협회(고려교향악단)
해방된 지 한 달 만에 현제명은 음악인을 규합하여 9월 15일 고려교향악협회를 결성하고 이사장에 취임함으로써 해방공간 악단에 여전히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현제명은 해방 직전 일본제국주의 침탈시대에 경성후생실내악단의 이사장이자 조선음악협회의 이사, 그리고 경성음악연구원 원장을 지냈고, 해방 후 미군이 ‘남한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로 등장하자 미국에 유학한 바 있는 데다 한민당(한국민주당) 당원이었으므로 유리한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해방 후 생산 감축, 높은 인플레이션, 식량 부족 등 경제적 난관에 당면하고 있는 현실이었으므로 조선음악건설본부에서 탈퇴한 음악인들은 새로운 관현악단의 출현을 원하여 현제명 중심의 고려교향악협회와 그 산하의 고려교향악단이 조직되었다.569)
고려교향악협회는 “조선 음악 예술의 질적 향상과 이에 관한 사업의 발전을 추진함”이 목적이자 강령이었다. 명예회장은 러치(Archer L. Lerch) 미군정청 제2대 장관(1945년 12월 취임), 이사장 현제명, 사무국장 金寬洙, 총무 金生麗, 지휘 계정식·포크너(Faukner, 미육군중위)·김성태·林元植 등이었으며 회원은 김성태·김원복·金學相·金炯魯·김혜란·南宮堯卨·李仁範·李仁亨 등이었다. 고려교향악단의 첫 무대 출연은 한민당 결성식(1945. 9. 16)의 축하공연이었다. 고려교향악단는 1946년 초 63명이 되어 2관 편성의 관현악단을 운영할 수 있었다.570) 1945년 10월 수도극장에서 계정식 지휘의 창단연주회를 필두로 ‘미군장병 위문연주회’(11. 4), ‘조선독립축하 대음악회’(12. 10) 등을 연주하여 악단 중심으로 부각되었다. 고려교향악단이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정기연주회를 통하여 모차르트·베토벤·슈베르트·스트라우스·차이코프스키 등 양악을 중심으로 연주하였다.
고려교향악협회-고려교향악단은 제1기 동안 의욕적인 활동을 펼치다가 제2기에는 악단 중심체가 되었다. 1948년 4월에 한국방속국(HLKA)과 한달에 두 번 방송하기로 계약하였다.571) 그러나 제3기는 고려교향악단의 적자운영으로 여기에서 탈퇴하여 조직한 서울관현악단과 유명한 ‘땅뺏기’ 갈등을 거치면서 점차 해체의 길로 들어섰다.572)
569) | 현제명은 이미 건국준비위원회에 불참하고 한국민주당(한민당)에서 정당활동을 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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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0) | 고려교향악단(Korean Symphony)의 단원수는 해마다 유동적이었다. 1945년 9월 창립 이후 30명, 1946년에 50명, 1947년에 60명, 1948년에 65명이었다. 1947년부터 독고산 체제가 될 때까지 현재명에 의하여 주도된 고려교향악단은 1946년 초까지 김성태와 계정식 그리고 포크너(제3회공연, 3. 16)의 지휘, 1946년부터 1948년 6월까지 임원식이 지휘하였다. 포크너는 미 육군중위로서 미군정 문교부 음악과 협동과장이었다. 고려는 1946년 6월까지 22회의 공연을 하였으며, 1947년 4월부터 같은 해 12월까지 미국관리들을 위한 8번의 연주회를 가졌다(네 번은 미군정청극장, 네 번은 시청건물). USAFIK/G-2(Records of U.S Theaters of War WWⅡ. United State Army Forces in Korea 24 Corps G-2 Historical Section), 24 June 1948, 25 June 1948. |
571) | Ibid. |
572) | 고려교향악단은 고려교향악협회의 세가지 수입원에 의존하여 운영되었다. 회원제와 외부 기증 그리고 매표 수입이 주 수입원이었다. 그러나 1948년 6월 1일부터 재무부 법령 제193호에 의거하여 극장입장세가 10할 과세됨에 따라 객석 입장이 반이나 줄어들자 고려교향악단 역시 큰 재정적 타격을 받았다. 매달 단원 봉급 40만 원, 이틀간의 공연비용 10만 원(극장 사용료, 피아노 사용비 등), 1회의 지휘비 5만 원 등의 비용에다 극장 수입의 50% 납세로 이후 6만 5천 원 정도의 적자로 운영되었다(Ibid.;≪새한민보≫, 1948년 6월 중·하순호, 4쪽;채동선,<문화정책의 확립>,≪평화일보≫, 1948년, 9월 3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