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국악원
해방 이전의 조선음악협회 ‘조선 음악부’ 부장인 함화진, 상무이사 박헌봉, 이사 金錫九·崔景植이 해방과 함께 조선음악건설본부의 ‘국악위원회’로 범 국악인을 망라하여 출발하였다. 조선음악건설본부의 국악위원회는 기존의 구왕궁아악부와 일부 통합을 시도하였다.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와 박헌봉의 노력으로 국악위원회가 ‘국악건설본부’(8. 19)로, 다시 국악건설본부가 8월 29일에 국악회로 발전, 조선음악건설본부에서 독립하였다가 국악원으로 확대 결성(1945. 10. 10)되었다. 강령은 “조선국악의 체계화, 조선민중에게 개방, 신 조선음악건설”이었다.574) 국악원의 조직은 위원장 함화진, 부위원장 박헌봉, 총무국장 柳起龍, 문화부 함화진(겸 부장)·김윤덕·김천흥·丁南希·崔景植·이병성, 사업국장 任曙昉 등이었다.575) 국악원은 또한 창극단인 國劇社를 결성(1945. 11. 5)시켜 직속 창극단으로 두었다.
국악원은 창극·민요·풍물·농악을 삶의 예술로 역사화시키고 풍물채보를 체계화하였으며, 조선음악가동맹측 작곡가들과 국악에 관해 쌍방간의 대화를 전개하고, 조선문화단체총연맹에 가입하여 문화전선을 공동으로 펼쳤다.
그리고 국극사 산하 직속창극단을 비롯하여 130여 명의 모든 창악인들이 동참하여 ‘대춘향전’을 창립공연(1946. 1. 11∼18, 국제극장)으로 공연하였다. 이 공연을 계기로 국극사 이외에 국극협회·조선창극단·金演洙창극단·임방울일행 등 5개 단체가 국악원산하 단체로 제2기 전기에 조직되어, 해방공간 제1·2기를 국악원이 주도하게 되었다. 국악원은 해방공간의 민중에게 ‘창극문화’를 민족문화 계승으로 꽃피우게 하였다.
그러나 1947년 8월 직전부터 미군정과 수도경찰청 등 관계 당국은 국악원을 좌파단체로 불법화하고 위원장 함화진을 검거하였다. 이로 인해 부위원장인 박헌봉이 위원장으로, 사퇴한 간부들을 대신하여 양악인 채동선이 연구부장으로 바뀌는 등 변화를 겪으면서 그 활동이 위축되었다. 더욱이<아악부 국영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어 1948년부터 정부의 지원이 있는 데다가, 함화진이 세상을 뜨자 국악원 조직은 극도로 위축되었다. 이후 6·25전쟁이 일어나자 공기남·안기옥·박동실·임소향·丁南希·조상선·최옥산 등 주로 판소리(창악)와 가야금 연주자가 월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