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반공체제와 반공국가의 물리력 확충
분단이란 국토의 분단뿐 아니라 정치세력과 이념의 분단을 의미하였다. 그것은 남에는 자본주의·자유민주주의 이념이, 북에는 공산주의 이념만이 유일하고 배타적인 정치이념으로 허용됨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한 단일정부 수립노선이 폐기되고 단선·단정노선이 실질적으로 결정되는 1947년 8월부터 좌파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및 숙정작업이 시작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단일정부 수립노선의 폐기는 38도선 이남에서 사회주의·공산주의세력과 이념이 합법적 정치의 영역에서 배제되는 결정적 전환점이 된 것이다.
좌파세력이 합법적 정치의 공간에서 배제되기 시작한 시점은, 1946년 가을 朴憲永의 朝鮮共産黨이 합법·비합법의 투쟁전술을 병행하는 소위 ‘新戰術’을 택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9월총파업’과 ‘10월항쟁’ 과정에서 대중시위·파업·민중투쟁 등의 물리적·폭력적 투쟁방법이 동원되었고, 여기에 맞서 미군정은 1947년 9월 7일 박헌영·李康國·李舟河 등 조선공산당 간부에 대한 체포령을 발함으로써 사실상 조선공산당을 불법화시켰다. 그러나 이는 좌익진영 전반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한편 박헌영의 극좌노선이 불러온 탄압과 이에 대한 좌익진영 내부의 반발 등으로 인해 분열과 침체에 빠져 있던 좌파세력은 1947년 봄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로 인해 합법적 정치활동의 공간을 얻게 된다. 2차 공동위원회의 성사를 기대했던 좌파세력은, 7월 들어 다시 공동위원회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자 ‘공동위원회 진전을 촉구하기 위한 압력행사용’으로 대규모 군중을 동원한 공동위원회 촉진대회를 개최하였다. 좌파는 소위 7·27투쟁으로 알려진 ‘미·소공동위원회 재개 경축 및 임시정부 수립 촉진 인민대회’를 전국적으로 개최한 데 이어, 8·15해방기념대회라는 명목으로 다시 미·소공동위원회 촉진을 위한 대규모의 군중투쟁을 계획하였다.
좌파세력에 대한 당국의 전면 검거는 이를 계기로 하여 시작되었다. 군정당국은 정당 및 사회단체의 기념대회를 불허하는<행정명령 5호>를 발포하여 8·15행사를 금지한 데 이어, 8월 11일부터 민주주의민족전선(약칭 민전) 산하 각 정당·사회단체 인사에 대한 대대적 검거를 시작한 것이다. 소위 ‘남조선 적화 및 군정파괴 음모사건’으로 알려진 좌익세력에 대한 총검거로 23일경까지 전국에서 약 2,000명이 체포되었다. 그 중에는 南勞黨 부위원장 李基錫, 근로인민당 위원장 白南雲, 張建相·李如星을 비롯하여 민주주의민족전선·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약칭 전평)·전국농민조합총연맹(약칭 전농)·女性同盟·人民共和黨·靑友黨 간부 등 좌익 주요 인사만도 150명에 이르렀으며, 남로당 위원장 許憲에 대한 체포령도 내려졌다. 이는 남로당을 비롯한 좌파정당·사회단체에 대한 사실상의 불법화 조치라고 할 수 있다.627)
좌파세력에 대한 총검거령과 함께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국가기구 및 공공부문으로부터 좌파세력을 전면적으로 색출·검거하는 작업이 1947년 8월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1947년 8월과 9월에 걸쳐 서울방송국·체신부·경찰·형무소·소방서·운수부 등 중앙행정기관의 각 부서 및 서울 시내의 각급 학교 교원, 각 지방 경찰서 등에서 ‘남로당 세포사건’, ‘적화사건’ 등으로 불린 검거선풍으로 약 670여 명이 검거되었다. 이러한 색출작업은 중앙과 지방에서 5·10선거 시점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숙청 대상은 경찰·형무소·사법부 및 재무·농무·운수·체신 등 중앙행정부서, 방송국 및 각급 학교, 각 지방 행정경찰조직 등 중앙과 지방의 거의 전 국가부서를 망라하였으며, 검거규모는 1947년 8월부터 1948년 5월까지 신문지상에서 확인되는 인원만도 총 1,300여 명에 달하였다.628)
좌익진영에 대한 이러한 조치의 의미는, 11월 5일 군정청이 발표한<時局對策要綱>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이 요강에서 군정청은, 남한의 정치사회는 ‘군정에 협력하는 애국적·친미적·건설적 진영과 반민족적·반군정적·반미적·파괴적 진영’으로 양분되어 있는데, 정치적 숙청을 통해 후자를 배제한 뒤에야 좌우중간의 노선이 정당하게 구획될 것이라고 천명하고, 특히 공산계열 당적을 가진 자는 관공리가 되지 못한다고 밝혔다.629) 즉, 기존의 남한 좌익계열은 국가의 영역뿐 아니라 합법적 정치경쟁의 공간에서 전면 배제될 것이며, 정치적 경쟁은 그 나머지 세력간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좌파세력 역시 남한 정치체제내의 합법적 정치세력으로 남기를 거부하였다. 남로당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입국하여 활동을 개시하자 물리적으로 선거를 저지하기 위해 파업·맹휴·집회·시위·경찰지서 공격 등을 감행하였으며, 중간좌파세력들은 남북협상에 참여하여 북한정권 수립에 참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결국 이러한 과정을 통해 5·10선거 이전에 이미 남한의 정치체제는, 좌파세력이 국가의 영역뿐 아니라 합법적인 정치적 경쟁의 공간, 즉 정치사회에서 전면적으로 배제되고 불법화된 체제 즉, 우리가 ‘반공체제’라고 부르는 것으로 확립되어 갔다. 이러한 남한의 반공체제는 정부수립 후인 1948년 12월 1일<국가보안법>을 통해 법제화된다.
한편 반공체제의 확립과 함께 북한 및 좌파의 위협에 맞서기 위한 군 및 경찰력의 강화가 추진되었다. 단선노선과 함께 1947년 9월 말 미군의 조기철군방침이 결정되자 미국은 가장 먼저 한국군 창설문제를 검토하였다. 그러나 한국군 창설문제는 “한국문제가 유엔에서 검토되고 있는 한 미국에 의한 일방적 조치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정치적 판단에 따라 계속 유보되어 오다, 결국 1948년 2월 말 유엔에서 남한만의 단선실시가 결정됨에 따라 합동참모부(JCS)에서 3월 10일 국방경비대 증강안이 승인된다. 하지만 그동안 미군정은 내부적으로 조선경비대 증강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고, 그 결과 조선경비대는 1947년말 1만 7천 명 수준에서 1948년 3월에 이르러 5만 명 수준으로 확충되었다.
경찰력 역시 1947년 7∼8월의 2만 8천 명 수준에서 1948년 초 3만 명, 1948년 6월 3만 5천 명 수준으로 증강되었다. 1945년 말의 1만 5천 명에 비해 2배 이상 팽창한 것이다. 당시 미군정은, 지나치게 팽창된 정부조직이 장차 수립될 남한정부의 재정위기를 초래하고 또한 미국의 대한원조가 팽창된 관료조직의 유지비용으로 낭비될 것이라는 판단하에, 1947년 7월부터 행정 관료조직의 축소를 추진하여 1948년 초까지 중앙부처 전체 인원의 19.5%를 감원하고 있었다.630) 이와 같은 대대적인 인원감축 속에서도 경찰 및 경비대의 대폭적 증강이 이루어진 것은, 미군정과 과도정부가 반공체제 유지를 위한 물리력 강화에 어느 정도 비중을 두었는지를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