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정치·사회적 개혁과 자유민주주의제도 이식
單選單政을 앞두고 반공체제를 강화하는 한편, 미군정은 반공체제의 틀 내에서 자유민주주의제도와 이념의 이식작업을 폭넓게 진행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남한 단선단정의 정통성을 어떻게 확보하느냐는 문제와 직결된 것이었다. 단일정부 수립이라는 민족의 열망을 폐기하면서 이루어지는 단선을 정당화하고 이를 일반 국민들이 수용하도록 하는 것은 단선 추진세력에 있어서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과제였다. 이를 위해 미군정을 비롯한 단선 추진세력이 동원한 것은 유엔과 선거였다. 전자가 단정의 외적 정통성 확보를 위한 것이라면, 후자는 내적 정통성을 확보하는 장치였다. 특히 선거에 광범한 국민의 참여를 확보하는 것은 북한과 정부수립의 정통성을 다투는 상황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과제였고, 이를 위해 강압적 조치가 동원되기도 했지만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상당한 사회·정치적 개혁이 추진되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 단선을 앞두고 정치·사회적 개혁이 추진된 것은 미국의 점령목표에 따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남한에서 궁극적으로는 ‘대소 반공블럭의 일원으로 기능할 반공국가’를 수립하고자 했지만, 이와 동시에 “수립될 남한국가는 자유민주주의제도와 이념을 기반으로 한 자유민주주의체제여야 한다”라는 전자와 쉽게 조화되지 않는 이중적 목표를 추구했었다.631) 미국은 전자의 목표가 이미 달성된 상황에서, 점령의 최종 국면에 반공체제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후자의 목표를 추진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주의적 개혁 조치들이, 우파세력의 반발 및 이들과 연결된 미군정의 미온적 태도를 극복하고 추진되게 된 데에는 유엔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역할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유엔은 궁극적으로 보면 단선·단정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장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유엔 감시하 선거가 결국 분단을 초래한다는 점 외에도 남한체제의 반민주적 성격에 대해 적지 않은 반발을 보였었다. 따라서 유엔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남한선거를 참관하는 조건으로 민주적 권리의 인정 및 자유분위기 보장을 요구하였고, 이것이 일정 부분 관철되면서 자유주의적 개혁을 가져온 것이다.
시기를 조금 거슬러 올라가 보면, 1947년 후반기에 우파세력은 ‘유엔 참관없는 남한단선’을 일방적으로 추진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고, 점령당국도 여기에 호응하는 듯 했었다. 예컨대, 1947년 6월 27일<보통선거법>이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통과되자 이승만과 한민당은 7월부터 시작하여 1947년 말까지 조속한 남한단선 실시를 군정당국에 끈질기게 요구하였고, 군정당국 역시 유엔감시 이전이라도 남한 단선을 실시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국무성에 의해 강력히 저지되었다.632) 이러한 당시의 정황을 볼 때, 만일 1947년 말 우파세력의 요구대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관여 없이 남한단선이 실시되었더라면, 1948년 초 5·10선거를 앞두고 이루어진 일련의 자유주의적 개혁 조치는 없었거나 아니면 그 정도가 극히 약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단선을 앞두고 이루어진 자유주의적 개혁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선거제도 개혁이었다. 민주주의 발전사에서 볼 때 남녀보통·평등선거의 제도화시점은 민주주의의 제도적 완성시점으로 평가된다. 이런 점에서 한국은 의회구성을 위한 최초의 선거에서, 재산·성·교육 등을 기준으로 선거권을 제약하는 일체의 선거권 자격제한 없이 바로 전면적 보통·평등선거제도를 채택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한국에서 최초로 제정된<보통선거법>은 과도입법의원에서 1947년 6월 제정되어 미군정에 의해 9월 3일 법률 제5호로 공포한<남조선입법의원선거법>이었다. 이 선거법은 민주적인 보통·평등선거의 기준에 상당히 미달하는 것이었다.633) 그러나 5·10선거를 앞둔 선거법 확정과정에서 입법의원선거법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요구에 의해 대폭 개정되었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에서 선거법 검토 및 확정을 담당한 것은 제3분과위원회였다. 제3분과위원회는 과도입법의원이 제정한 선거법을 검토하고 수정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하였는데, 그 결과 소선거구 단순다수대표제라는 입법의원선거법의 기본골격은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제반 독소조항은 전부 제거되었다. 예컨대, 선거권 연령이 23세에서 21세로 인하되고, 유권자 등록 방법은 자필서명 방식에서 날인제로, 투표방법은 自書制에서 기표제로 수정됨으로써 청년층 및 문맹자 즉 사회하층민에까지 선거권이 대폭 확대되었다. 월남인을 위한 특별선거구제 역시 이를 통해 선출된 의원들이 북한의 대표임을 주장할 것이라는 비판에 따라 폐지되었다. 선거관리위원회도 행정부가 완전 장악했던 것에서 사법부가 관여할 수 있도록 개정되었다.634)
선거법 외에도 법과 제도면에서 상당한 개혁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주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제1분과위원회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다. ‘선거의 자유분위기 확보 방안’을 다룬 제1분과위원회는 2개월간의 작업 끝에 최종건의안을 3월 17일 하지에 전달하였다. 법률문제·경찰문제·언론자유·정치범 석방 등의 문제를 다룬 이 건의안은 특히 평화적·합법적 수단에 의한 투표 또는 기권의 권리 보유, 경찰과 청년단체에 대한 조치, 정치범 석방 등을 강조하였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무엇보다도 경찰개혁을 요구하였다. 물론 “주민동원 및 악선전 저지 등 선거승리를 위해 경찰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에635) 경찰에 대한 근본적 개혁은 불가능하였지만, 제도적·법적 수준에서는 중요한 조치가 이루어졌다. 예컨대 1947년 11월 중앙경찰위원회 설치, 1948년 1월 경찰 권한의 축소(사회·경제활동 전반에 대한 인허가권이 일반행정조직으로 이양되거나 폐지) 등이 이루어졌다. 특히 3월 20일에는 경찰·군정경찰고문·우파세력들의 강한 반발 속에서<형사소송법>개정을 통해 영장제도가 도입되었다. 4월 1일에는 재판 3심제가 부활되었으며, 5월 4일에는<법원조직법>에 의해 법원행정이 사법부에서 대법원으로 이관됨으로써 3권분립의 제도적 기초가 마련되었다. 4월 5일에는 한국판 인권장전이라 할 수 있는<조선인민의 권리에 관한 포고>가 발포되었다. 이는 선거와 관련한 한국민의 권리를 규정하고 장차 법의 근거가 될 기본권을 규정한 것으로서, 법 앞의 평등, 신체·거주이전의 자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종교의 자유, 소유권 보장 등 제반 시민권적 자유를 규정한 것이었다.
법적·제도적 수준의 자유민주주의 이식과 함께, 미군정은 5·10선거를 앞두고 선거 및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대한 대대적인 선전작업을 전개하였다. 주한미군은 1947년 6월 군정청 공보부와는 별도로 주한미군본부 직속의 공보원(OCI)을 설치하고, OCI를 통해 1947년 7월부터 12월까지 각 도를 순회하면서 여론조사 및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단선단정에 앞서 각 지방 정치상황을 점검하고 홍보·선전전략을 수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준비작업을 마친 미군정은 1947년 말부터 공보원, 군정청 공보부, 24군단 공보처의 3각 협력체제를 통해 단선에 대한 선전·홍보작업을 본격화하였다.
홍보의 내용을 보면, 유엔의 한국문제 결정 및 유엔한국임시위원단 결정에 대한 선전, 유엔한국임시위원단에 대한 소련의 비협조적 태도 및 북한에서 행하는 약탈행위, 소련의 한국분단 음모, 미국의 대한원조, 농지개혁 프로그램, 북한의<토지개혁법>과 남한 토지분배의 비교, 북한헌법 비판, 선거등록 및 투표절차에 대한 홍보 및 참여의 중요성, 남북지도자연석회의 비난 등등 남북의 체제 경쟁 속에서 남한단선 및 단정을 정당화하는 내용이 주조를 이루었다. 또한 미국식 민주주의의 내용, 선거의 의미 등 자유민주주의의 내용에 대한 적극적 홍보도 이루어졌다. 이러한 선전·홍보작업은 단선을 정당화하여 국민을 선거에 동원하기 위한 조치였던 동시에, “한국민들은 민주적인 정부과정과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쉽게 지워지지 않을 영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군정당국의 지적처럼 자유민주주의 이념의 세례작업이기도 했다.
선거를 앞두고 군정이 전력을 쏟은 사회경제적 측면의 개혁은 토지개혁이었다. 토지개혁이 갖는 체제안정화 효과에 주목한 군정은 일찍이 1946년부터 과도입법의원에서<토지개혁법>을 통과시키고자 했지만, 자신의 기득권을 고수하려는 우파의 방해로 인해 성사시키지 못한 바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단선을 맞게 되자 미군정은 선거 이전에 군정이 보유한 토지에 대해서만이라도 농지개혁을 추진하게 된다. 미국무성 역시 적산토지에 대한 토지개혁이 선거 이전에 공포·실시되어야 함을 특히 강조하고 있었다. 미군정은 선거를 불과 두 달도 남겨 두지 않은 3월 22일<남조선과도정부 법령 173호>의 공포를 통해 新韓公社 소유 토지매각에 나섰다.636) 그것은 한 농가당 2정보가 넘지 않는 수준에서 해당 토지를 경작하는 소작인 등에 토지를 매각하는 것으로서, 농지가격은 연간 생산량의 30할로 매년 20%씩 15년 분할 상환하도록 되어 있었다. 당시 신한공사 소유 토지는 남한 전체 경지면적의 13.4%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 토지를 소작하고 있는 농가호수는 전체 농가호수의 27%를 차지하는 55만 4천여 호, 그에 딸린 가족인원만도 300여만 명에 달하였다. 농지개혁은 5·10 총선을 눈앞에 둔 당시의 시점에서 농민들의 선거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정치적 고려에서 취해진 개혁조치였다고 할 수 있다.
631) | 최장집,≪한국민주주의의 조건과 전망≫(나남, 1996), 2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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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2) | “Incoming Message from Seoul to Secretary of State”(1947. 8. 17.), 895.00/8∼1747, United States, State Department, RG 59, Decimal File, 895.00:Record Relating to the Internal Affairs of Korea, 1945∼1949, Scholarly Resources Inc., roll 1. ≪조선일보≫, 1947년 9월 5일. 박찬표, 앞의 책, 279∼280쪽. |
633) | 입법의원선거법은 당초 2차공동위원회가 재개될 경우 미·소공동위원회의 남한측 협의대상이 될 대표를 선출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정되었다. 따라서 과도입법의원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우파세력은, 남한 정치집단을 대표할 새로운 대표기구에서 좌파세력을 약화시키고 자신들의 지배적 위치를 보장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제한선거적 장치를 삽입시켰다. 선거권 연령을 23세로 높게 하여 청년층을 투표에서 배제한 점, 유권자 등록시 직접 서명을 요구하고 투표방식 역시 직접 후보자 이름을 쓰도록 하는 自書방식을 택함으로써 사회하층이 대부분인 문맹자(당시 성인의 6할)를 투표에서 배제한 점, 특별선거구제를 통해 월남인에게 총의석의 13.5%를 배정한 것 등이 그 대표적 예이다(박찬표, 위의 책, 266∼278쪽). |
634) |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에 관한 미국 연락장교의 보고서>(국사편찬위원회,≪대한민국사자료집 1:유엔한국임시위원단관계문서 I≫, 1987), 55∼63쪽. |
635) | G-2, W/S, no.96(1947년 7월 6일∼13일). |
636) | 4월 8일 제1차로 일인토지 불하가 개시되었다. ≪조선일보≫, 1948년 4월 27일. ≪경향신문≫, 1948년 4월 27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