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제Ⅰ장 선사 시대의 문화

1. 선사 시대의 유적과 유물

일찌기 우리 민족이 서쪽에서 차츰 해 돋는 동쪽을 향하여 옮아오기 시작하기는 퍽 오랜 옛날부터이었다. 이 사람들은 요동(遼東) 방면과 만주(滿洲) 벌에 흩어져 살더니, 다시 차츰 움직이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오늘의 반도 안으로 들어와 살게 되었다. 지금 함경북도의 일부에서는 돌을 때려서 만든 타제석기(打製石器)가 나타난다. 황해도 봉산군(鳳山郡)⋅재령군(載寧郡) 등의 석회암층(石灰岩層)⋅석탄층과 함경북도 동관진(潼關鎭, 城津地方)에서 발견된 젖먹이 짐승들의 화석(化石), 또는 같이 발견된 세석계(細石系) 석기 등을 보아 신석기 시대에 앞서, 얼마 전부터 우리 한반도에는 사람들이 옮기어 오기 시작하였던 것을 짐작하겠다. 대체로 압록강과 두만강 연변에서부터 남으로 제주도까지, 곳곳이 사람들이 퍼져 살고 있던 유적이 남아 있다. 역사상 중요한 곳을 들어 보더라도, 평양⋅서울⋅대구⋅경주⋅김해(金海) 등으로, 오늘날 사람들이 많이 모이어 있는 지대와 큰 강의 유역은 옛날에도 사람들이 살기 좋고, 교통이 편리하여 일찍부터 사람들이 집중하였었음으로, 그들이 살면서 흘리고 떨어뜨리어 남긴 여러 가지 살림살이 도구를 발견케 된다.

선사 시대의 사람들은 흔히 앙천광(仰天壙, 위에서 땅속으로 파들어간 움 구덩이) 속에서 살았다. 두만강 유역의 함경북도 해안 지방에는 마치 부락(部落) 같이 모이어 있다. 아구리 폭(徑)은 4~10m에 이르는 크고 작은 것으로, 여러 가지가 있으며, 깊이는 땅 위에서 속으로 150cm나 파들어간 것도 있으며, 그 속에 화로를 만들어 놓은데도 있고, 큰독(大甕)을 화로로 쓴 흔적도 있다. 특히 웅기(雄基) 송평동(松坪洞)에 있는 것은 그 속에 온돌을 만들어 쓰던 것이 남아 있다. 이런 앙천광 속에는 옛날 여기서 살던 사람들이 쓰던 석부(石斧)⋅조개껍질⋅숫돌 또는 골기(骨器) 등 살림 기구가 남아 있는 것이 발견된다. 또 앙천광 주거지(住居址, 살던 터전)에는 흔히 조개묻이(貝塚, Shell tomb)가 이루어져 있다. 함경북도 경흥군(慶興郡) 일경(一境)의 여러 곳과 경상남도 동래(東萊)⋅김해⋅양산(梁山) 등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조개묻이는 바다 가까운 비탈진데 많이 형성되어 있다. 동래⋅양산⋅고성(固城) 등은 순석기(純石器, 아직 금속 기구를 쓰기 전) 시대의 것이다. 김해에 있는 것은 석금(石金)을 아울러 쓰던 때의 조개묻이로, 옛날 사람들의 살던 모습을 엿보게 된다. 활촉⋅칼자루⋅질그릇(土器) 조각⋅여러 가지 골각기(骨角器)⋅조갑지⋅짐승의 뼈다귀⋅어렵(漁獵)에 쓰는 제구(諸具) 등이 발굴되어, 그들이 바닷가에서 일상 생활하던 모습을 눈에 어리게 한다. 옛 사람들이 살던 터전은 또 산꼭대기나, 큰 강 유역에도 남아 있다. 북에서 송평동을 비롯하여 남으로 김해와 금강(錦江) 연안 부여(扶餘)의 나복리(羅福里), 한강 연안의 암사리(岩寺里, 廣州郡) 대동강 가의 오야리(梧野里)는 평지에 발달된 것이고, 웅기 백학동(白鶴洞)과 만주 용정촌(龍井村) 부근의 삼산동(三山洞)에 있는 성채(城砦)는 산위에 이루어진 살림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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