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제Ⅰ장 선사 시대의 문화

2. 선사 시대의 사회 생활

우리 조상들은 먼저 말한 지역에 널리 퍼져서 떼지어 몰려 살다가, 차츰 자기들의 생활을 좀 더 낫게 발전시키려고 힘썼던 것이다. 앙천광 살림터에 남긴 자취를 보면 온돌을 만들고, 화로불을 지니고 살게 되었었다. 인류의 문화는 불을 쓰는데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북쪽 추운 지방에서 살던 그들은 추운데서 견디고 살게 되었었다. 불을 쓰게 되면 음식물(飮食物)을 조리(調理)하여 먹고, 따라서 식물(食物)의 가지 수가 늘어가며, 채집(採集)하는 범위가 확대되어 생활권(生活圈)이 넓어진다. 또 불을 쓰게 되면, 어두운 밤에도 일을 하게 되어 사람의 생활 활동의 시간이 연장되매 차츰 사회의 발전을 이룩하여 갔다.

대체 선사 시대의 살림 기구는 한편 무기로도 썼다. 석부(石斧)는 타제(打製)에서 마제(磨製, 곱게 갈아서 만드는 것)로 발달한다. 더욱 곱게 갈아서 만든 칼 같은 것은 자루를 얽어 붙일 수가 있어 기구(器具) 만들기와 목재(木材)의 가공(加工)에 널리 이용되고, 또 집 짓는데 통나무와 널판을 다듬고 깎을 수 있게 되어, 살림집의 양식을 훨씬 규모있게 발달시키었다. 그 뿐 아니라, 나무로 만드는 즙기(什器), 통나무 배의 건조(建造)에도 새로운 마제 기구가 쓰이게 되었다.

타제 석기는 함경북도는 물론, 간도(間島)⋅소련(蘇聯) 영토인 연해주(沿海州)의 해안 지방에서 나타나며, 연마한 석부는 함경북도에서 경상남도에 걸쳐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타제 석기를 쓰면서 차츰 석금을 아울러 쓰게 되는 사이에 사용된 석기는 석부 외에 석촉(石鏃)⋅석창(石槍)⋅석도(石刀)⋅석추(石錘)⋅석착(石鑿) 등의 여러 가지로, 무기 또는 일상 생활을 지탱해 나가는데 쓰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식물 채집이나, 농작물 재배와 가축⋅가금(家禽)을 치는데도 사용하며, 활과 석창은 무기로 쓰며, 사냥(狩獵)에 쓰고, 석추는 고기잡이 그물 뜨는데 추로 썼던 것이다. 석도는 먹을 것 만드는데 쓰며, 또 다른 기구의 제작에 썼다. 차츰 생활이 발달함에 따라 석기와 아울러 구리(靑銅)⋅쇠(鐵)로 만든 도구를 사용하게 되고, 더 발달되어 차츰 금속기 시대로 진전하였다. 석기만 쓰던 때부터 골촉(骨鏃)⋅골추(骨錐, 송곳)⋅골침(骨針) 등의 골기(骨器)를 일상 생활 필수품으로 썼으며, 장식품으로 잇발(齒牙片)과 목뼈(脛骨)을 꾀어 목거리로 쓰고, 사슴뿔(鹿角)을 패물(佩物)로 썼다.

우리 나라에서는 앙천광과 조개묻이를 이루고 살던 때에서부터 부족(部族) 사회에 이르는 동안, 북쪽의 부여(扶餘)⋅고구려(高句麗)⋅읍루(挹婁)나, 반도 안의 옥저(沃沮)⋅예(濊)나, 삼한(三韓)의 각 부족들은 원시적 추경작(鍬耕作, 가래로 밭 갈이 하는 것)에서 축양(畜養)적 경작(소를 경작에 사용하는 것)으로 발전하여, 여러 가지 곡물(穀物) 농사를 하고, 남쪽의 따뜻한 지방에서는 여러 가지 과실을 심어 먹게 되었다. 짐승으로 멧돼지⋅노루⋅향록(香鹿)⋅사슴⋅토끼⋅적랑(赤狼)⋅늑대 등을 잡아 먹었던 흔적이 있고, 남방에서는 닭이 유명하였다. 농사 짓고 짐승을 길러서 먹고 살게 되며, 먹을 것을 간직하기 위하여 그릇을 만들게 되었으며, 석기 시대에는 살이 두텁고, 모래가 섞인 거치른 질그릇을 만들어서 쓰게 되었다. 우리 나라의 것은 무늬가 없고 살이 두터운 것이 특색이며, 이것이 차츰 살이 엷어지며, 무늬가 생긴다. 이후 또 그릇 만드는 기술이 발달하여 녹로(轆轤)를 써서 모양을 곱게 다듬게 되었으니, 이런 것은 김해⋅양산⋅경주의 월성(月城) 성 밑에서, 또 대구 달성(達城) 성 밑에서 발견된다.

먹는 것이 발달되매 따라, 입는 것도 차츰 나아졌다. 처음은 짐승의 껍질을 그대로 옷으로 입고, 차츰 여러 가지 의복 재료를 얻게 되며, 잠상술(蠶桑術)이 발달됨에 따라 옷감을 짜게 되었다. 이렇게 생활이 발달됨에 따라 사회의 구조도 전개되어 핏줄이 서로 당기는 사람끼리 모이어 힘을 합하여 살게 되었다. 이런 사회를 씨족(氏族)사회라고 한다. 이런 씨족의 모임은 한 마을에서 살게 되며, 신(神)과 조상(祖上)을 받들어 제사를 드리며, 일상 생활하는데 필요한 일도 같이 하였다.

이런 사회는 대체 신석기(新石器)를 쓰는 사회에 이루어지며, 농업과 목축(牧畜)이 발달하여 힘드는 일을 많이 하게 되면서 남자 중심의 부계제(父系制) 사회를 이루게 된다.

이 때의 종교 생활의 유물로는 고인돌(Dolmen, 支石墓)이란 것이었으니, 우리 나라에서는 만주에서 한(韓) 반도와 남해(南海)의 여러 섬에 퍼져 있으나, 제주도(濟州道)에만은 없다. 이것은 평야를 낀 해 바른 높은 언덕이나, 한강⋅대동강⋅청천강(淸川江) 유역 등과 교통이 편리하고 사람들이 살기 좋은 데에 남아 있다. 네 개의 돌장으로 궤짝같이 쌓은 위에 큰 돌장을 덮은 북방계(北方系, Table式)라 하는 것이 중부 이북에 흩어져 있다. 봉천(奉天, 滿洲) 웅악성(熊岳城) 남방에 있는 대석붕(大石硼~中國 이름)과 은율군(殷栗郡) 북부면(北部面) 운산리(雲山里) 것은 규모가 웅장한 대표적인 것이다. 또 경상⋅전라도 방면에는 땅을 파고 돌을 모아, 석실(石室)을 만들고, 그 위에 돌장을 덮어 겉으로는 얕은 제단(祭壇)같이 보이는 것이 있으니, 이것을 남방계(南方系)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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